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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봉 Feb 18. 2019

<캐주얼 정장>

-시시詩詩한 이야기

  매일 밤 치욕을 우유처럼 벌컥벌컥 들이켜고 잠들면 꿈의 키가 쑥쑥 자랐을 때 그림자가 여러 갈래로 갈라지는 가로등과 가로등 사이에서 그 그림자들 거느리고 일생을 보낼 수 있을 것 같았을 때 사랑한다는 것과 완전히 무너진다는 것이 같은 말이었을 때 솔직히 말하자면 아프지 않고 멀쩡한 생을 남몰래 흠모했을 때 그러니까 말하자면 너무너무 살고 싶어서 그냥 콱 죽어버리고 싶었을 때 그때 꽃피는 푸르른 봄이라는 일생에 단 한 번뿐이라는 청춘이라는   - 심보선, <청춘> 부분.


1.우리는 너무너무 살고싶었고, 너무너무 절실했다. 죽음이라는 모험이 가까워질만큼 혹독한 시기를 지났고 지나고 있다.


2. 나는 경험론에 입각하여 ‘캐주얼정장’이라는 말을 싫어한다.


‘면접 복장: 캐주얼정장’

  자기소개서를 내고, 필기시험을 보고나니 감사한 메일이 왔다. 면접을 보러오란다. 이메일에 보니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한다는 내용의 끝자락에 복장에 관한 설명이 첨부되어 있다. 일단 면접에 가게 해준 것은 참 감사한데, 고민이 몰아친다.

캐주얼정장? 이런게 끔찍한 혼종이구나. 캐주얼은 무엇인가, 정장은 무엇이고 캐주얼 정장이란 또다시 무엇인가 나는 누구이고 여긴 어디인가. 따뜻한 아이스 아메리카노는 가능한가.


네이버 검색해 사전적 의미를 찾아봤다.

캐주얼(Casual): 1. 평상시에 입는 편안한 옷. 2. 일상적으로 가볍게 입는 종류.

정장(正裝):  정식의 복장을 함. 또는 그 복장.


  그러니까 사전을 통해 파악한 두 가지 의미를 종합하면 ‘캐주얼정장’이라 함은 평상시와 일상과 정식이 함께 있는 복장이거나, 편안함과 가벼움을 담은 정식의 복장 따위의 해석들이 가능해진다. 결과적으로 애매함만 커졌다. 의미가 불투명하면 취업준비생들은 힘겹다. 어느 장단에 맞춰 춤을 춰야 할지, 산재한 고민에 한 가지 고민이 추가된다.

  결국 나는 배바지를 입고 면접장에 갔다. 하늘색 줄무늬가 들어간 줄무니 셔츠를 9부정도로 줄인 정장바지에 넣어 입었다. 넥타이와 마이를 착용하지 않았으니 정장에서 살짝 벗어나긴 했지만 모험은 하지 않은, 그런 애매함으로 무장. 이날 사람들의 복장에서는 나와 같은 고민의 흔적들이 역력했다. 어떤 사람은 청바지를 입고 왔지만 단정한 구두를 신었고, 어떤 사람은 정장 비슷한 옷을 입되 단화를 신었다.

  ‘캐주얼정장’을 주문한 회사는 이 회사가 딱딱한 정장을 고수할 만큼 딱딱한 회사는 아니며, 정도 융통성을 지닌 회사라는 것을 복장을 통해 어필하려던 것일 테다. 하지만 캐주얼정장은 그렇지가 못하다. 하나라도 잘 보이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이 애매함은 폭력이 된다. 일종의 갑을 관계가 되는 셈이다. 을 들은 상충하는 의미 안에서 끊임없는 고민을 할 수 밖에 없는 이들이다. 이렇게 입으면 너무 캐주얼한가, 이렇게 입으면 너무 정장인가. 바지는 청바지를 입으면 되는가, 너무 가벼워보이지는 않는가, 오만 고민들을 시작하다보면, 면접에 가기도 전에 을들은 비참해진다.

   “요즘 젊은 친구들은 왜 이렇게 천편일률적이죠? 면접에 정장을 입으라는 안내가 있었나요? 설령 있었다고 해도 거기에서 청바지를 입고 왔으면 바로 뽑았을 텐데. 눈에 띄니까요. 나는 그런 사람들 있었으면 바로 뽑았을 것 같아” 어떤 면접에서는 한 면접관이 웃으며, 친절한 조언을 해주기도 했다.

 ‘네, 그러면 다음엔 찢청(찢어진 청바지)에 굵은 체인을 주렁주렁 달고 갈게요.’ 라고 속으로 외치면서 주섬주섬 넥타이를 바로 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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