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다 울어본 일이 있는가.
이영지의 노래 가사에 그런 말이 있다.
"죽더라도 이빨 꽉 깨물고 덤벼 뭐든지."
나는 원래 그렇게 소위 말해 빡센 스타일을 좋아한다.
엄마의 전화를 받고 석달 쯤 지난 날이었다. 명절이었다. 주말이 환상적으로 끼어있어 연차를 내면 꽤 긴 휴가를 낼 수 있는 연휴였다. 나는 시골에 계신 부모님께 가지 않은 것뿐만 아니라 그 후로 석달 동안 부모님께 전화 한통도 하지 않았다. 살면서 처음이었다.
석달 전 엄마와의 통화를 복기해보자면, 엄마의 69번째 생일이었다. 생일을 축하드리기 위해 전화를 걸었고 엄마는 억센 경상도 사투리로 '여보세요'와 '그래' 라는 단 두 문장이 오가자마자 내게 이렇게 말을 꺼냈다.
-내가 부아가 치밀어서 전화를 했다가 0서방이 받아서 말 안하고 끊었다.
짐짓 놀란 나는 무슨 화가나는 일이 있는 것인가 긴장했다. 엄마는 내가 기억하는 한 평생을 남편(내 아버지)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며 지냈는데 나이가 들수록 서로 고집이 심해지면서 그 갈등이 더 격해지는 중이었다. 결혼해서 이미 나이도 마흔을 넘어 지역조차 부모와 먼 곳에서 지내고 있는 나는 가끔 만나거나 만나는 것보다는 더 자주 통화하는 엄마를 대할 때마다 아빠에 대한 저주와 한탄을 퍼붓는 엄마의 이야기를 샤워물처럼 받아낸지 꽤 오래되었는데도 이번에는 꽤 긴장이 되었다. 경상도 말로 매우 화가 났다와 동일어인 '부아가 치밀다'라는 단어까지 쓸 일이면 아빠와 꽤 큼지막한 일이 있었나보다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작년에는 초기 치매를 앓는 아빠가 동네 사람과 싸워 상대와 대거리를 하다 본의 아니게 큰 돈을 물어주었고 올해 초에는 트랙터를 몰다 갑자기 나타난 노루를 피하려다 트랙터가 넘어가는 바람에 아빠도 크게 다치고 트랙터도 부서지는 사고가 났다. 점점 사건의 스케일과 엄마의 한탄이 커져가는 중에서도 한번도 쓰지 않았던 표현인 '부아가 치밀어서 벼르고 있었다'라는 말이 이제는 엄마와의 대화에서 어지간한 일에는 멈추고 있을 수 있었던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는 중이었다.
-왜요 엄마, 무슨 일인데요?
그 후 쏟아진 엄마의 이야기를 짧게 요약하자면 이러하다.
엄마는 화가 났다, 그것도 매우.
엄마와 아빠는 시골에서 지내면서 첫째인 당신들 아래 동생들을 여럿 두고 있는데 아빠의 바로 아래 동생인 삼촌은 만혼을 한 나보다 훨씬 먼저 장가를 보낸 아들이 둘이 있었다. 그들은 결혼생활을 한지 꽤 되었는데도 나처럼 자녀가 없는 상태였고 나는 그 사실에 대해 딱히 궁금한 적이 없었다. 그러다 공교롭게도 그 둘 아들의 아내들이 동시에 임신을 하는 겹경사가 생긴 것이다. 그리고 그 사실을 알게 된 엄마는 앞에서는 축하를 하였으나 언젠가 내게 소식을 들려주리라 기대했던 딸이 아직도 자녀 소식이 없음에 질투와 화가 동시에 치미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왜 축하를 떠나 본인이 화가 나는 일인지 나는 엄마를 잘 아는 딸이기에 나 역시 화가 났다.
그리고 엄마는 내게 어떤 한의원을 알려주며 당장 거기 가서 한약을 지어먹을 것을 명령했다.
나는 더이상 고분고분한 딸이 아니기에 정중한 예를 갖춰서 거절했다.
엄마는 다시 병원 이름을 알려주었다.
나는 당황스럽고 황당해서 대답을 하지 못했다.
엄마는 당장 가겠노라고 대답하라고 소리를 질렀다.
내가 너무 싫어하는 내 이름에 성을 붙여 부르는 그 목소리로 나를 두번, 세번 불렀다.
나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만 했다. 한의원에 가라고 했다. 그곳에 가면 백프로라고 했다. 나는 그러면 난임센터는 왜 있는거냐 물었다. 그런 (배운 티 내는) 소리 하지 말라고 했다. 대답을 하지 않았다.
엄마는 두번, 세번, 네번 분노했다.
나는 할 말을 찾다가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는... 내가 어디가 아픈거면 어떡할 거에요?
이 질문은 내 신체적인 것에 대한 질문이 아니었다.
나의 외로움, 슬픔, 만성 우울감, 왜 사는지 모르겠다고 느낀 40여년간의 내 삶에 대하여 차마 부모가 가슴아플까봐 말하지 않았던 조심스러운 질문, 그럼에도 두 사람에게 끊임없이 '쓸모있는 인간'임을 입증하려했던 삶, 그리고 지금도 그 의무를 부여받고 있는 나의 지금에 대한 궁금증이었다. 굳이 자녀를 낳지 않아도, 아니 설사 내가 낳지 못하는 상태라 하더라도 그것이 과연 화를 돋구는 일까지 되는 일인지에 대한 순수한 궁금함-그리고 그런 질의를 받고 대답까지 해야 하는 이 상황에 대한 충격으로 인해 튀어나온 질문이었다.
그리고 그 짧은 순간에도 혹여나 나의 이 질문에 엄마가 미처 몰랐던 나의 우울감을 눈치채고 마음이 아플까봐 살짝 걱정까지 되는 질문이었다. 만약 엄마가 갑자기 그 태도가 바뀌어 '아니 우리 딸 어디 아프냐' 라고 물으면 사과마저 할 참이었다.
0.1초만에 엄마의 대답이 돌아왔다.
-그러니까 니가 어디 안좋아서 아(애)를 못낳는 형편이라고 하면 차라리 내가 포기라도 하지!
나는 어릴때부터 공부를 아주 잘했다. 어릴때부터 책읽는 것을 좋아했고 공부에 재미가 있었다. 사교육을 받을 형편도 못되었지만 필요도 없을 정도로 공부를 좋아했고 잘했다. 생존에 모든 에너지를 집중해야 할 정도로 삶이 팍팍한 집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그정도였나, 정말 그랬던건가 싶기도 하다.
부모님은 하루 온종일 일을 했다. 내게 밥을 하는 방법을 9살때 알려주었다. 시키는대로 퇴근하는 부모님 시간에 맞춰 저녁밥을 앉혔는데 압력솥 뚜껑이 너무 무서웠다. 엄마는 그걸 치키치키라 부르며 밥이 익은 것 같으면 옆으로 기울이라고 했는데 터져나오는 기세에 압력솥이 폭발할 것 같아서 너무 무서웠다. 어쩌다 집에서 키우는 화분에서 지렁이가 나온 날에는 한칸짜리 방 안에서 도망갈데가 없어 의자위에 올라가 앉아있었다.
열살쯤이었나 내가 왜그랬는지 정말 지금도 영문을 모르겠는데 집에 오는 길에 바지에 소변을 보고 말았다. 부끄럽거나 당황스럽지 않았다. 집에 왔다는 사실에 안도하며 엄마에게 말헀더니 엄마가 욕을 하며 자신의 신세를 한탄했다. 그 후로 어떤 실수도 엄마에게 말하면 안되겠다 생각했다. 그때 살던 집은 3층까지 불법으로 건축한 어설픈 도장으로 마감한 계단이 있는 곳이었고 우리는 2층 왼쪽집에 세를 들어 살고 있었다. 어느날 계단을 내려가다 그냥 미끄러졌다. 아직도 그 순간이 기억난다. 넘어지면서 얼굴과 배로 미끄러져 내려간 계단은 열 세칸이었다. 입구에 철문이 있었는데 열려 있어서 마지막 계단에 도달했을 때는 얼굴이 도로변에 쏙 나왔다. 눈을 떴다. 사실 죽을 줄 알았다. 집안에서는 겨우 어쩌다 있는 휴일을 가진 엄마와 아빠가 전국노래자랑을 보고 있었다. 짧은 찰라지만 겨우 몸의 굴러떨어짐이 멈추었을 때, 말그대로 빛의 속도로 느낀 두 가지는 우선 '너무, 너무, 너무, 아프다'였다. 숨을 쉴수가 없었다. 너무 아팠다. 정말로 너무. 분명 어딘가 부러졌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바로 이어서 든 생각은 '엄마한테 혼날텐데'였다. 워낙 좁고 작은 방들이 다닥다닥 모인 곳이라 방문이라 부를법한 문을 겨우 단 우리 집에서는 아직도 티비 소리가 흘러나오는 듯 했고 나는 혹여나 내가 넘어진 소리가 집에 들릴까 그것이 먼저 걱정이 되었다. 얼굴만 쏙 나온 나는 몸을 당겼다. 얼굴은 밖에 있고 몸을 애벌레처럼 당기는 기분이었다. 허리를 펼수가 없었다. 팔로 기어서 바로 옆에 있는 골목길에 숨었다. 대낮이었다. 일요일이고 정오 즈음이었다. 전봇대 앞에 앉아 한참을 엎드려 있었다. 비로소 숨을 쉴 수 있었다. 왜 외출하던 길이었는지 생각은 나지 않지만 확신은 있다. 아마도 책을 사러 가는 길이었을 것이다. 나는 책을 살 때 외에는 돈을 얻지 않았다. 얻을 수도 없었지만 얻을 생각도 하지 못했다. 일요일이었고, 낮이었고, 나는 잠시 몸을 추스린 다음에 집에 아무렇지도 않게 복귀했다. 티비에서는 노래소리가 나오고 있었고 엄마 아빠는 누워서 눈으로 나를 보았고 나는 웃었다. 긴바지를 입고 지냈다. 엄마 아빠가 몰라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갈비뼈가 부러진 게 아니라 더 다행이라 생각했다. 아팠다. 다시 평일이 되었고 나는 화분에서 지렁이가 나올까봐 겁이 났다. 정전이 수시로 되는 집이라 정전이 될까 겁이 났다. 치키치키가 갑자기 툭하고 꺾여 드센 압력밥솥이 터질까봐 무서웠다. 때때로 숨을 크게 들이쉬며 정말로 갈비뼈가 부러진 건 아닌지 확인했다. 며칠이 지났을 때 예전 동네에서 살던 언니가 놀러왔다. 우리집에는 손님이 오는 일이 거의 없는데 왜 왔는지 지금도 모르겠다. 그리고 나는 그 언니에게 바지를 걷어 내 상처를 자랑했다. 발목부터 허벅지까지 양다리가 온통 멍이 들어있었다. 언니는 깜짝 놀랐다. 그 놀라는 모습이 신기했다. 어떤 의미로는 돈드는 상처가 없게 끝난 나의 에피소드, 부모님께 들키지 않고 끝난 나의 고통이 자랑스러웠는데 누군가 내 상처를 보고 놀라는 것이 신기한 경험이었다. 언니가 물었다.
'이모도 아나..?'
나는 모른다고 했다. 말하지 말라고 했는지 말하지 말라고 하면서도 내심 말하기를 바랬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언니의 놀라던 그 표정은 잊혀지지 않는다. 그리고 그 날 언니가 돌아갔고 나는 부모님이 알았는지 알지 못했는지 궁금했던 것 같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아무말이 없었고, 나는 마흔이 넘은 지금도 계단에서 굴러떨어지는 꿈을 꾼다.
엄마와의 통화가 끝나고 맞이하는 첫 명절이다.
신발끈을 매었다. 저녁이었고 남편에게는 있었던 사건에 대해 말하지 않은 상태였다.
사실 나는 지금도 내가 어떤 상태인지 어떤 말을 했는지 어떤 감정 상태인지 명확히 알지 못한다.
뭐 괜찮은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화를 내야할 것 같기도 하고 내가 너무 예민한 것 같기도 하고
이기적인 것 같기도 하고 멍청한 것 같기도 하고, 천하의 나쁜 년 같기도 하고 당당한 삶의 주체인 것 같기도 하고, 우울한 것 같기도 하고 명철한 것 같기도 하고.
달리기로 한다.
어차피 해지는 저녁이니까 옷차림이야 운동복이면 아무래도 상관없다. 왼쪽 무릎이 약간 부담이 가는 것 같아서 띠 모양의 무릎보호대를 착용한다. 달리때만 음악을 듣기에 암밴드를 차고 에어팟을 한쪽만 착용한다. 아무리 운동이라도 어느 정도는 신경이 쓰이기에 마스크를 착용한다.
나간다. 잠시 몸을 풀어주고 워치로 달리기 모드를 켠다. 한달에 100킬로미터를 채우기로 했다. 아무도 시키지도 않고 감시하지도 않고 보상도 없는 일이지만 그냥 하기로 했다.
계단에서 굴러서 얼굴만 문밖으로 쏙 나왔을 때 고통에 젖은 눈물이 맺힌 얼굴로 나는 제일 먼저 집에서 흘러 나오는 전국노래자랑 소리를 들었고, 혹시나 문이 열릴까 걱정했고, 동시에 기대했다. 에어팟으로 음악이 흘러나온다. 나는 집 주변을 돌아 공원으로 성큼 들어간다.
'나는 내가 되고, 별은 영원히 빛나고'
랜덤으로 플레이 되는 노래들 틈에 달리기와 맞지 않는 발라드가 재생된다. 공기가 신선하다.
제목이 '어른' 이었다. 갑자기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닦을까 하다가 그냥 두었다. 눈물이 나는 것에 더해 펑펑 울고 싶어졌다. 그래서 펑펑 울었다. 엉엉 소리를 내어 울었다. 계속 달렸다. 달리면서 엉엉 소리를 내며 울었다. 마스크를 끼고 나오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콧물을 흘리며 엉엉 울면서 하늘을 보았다. 별이 쏙 나오기 시작하는 시간의 하늘이었다.
고개를 쑥 내밀며 미끌어졌던, 그리고 엉금엉금 골목길을 기어갔던 내가 생각났다.
다시는 그러지 말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