우리가 잘 몰랐던 단종 이야기
드라마와 영화로 홍수같이 쏟아지는 조선시대 이야기. 주로 많이 다뤄지는 소재가 있다. 연산군, 광해군, 세종, 태조 이성계, 영조와 정조, 사도세자, 선조 (이순신 때문에), 숙종 (장희빈 때문에) 등 아무래도 대중이 관심 가질 만한 서사가 가득한 소재들이다 보니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겠지..
아마도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단종을 이렇게 주인공으로 다룬 이야기는 처음이지 않을까 싶다. (ai에 물어보니 기억이 맞다고 하네) 드라마나 영화 속 단종은 항상 아역으로 출연하기 일쑤였고, 세조(수양대군)의 보조적 역할에 머물렀다. 콘텐츠가 그를 그렇게 다루니 우리의 기억 속에도 단종은 없거나 매우 나약하고 불쌍한 왕 정도로만 각인되어 있는 것이 너무 당연한 결과이다.
단종에 대한 내 솔직한 기억을 나열해 보자면 '세종(4대)이 죽고, 아들인 문종(5대)이 일찍 죽게 되어, 어린 단종(6대)이 왕위에 오르지만, 삼촌인 수양대군이 상왕 정치를 하다 결국 단종을 폐위시키고 귀양 보내며 자신이 왕위에 오르며 조선의 7번째 왕이 된다' 정도로 매우 단편적이다.
가장 최근에 동시대를 다뤄 유명했던 작품은 2013년 작 <관상>(900만)으로 관상가 김내경(송강호)과 세조(이정재) 투탑으로 진행된 영화이기에 여기에서도 단종은 아주 잠깐 스쳐가는 역할에 불과했다. 이처럼 삶 자체도 비운의 주인공이었지만 작품 속에서 마저 주목받지 못하는 아주 기구한 운명이었다.
그런 단종에게도 볕 들 날이 오고야 말았다. 장항준 감독의 손으로 탄생한 본격 단종 이야기 <왕과 사는 남자>가 개봉을 하면서 말이다. 역사의 만년 조연으로 활약하다가 장항준의 손을 통해 단연코 주연으로 발돋움하게 되었다. 그것도 그저 그런 영화가 아니라 오랜만에 터지는 한국영화 천만각 작품으로 말이다.
일단 캐스팅부터 완전 미쳤다. 역찢남(역사책을 찢고 나온 남자) 확신의 조선인상 유해진의 단독 드리블을 필두로 박지훈 아니면 아무도 소화하기 어려웠을 거라는 단종의 심리 변화, 기존의 이미지를 싹 다 뒤엎은 거구의 한명회까지 정말 찰떡이란 이런 거구나 싶을 정도로 완벽한 배우 캐스팅이라 할 수 있다.
그 모든 것에 앞서서 대한민국 영화계가 30년 영화인인 장항준을 발굴했다는 것에 가장 큰 의미를 두고 싶다. 그동안 재능은 누구나 인정했으나 입봉작인 <라이터를 켜라> 이후 확실한 대표작이 없던 그에게 이렇게 큰 기회를 제공하고 그 기회를 단 번에 잡아 불황에 빠진 한국 영화계에 활력을 넣고 있는 장항준의 능력도 정말 대단하다는 말 밖에는 없을 것 같다.
각종 인터뷰에서 장항준 감독이 직접 밝힌 바에 의하면 "엄흥도가 장례할 때 '옳은 일을 하다 화를 입어도 내가 달게 받겠다(爲善被禍 吾所甘心)'라고 하며 장사 지냈다."라는 한 문자에 의해서 영화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사료의 한 줄에서 시작된 영화는 이전에 <광해, 왕이 된 남자>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인조실록에 기록된 "광해군이 도승지 허균에게 '나와 닮은 자를 찾아 위협에 노출시킬 대역을 하게 하라'라고 명했다."라는 한 줄에서 광해군과 닮은 하선이라는 가상의 인물을 통해 영화적 상상력을 펼치게 된 것이다.
역사적으로 단종의 유배, 역모, 죽음 등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허구인지 경계가 모호하나 이는 역사 왜곡의 영역이 아니라 사실을 바탕으로 한 영화적 상상력으로 인정해야 한다. 역사의 기록은 결국 승자의 기록일 수밖에 없으니 자신의 과오를 가리기 위해 온갖 방법을 다 쓴다는 점을 감안했을 때 <왕과 사는 남자> 속 이야기는 너무 그럴듯하여 사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여하튼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영화는 너무 잘 짜여진 각본과 연출 아래 베테랑과 신예들의 연기가 잘 어우러지며 환상의 호흡을 자랑했다. 역사적 사실이기에 어쩔 수 없는 단종의 죽음이라는 스포일러를 이미 듣고(?) 갔지만 초반 유해진의 원톱 조선인 생활 연기에 박장 대소하고 한명회(유지태)와 단종(박지훈)의 갈등과 역모를 통해 긴장감이 유발되며 마지막 죽음에 이르는 장면에서는 흐르는 눈물을 참을 수가 없게 만들었다.
오랜만에 1000만 영화의 조짐이 보인다. 최근 <만약에 우리>라는 저예산 영화가 200만을 넘어서는 쾌거를 올린 지 얼마 되지 않아 또 한 번의 낭보가 이어질 듯하다. 극장가가 어렵다고 하나 코로나 이후 넷플릭스 등의 OTT로 높아진 관객들의 눈높이를 채우지 못한 탓이 클 것이다. 이렇게 좋은 영화가 나오니 사람들이 불편을 감수하고서 영화관을 찾고 있다.
이번 <왕과 사는 남자>를 통해 장항준은 거장과 흥행 감독의 반열에 이름을 올릴 것이고, 유해진은 독보적인 대한민국 1탑 배우로 우뚝 설 것이며, 박지훈은 대세 배우로서의 입지를 탄탄히 할 것이다. 그리고 한국 영화계는 더욱 자극을 받아 좋은 시나리오, 좋은 영화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여 오랜만에 극장을 찾은 관객들의 발길이 돌아서지 않도록 더 노력해 주길 바라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