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치 농사를 짓는 사람처럼 온도와 습도를 잰다.
세상에는 많은 자기개발서들이 있다. 유명한 자기개발서는 거의 그리고 현재에 떠도는 자기개발서중에 절반정도는 섭렵했다고 생각하는 나로써는 그 책들이 가진 공통적인 메세지들이 어느 정도 읽히는 셈이다. 눈을 뜨자마자 좋은 생각을 한다. 온갖 자극적인 글들로 도배된 신문기사나 커뮤니티의 글을 휘리릭 넘기며 침대에 누워 있을 때보다는 확실히 지루해서라도 금방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게 된다. 물론 아직도 좋은 생각을 할 때와 죽을때까지 몰라도 상관없을 이야기들을 읽어대는 날들이 반반이긴 하지만.
최근에 짧은 기도문처럼 내가 반복하는 아침 생각이 있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나는 일어났고, 내게는 마실 물과 음식과 입을 옷이 있고, 바람이 불고 건강한 몸을 가지고 있다.
삶은 참 감사한 일이다' 같은 문장들인데 간간히 날마다 대상이 조금씩 바뀌기도 하고 주로 아침나절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를 배경으로 읊고 있다보면 '새소리가 들리고' 같은 문장이 추가될 때도 많다. 사실 저 문장은 내가 즐겨가는 중국집 메뉴판 앞에 적혀 있는 문장이다. 주문하기 위해 펼친 메뉴판에서 저 글을 읽었을 때 별로 유기성이 없어보이는 문장들의 나열이 이상하게 퍽이나 마음에 들었다. 그 후 나는 출처와 상관없이 내 삶의 기도문 중 하나로 삼아도 충분할 따뜻한 문장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달리기를 시작하고 느낀 점 중 하나는 내가 몸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법을 배우고 있다는 사실이다.
농사를 짓는 사람도 아닌데 어느순간부터 눈을 뜨자마자 나는 하루의 기온과 습도 그리고 바람의 여부를 체크하는 것이 당연하고 중요한 일과가 되었다. 하루의 날씨를 그저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며 인지하지 못하고 살아왔던 시간이 꽤 길었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왜냐면 주변인들과 날씨에 대한 이야기를 간혹 나눌 때 대부분은 날씨에 조금의 관심도 없다는 것을 알고 당황했기 때문이다. 나 역시 달리기가 아니었다면 같은 상황이었을 것이다.
발전한 기술이 알려주는 예고된 날씨에 어느정도 나의 하루치 옷차림과 컨디션과 달리기 계획을 가지고 집을 나선다. 아파트 출입구의 자동문이 미지의 세계로 나를 보내는 주술처럼 후욱 소리를 내며 열리면 나는 호흡을 들이마시며 조심스럽게 세상속으로 발들 내딛는다. 하늘을 올려다보고 손을 뻗어 바람을 체크해본다. 온몸으로 기온을 받아들이며 느껴본다. 생각보다 덜 춥고 더 따뜻한 날에는 살짝 놀라기도 한다. 예상하지 못한 큰 기쁨이 되기도 한다. 날씨 하나로.
계절이 바뀌는 순간에 공기속을 훑으며 스며들듯이 달리다보면 어제의 꽃잎과 오늘의 꽃잎이 다르다는 것을 확연히 느낄 수 있다. 농사짓는 부모님이 내 눈에는 모두 같아보이는 그 숱한 풀들의 이름을 구분해서 부를 수 있는 이유를 알 것 같다. 아무리 굳은 의지를 가지고 살아내어도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일들이 얼마나 작고 보잘 것 없는 것들인지는 자연속에 있어보면 느낄 수 있다. 부는 바람과 좋은 햇볕은 정말 그저 공짜로 주어진 행운 중의 행운이다.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는 자연의 순환속에서 나는 그 자연속에 조심스레 발을 딛고 살아가는 풀과 곤충과 새들과 나무들과 똑같은 정도만큼의 작디작은 존재임을 느낄 수 있다. 모두가 같은 에너지와 존재감으로 평등하게 세상속에 녹아있다. 모자이크로 이루어진 거대한 그림같이 너는 저기에 있고 나는 여기에 있다. 어제 스쳤던 나무의 이파리가 오늘도 있고, 작년에 헤어졌을 법한 박새들의 재등장이 그저 반갑기만 하다. 겨우내 나와 함께 했던 오리떼는 지금쯤 어디에 있을까 생각하며 문득 안부를 궁금해하기도 한다.
하지만 결국 아무것도 알 수 없다. 죽음과 새 생명의 탄생의 여부를, 존재의 항상성의 여부를, 이 새가 그 새였는지 이 이파리가 어제의 그 이파리인지, 내일의 나도 달리고 있을 것인지, 이번주 목요일에는 비가 온다고 했는데 정말 올 것인지, 올해는 이러이러한 목표를 달성하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될 것인지, 저녁으로 싸가는 도시락은 과연 오늘은 뿌듯하게 비어져서 올 것인지, 이 평온한 감정이 내일도 유지될 것인지, 내가 이번달에는 아니 다음달에는 엄마에게 전화를 하게 될 것인지.
모호함에 맞서는 삶의 태도에는 확언과 신념이 있을 것이지만, 모름을 모름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반드시 체념은 아니라는 것도 지식이 아닌 느낌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면이 생겼다. 거창하게 말하자면 순리라고 할까.
온 몸으로 자연속에 존재해보면 진정한 의미에서 내가 삶과 우주의 한 일부라는 것을 느끼게 되는데, 내가 숱하게 했던 다른 생각중의 하나는 "핑계대지 않는다"라는 것이었다.
자연에 녹아있는 존재가 되면 핑계라는 것은 댈 수가 없다.
4월에 돌풍과 우박을 동반한 눈이 쏟아지는 날이 있었다. 봄이 왔다고 생각하고 얇은 바람막이 하나만 걸치고 달리기를 하러 나섰는데 비가 오는 줄은 알고 있었으나 직접 맞아보니 눈이었고 너무나 세게 바람이 불어서 처음으로 자연앞에서 후퇴할까 생각이 든 날이었다. 자전거를 타던 사람들이 라이딩을 접고 당황해하며 돌아가고 있었고 길거리에는 아무도 없는 오전이었다. 단 한번도 달리기를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간 적이 없었기에 그냥 가보자고 생각했다. 달리다보면 추위를 잊으리라 기대했지만 추위는 가시지 않았다. 이런 날씨에 무슨 선글라스냐고 할테지만 눈이 올 때 달려본 이는 알 것이다. 비보다 눈이 눈에 들어가면 더 힘들다는 것을. 눈과 비를 꽤 맞으며 달려봤다고 생각했는데 그리고 몰아치는 눈을 맞으면 말그대로 정말 눈알이 아프기도 하는데 이번에는 추위까지 보태어져 꽤 극한의 상황이었다. 멈추면 과장보태서 얼어죽을 것 같아서 계속 뛰었다.
죽은 새를 보는 것이 이번으로 세번째였다. 한번은 집 앞에서 고스란히 잠든 형태로 떨어져 있는 작은 박새를 발견한 날이고, 또 한번은 한겨울 쌓인 눈더미 위에 죽은 새를 보았고 오늘 그 상황에서 본 새는 나처럼 비장하게 날다 얼어죽은 것처럼 격렬해보였다. 나는 후퇴할 집이라도 있지만 야생의 생명들은 그들의 전투력을 다하는 수밖에 없고 적어도 달리는 중의 나도 그런 야생의 동물 중 하나였다.
녹일 듯이 이글대는 햇볕 아래에서, 눈이 아프고 따가운 상태에서, 바람이 얼굴을 찢어버릴 듯 몰아칠 때나, 갑자기 돌변하는 기온 속에서, 비가 후두둑 떨어지는 날에 나무 아래에서, 무겁게 낙하하는 눈 속에서, 어떤 상황에서도 핑계라는 것을 댈 수 없다. 그저 그 속에 존재해야 하고 나는 내 몸이 그것을 어떻게 받아내고 있는지 불편한 곳은 없는지 버텨낼 수 있는지 계속 나아갈 수 있는지 묻고 느끼고 보호하고 흐름을 읽고 다독이고 또 믿고 가야만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나아가다보면 때로 자연은 내게 말로 다할 수 없는 보상을 주는데 그것은 앞에는 해가 떠있고 뒤로는 달이 떠있는 풍경일 때도 있고, 도저히 묘사할 수 없는 색채로 물든 하늘일 때도 있고, 어디선가 장엄하게 날아오르는 새떼들이 머리 위 그림자를 드리우며 날아가는 풍광일 때도 있고, 꽤 긴거리를 따라오는 듯이 느껴지는 나비일 때도 있고, 용캐 손으로 낚아챌 수 있었던 떨어지는 벛꽃잎일 때도 있고, 포르르 자리를 뜨는 새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일 때도 있었고, 믿을 수 없어서 선글라스를 벗어서 확인할만큼 아름다운 들꽃들의 색의 향연일 때도 있었다. 나 역시 이 자연의 일부가 되어 그들의 호의와 암묵적인 용인속에 받아들여진 존재가 되는 기분이 들 때면 이상하게 이 사회에서 나라는 존재는 결국 NPC가 아닐까 생각했던 서글픈 마음은 깨끗하게 사라지고 그저 이 상태로 충분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인류의 가장 오래된 고서인 길가메시에서는 삶과 행복에 대한 정의를 꽤 단순하게 내렸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것이 삶의 비밀이구나 생각했으나 쉽게 받아들이고 녹여내지 못했다. 오로지 달리기를 통해 느끼고 배운 이 감정들은 또 삶의 치열함 속에서 쉽게 사라질 수도 있겠지만, 반복을 통해 내 몸과 마음에 주입을 시킨다.
'나는 일어났고, 달릴 수 있는 튼튼한 다리를 갖고 있고, 그런 기회가 있음에 감사합니다.
삶은, 참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