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당신의 발가락과 대화해본 적이 있는가.
흔히 어딘가 불편해진 후에 몸의 말을 들어야 했다, 라는 표현을 쓴다.
그 표현을 쓸 때만큼은 몸과 내가 분리된 각각의 인격체인 듯 느껴지게 하는 문장이다. 늘 내것임이 당연하고 마음이 가는대로 도구처럼 휘두르던 것에서 아직 동등하지는 않아도 불만정도는 들어줄 수 있을 법한 대상으로 격상되는 순간이다. 나는 가끔 내 몸의 구석구석에 나라는 존재를 지켜내는 정령같은 힘이 숨어있는 건 아닐까 라는 생각을 아주 오래전에 해본적이 있다.
그러니까 청소년 시절이었다. 기억은 희미해지고 현재의 내 상태에 따라 미화되기도 비화되기도 하는 법이라 그때의 내 감정의 소용돌이가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는다. 나는 일기든, 사진이든, 기록이나 기념품 그 무엇이든 잘 버리는 습성을 가지고 있는데 (애초에 사진도 잘 찍지 않는다) 아주 가끔 지나간 사건의 전모와 과거의 실제 내 모습들이 궁금해질 때 아쉬운 마음이 드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눈앞에 수십년 전부터의 내 일기장이 있다면 과연 내가 내 일기를 다시 펼쳐볼까에 대해 상상해보면, 아직은 잘 모르겠다.
아무튼 청소년 어느즈음에 나는 죽음에 대해 생각한 일이 자주 있었다. 그리고 죽음에 대해 두 가지의 내적 경험을 하게 되었다. 알다시피 경험이란 내가 받아들이는 어느 특정 포인트를 타인에게 도저히 설명하기 힘든 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술을 해보겠다.
첫번째는 고교시절 학교가는 버스를 기다리던 정류장이었다. 버스를 기다리는 내 옆에 한 여자가 서 있었는데 회사에 가는 듯한 복장의 젊은 여자였다. 그런데 그 여자의 옆모습을 보는 순간 정말 찰라의 순간에 이런 일종의 깨달음 같은 것이 스치고 지나갔다. "우리는 모두 타인이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죽는다."
그 당연하고 분명한 문장이 더 당연하고 분명하게 느껴지는 순간을 경험해본 적이 나는 그 후로도 없었던 것 같다. 모든 것이 너무나 명백하고 깨끗해서 그 문장이후에 어떤 말을 붙일 필요도 없이 느껴졌고 완벽한 진실 앞에서 더이상 반항할 일이 없는 순종의 미를 역시 그 어느순간에도 느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훗날 나는 내가 느낀 그 상태를 일컫는 단어를 배우게 되었다. "메멘토 모리". 그 여자가 특별했던 것도 그 날 무슨 일이 있었던 것도 내가 그때 어떤 것에 심취해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냥 그 생각이 시작이었고 끝이었다.
두번째는 역시 고교시절 학업과 민감한 성격탓에 오는 교우관계에 대한 스트레스가 꽤 있었던 때로 기억한다. 많이 외롭고 혼자라는 고립감이 나를 꽤 오래 짓눌렀던 때이기도 했다. (물론 그 후로도 지속되지만) 그 나이때 으레 그러하듯 비련의 사건이나 그 사건의 주인공이 되는 것을 상상할 때가 있었는데 그때 만약 내가 죽음을 맞는다면 어떻게 될까 마지막 순간을 상상해보았다. 그때 문득 내가 만약 다쳐서 피를 흘리고 있다면 마지막 순간까지도 내 몸은 어떻게든 나를 살리려 애를 쓰고 있을텐데, 라는 생각이 들었다.
멈추지 않는 피를 멎게 하려고, 느려지는 심장은 최선을 다해 전투를 치르는 용감한 군인처럼 나를 기어이 붙들고 나아갈 것이고, 낮아지는 체온을 유지하려 온 몸이 떨리며 내가 놓아버린 세상과 나를 어떻게든 연결시켜 두려 말 그대로 내 온 몸의 세포와 장기들이 할 수 있는 모든 에너지를 다 내게 불어넣을 것이다.
그 생각을 하는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나는... 혼자가 아니었구나.
유치하지만 정말 그때 든 생각은 그것이었다.
점점 더 어른이 되어가면서 유흥으로 밤새 몸 속에 술을 부어 넣고, 온갖 이물질이 들어간 벌주를 마시고 밤을 새고 일터에 나가는 직장이 되면서부터는 인스턴트 음식으로 식사를 떼우고 머리를 명철하게 유지하기 위해 빈 속에 벤티 사이즈 커피를 세개씩 때려넣었다. 너무 화가나는 날에는 내 허벅지를 내가 주먹으로 쳐서 시퍼렇게 멍이 들게 했고, 높은 구두를 신고 뛰어다니고, 잠은 죽어서 자는 것이라며 마음으로 내 뺨을 쳐서 지독하게 모자란 잠에서 깨어났다. 어두운 불빛아래 욕망에 눈이 멀어 일감을 들여다볼 때 내 야욕에 부응해주기 위해 눈 주변 근육이 필사적으로 꿈틀대는 것이 느껴졌다.
학창시절 그토록 듣기 싫었던 그 말을 나는 얼마나 긴 시간동안 내 몸에 하고 있었던 것일까.
-할 수 있지...?
작년 겨울에 동네에서 하프를 처음으로 뛰어보았다. 정확히는 20km.
처음에는 진정한 의미의 하프를 뛰어보겠노라 생각했지만 결코 단 100미터도 더 갈 수 없었다. 굳이 먹지 않아도 될 것 같다며 챙긴 에너지 젤을 남은 것이 없나 다시 짜먹으며 버틴 거리였다. 다리가 부서질 것 같았다. 그 외에는 묘사할 말이 없다. 마지막 3km 정도는 그냥 너무 괴로웠다.
그리고 4개월만에 다시 하프를 뛰었다. 정확히는 21.1km.
지난 해의 그 고통만큼은 아니었다. 기록도 월등히 좋았다. 페이스가 시간당 16초 줄었고 거리는 늘었고 통증은 덜했다. 그런데 하프를 뛴 다음날 갑자기 발가락이 욱신거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마치 누가 양말속에 작은 가시들을 숨겨둔 것같은 통증 이었다. 발가락의 작은 뼈들이 마디마디에서 무시하기엔 크고 안고 가자니 너무 거슬리는 통증들을 제각기 연주하는 느낌이었다. 겉으로 드러나는 외상이나 멍등은 크게 보이지 않았다. 이미 너무 많은 발톱들은 조깅 발톱이 되어 예전의 납작하던 두께를 잃은지 오래되어 내 발가락의 모든 생김새는 투박한 노동자의 손처럼 변해있어서 잘 알아볼 수 없었던 것인지는 모르겠다. 3일이 지나도 욱신거리는 통증은 줄어들긴 했어도 사라지지는 않았다. 이제 모든 통증은 점점 사라져 엄지쪽으로 집합한 것 같았다.
엄지발가락을 며칠에 걸쳐 찬찬히 들여다 보았다. 살면서 엄지를 이렇게 오래 의식하고 바라본 건 이번이 처음일 것이다. 몸무게의 60%를 지지한다는 이 작은 존재. 자세히 보니 발톱 아래에서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았다. 하프를 뛸 때 6km정도부터 왼쪽 다리가 저리는 느낌이 있었고 10km쯤 갔을 때인지부터는 발톱이 빠졌나 하는 생각이 드는 느낌이 있긴 했었지만 으레 나는 왼쪽다리부터 저린 편이라 그러려니 하고 뛰었던 것이 문제였던가. (물론 시간을 돌린다고 해도 멈추지는 않았을 것이다.) 왼쪽 발톱은 뒤틀린 지형처럼 모양이 변해 있었고 발톱 아래 부분은 그 속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짐작할만큼 통증을 고스란히 내뿜고 있었다.
유난히 좋은 날씨, 환상적이었던 코스, 시원한 바람과 튼튼한 몸으로 또 무언가를 도전하고 있다는 내 마음에 취해 두시간 동안 신발 안에서 이리저리 부딪히고 눌리고 압박당하고 또 움직임을 소화해냈던 엄지 발가락의 말 그대로 깊은 상처가 고스란히 남겨져 있었다. 예전같았으면 달리기 하는 데 장애가 생겼음을 투덜대거나 통증때문에 일할 때 불편함에 신경을 썼겠지만 나는 아주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의 손을 잡듯이 조심스레 발가락 주변을 눌러도 보고 구부려도 보고 발톱을 조심스레 정리도 해보았다. 하루에도 몇번씩, 그리고 아침이 될 때마다 얼만큼 나아졌는지 혹시 더 안좋아진 것은 아닌지 매일 날씨를 체크하듯 발가락에게 인사를 건내듯 살며시 잡아보았다. 누가보면 웃겠지만 진심을 다해 고맙다고 인사도 했다. 미안하다고도 했다. 대견하다고도 말해주었다.
달리기는 세상과 기온과 자연 속에 내 온몸을 노출시켜 오로지 나의 탄성과 근력과 호흡만으로 헤엄치는 지상의 수영이자 비행이다. 겨울 바람을 뚫고 날아가는 새들도 분명히 같은 느낌일 것이라고, 대양의 흐름을 거슬러 헤엄치는 혹등고래의 유영도 비슷한 느낌일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가다가 멈출 곳이 없으면 계속 가야 한다. 옷을 잘못 입고 나온 날에 비바람을 쫄딱 맞으며 뛴 적이 있는데 그 때의 생각은 오로지 하나였다. 멈추면 너무 추워질 것이란 것. 그때는 더이상 즐겁기만 한 달리기가 되지 못한다. 아무 생각 없이 뛰다가 내 앞을 아슬아슬하게 날아가는 새를 만나면 문득 정신이 들면서 반가운 친구라도 만난 듯 기분이 좋아진다. 비온 후 맑은 하늘을 말 그대로 노닐 듯 날아가는 새들의 명랑한 날개짓을 본 적이 있는가. 혼자 뛰는 런도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말을 문장 그대로 느낄 수 있다. 꽉 찬 사람들 사이에 있어도 느꼈던 공허함이란 온전히 사라져버린 그런 기분 말이다. 새, 나비, 생명이 잉태되는 나무들의 꿈틀거림, 어디서 왔는지 모를 수많은 꽃들, 바닥을 열심히 기어가는 곤충들, 바람, 구름, 공기. 그리고 신발 속의 내 발가락도 늘 나와 함께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