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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성태 Jan 19. 2016

4. 강남,강남,강남

백만배 땅값오른 강남의 50년 도시개발 스토리

한국드라마를 열심히 보던 외국 친구가 대뜸 내게 '오빠'가 뭐냐고 물었다. 나는 유교사상에 입각한 장구한 역사와 뼈대있는 한국 사회의 구조적 컨텍스트를 설명해주고 드라마 속 ‘이제… 오빠라고 불러도 돼요?’와 같은 복잡미묘한 썸타는 감정적 디테일까지 어렵게 설명하며 앞으로 마음에 드는 남자가 생기면 ‘OBBA’, 별로면 ‘AJUSSI’라고 불러야 한다고 손바닥에 큼지막하게 하나씩 적어줬다. 오빠라는 단어는 뭇 남성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묘한 매력이 있다.

그런데 이에 못지않게 ‘강남’이라는 단어도 한국 사람들에게 마음을 설레게 하는 묘한 힘이 있는듯 하다.




Gangnam Style

필자가 뉴욕에 있을때, 마침 월드스타 싸이의 '강남스타일'은 절정의 인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길거리에서는흑형들이 ‘헤이 경남 스따일’ 하면서 강남인지 경남인지 구분안되는 발음으로 노래를 흥얼거리며 돌아다녔고 많은 외국 친구들이 내게 와서 '강남'의 뜻이 무엇인지를 물어봤다. 나는 좀 논다 싶은 친구들한테는 한국서 잘나가는 나이트가 많은곳이라고 둘러대기도 하고, 여자들에게는 한류와 패션을 리드하는 가장 트렌디한 곳이라고 했고, 금융권 친구들에게는 한국에서 가장 돈이 많이 몰리는 곳이라고 했다.


싸이는 대한민국의 국위선양 면에서 금메달 5개와 3대에 걸친 병역특례를 줘도 아깝지 않을만큼 강남을 전세계에 확실히 알렸다. 뉴욕에서도 강남스타일의 인기는 실로 폭발적이었다.


강남은 땅값으로 8만배~수십만배의 잭팟이 터진 근대사의 보기드문 로또 욕망의 다른 이름이자 서울 시민의 꿈과 로망을 대변한다. 이제 강남은 그 자체가 하나의 브랜드요, 신분의 표상이자 모든이의 선망의 대상이기도 하다. 강남구청에서 차량등록을 하고 받는 강남번호판 '55'가 있어야 강남서 주차할때 무시받지 않는다고 하던 시절도 있었고 여전히 '5'로 시작하는 전화번호와 명함에 찍힌 강남구 주소는 사업하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신뢰의 인상을 더해준다고 믿는다. 좋은 집, 좋은 차, 좋은 식당, 하여튼 좋다는 건 죄다 모여 있는 이곳은 누구라도 '강남오빠', '강남사모님' 소리 듣고 싶은 한국의 자본과 사람이 몰리는 '맨하탄'이다. 통상적으로 강남이라고하면 인구 60만의 강남구, 44만의 서초구, 66만의 송파구를 묶어서 강남3구 170만명이 사는 지역을지칭하는 듯 하다. 맨하탄의 160만보다 조금 더 많은 정도?. 강남은 예전에는 영등포의 동쪽이라 영동이라고 불렸고 지금의 영동전화국, 영동고등학교와 같은 지명에서 그 흔적을 찾아볼수 있다.



나가 강남개발의 아버지여...

강남 개발 역사를 살펴보려면 일제시대 박흥식의 이야기부터 시작해야 할다. 우리가 20세기 후반의 기업가로 삼성그룹 이병철을 뽑는다면 20세기 초반의 기업가는 박흥식이었다. 그는 1950년까지 당대 최고의 거부로 우리 부모님 세대들은 다 익히 들어봤음직한 종로네거리 화신 백화점의 창업자다. 격변의 시기에 큰 사업을 하다 보니 일제시대후에는 친일파라고 붙잡혀 가고 5-16 직후에는 부정축재자로 끌려가는 등 많은 부침을 겪은 기업인이기도 하다. 그는 1961년 박정희 군사정권에 의해 구속되고나서 석방의 대가로 '장차 예상되는 서울 인구증가에 대비해 민간기업으로서 주택건설계획을 세우라'는 과제를 부여받게 된다. 왜냐하면 그는 일제시대때 이미 지금의 불광동(수색)에 신도시를 만들고 종로 네거리 자신의 백화점까지 지하철로 연결하는 꿈같은 계획을 세웠던 이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남서울 계획'이라는 매머드급 스펙타큘러스한 도시계획 청사진을 만들어 지금의 삼성동-역삼동-서초동-반포동-방배동-과천에 걸친 2400만평 개발계획을 세운다. 하지만 이후 영동 개발사업은 민간이 아닌 서울시 주도로 바뀌게 고 결국 '남서울 계획'은 백지화 되고 만다.  서울은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1차 사업이 마무리되보릿고개를 극복하고서야 당장먹고 살 걱정에서 조금 더 나아가 도시기본계획들여다보게된다.


강남의 쌩얼은 경기도 광주와 성동구

원래 강남은 경기도 광주의 끄트막에 자리잡은 농촌이었고, 이 마을 사람들은 63년에 행정구역이 서울 성동구로 편입되고나서야 비로소 서울시티즌으로 할수 있었다. 강남구라는 행정구역이 신설된 75년까지 이곳은 성동구에서도 출장소에서 관장하던 그냥 강건너 이름없는 동네였다. 이런 경기도 깡촌이 본격적으로 '도시화'의 물결을 타게 결정적인 계기는 앞서 얘기한 제3한강교 (한남대교)였다. 당시 홍수가 나면 한강물이 상습적으로 범람하던 그야말로 오지에 불과 했던 그곳이 지금은 평당 1억을 넘어가는 신사동, 압구정동이 되었다. 시내(강북) 한번 나갈라치면 나룻터에서 나룻배를 타고 가야했던 불편함이 더해져 당시 땅값은 고작해야 평당 200~300원에 불과 했다. 하지만 강북에서 내려오는 다리가 생긴다는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땅값은 2000~3000원으로 올라 버린다. 하지만 당시 중구 신당동 땅값이 4만원 정도였던걸 생각하면 아무리 10배가 뛰었다 한들 여전히 매우 낮은 수준에 불과니 당시의 강남이 얼만큼 깡촌이었는지 가늠할수 있다. (당시 쌀한가마 가격으로 짐작해보면 오늘날 신당동 땅값은 평당 180만원, 신사동은 12만원 수준)


1960년대 말 강남구 신사동 일대의 전경.


오늘의 신사동 일대. 당시 평당 2000원짜리 땅들이 지금은 1~2억원을 호가한다.



경부고속도로가 생기며 비로소 호적에 이름 올리게 된 강남

한남대교가 도심의 자본과 사람을 강남으로 흐르게 하는 불씨를 피우기는 했지만 본격적인 불쇼는 경부고속도로가 발표되면서 비로소 시작된다. 아니, 강남 로켓의 본격적인 카운트다운이 시작되었다고 하겠다. 박흥식의 '남서울계획'이 불발에 그치자 서울시도 강남에 뭔가 하긴 해야 겠는데, 당췌 텍사스 소떼가 출몰할만큼 광활한 여의도 80만평의 10배 크기인 허허벌판을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그야말로 막막한 상황이었다. 서울시는 그냥 '우리가 언젠가는 여기에 뭔가 할거 같긴하니 일단 찜은 해놓겠소'라고 말뚝만 하나 박아놓는다. 그런데, 1967년 박통께서 사고를? 치신다. 서독을 다녀와서 그들의 쭉쭉뻗은 아우토반에 삘이 제대로 꽂힌 나머지 우리도 '경부고속도로'를 짓겠다고 질러버리신 것이다. 무려 430km 에 이르는 고속도로는 노선도 정해지지 않은 상황에서 교량 300개와 터널 12개에 대한 설계와 시공, 용지보상과 같은 것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진행 돼야 했고 서울시는 당장 발등에 불이 떨어져 밍기적 거리던 강남을 먼저 챙겨봐야 했다. 경부고속도로가 시작되는 한남대교에서 만남의 광장 톨게이트까지 가는 서울시 안에 있는 땅 확보해야 했다.


돈이 없는 서울시는 무상으로 땅을 확보해야 했고 '구획정리사업'이란 것을 진행한다. 즉, 나라에서 땅주인으로 부터 땅을 받아 불도저로 다 밀어버린 다음에 필요한 도로, 공원, 공공용지등을 쭉쭉 그려놓은 다음 나머지 땅을 되돌려주는 것이다. 예를 들면, 100평을 맡긴 사람은 구획정리사업이 진행된 이후에는 60평을 돌려받게 되는데 이렇게 줄어드는 면적을 '감보'라고 한다. 그런데 일반도로 외에 추가로 9만평이 넘는 고속도로 부지를 집어넣으면 감보율이 너무 커져 버리기 때문에 그 부담을 n분의 1로 나누려면 개발부지가 커져야 했다. 결국 이렇게 늘려잡은 땅의 크기는 무려 500만평에 달하게 됐고 강남의 통큰 개발 사이즈는 경부고속도로 덕에 이렇게 얼떨결에 결정 되어버렸다. 이 도시계획의 이름은 영동1구이었고,  그 안에는 서초구와  압구정-신사-논현-역삼-염곡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강남 심시티의 서막

그 후 박통은 눈썹 휘날리는 속도로 경부고속도로를 단 2년 반만 뚝딱 완성시켜 전세계를 경악시킨다. 이는 현대건설의 정주영과 군부정권의 거침없는 추진력의 합작품이었다. 여기에 고속도로의 용지 평균보상가격 236원/평은 오늘날의 만원 밖에 안되었으니 (쌀값으로비교시) 애국심으로 똘똘 뭉친 국민들이 고속도로 용지를 거의 거져 갖다 바치다시피 했고 연인원 900만명이 매달려 밤낮으로 일했으며 이 과정중에 77명이나 되는 사람의 생명이 희생되었다. 그 덕에, 전국은 1일 생활권에 들어오게 됐고 산업화의 두 거점이었던 울산 중공업단지와 수출입의 관문인 부산까지도 연결이 수월해져 한국 경제는 그야말로 지붕뚫고 하이킥을 날릴수 있는 날개를 달게 되었다. 이후 대한민국의 부동산 개발의 미친 폭주경부고속도로를 따라 남하하게 된다.


정부는 더 많은 서울의 기능을 강남으로 옮기기 위해 그 이듬해에, 지금의 삼성동 코엑스가 있는 땅에 정부 종합청사를 이전할 계획을 세우고 삼성동-청담동-압구정동-학동-대치동이 포함된 영동2지구 360만평을 추가로 발표한다. 이렇게 영동 1,2구역으로 편입되어 심시티의 무대가 된 강남의 크기는 무려 830만평에 달했고 이때 어둠의 형님들이 등장하여 강남개발에 숟가락을 얹고 여기저기 빨대를 꽂기도 했다. 말죽거리로 불리던 강남대로의 양재역을 중심으로 잔혹한? 투기도 횡행했고 복부인들도 서서히 등장했다. 이렇듯 돈과 힘이 몰리면서 강남의 땅값은 무섭게 치솟는다. 1963년부터 1979년까지 16년간은 경제성장률이 매년 10%씩 나오던 시기였으니 기본적으로 중구 신당동 땅값도 매년 평균 19%씩은 상승했다. 하지만 강남의 신사동 땅값의 상승율은 무려 54%에 달하게 된다. (앞서 얘기했듯이 워렌버핏의 연간 수익률은 22%수준)

 

중구 신당동과 강남구 신사동의 16년간의 땅값추이 (토지개발. 1980.6월호)


하지만 아무리 경제발전이 급속히 일어났다고 하더라도 200원짜리 땅이 몇십년만에 뻥좀 보태 100만배가 됐다는건 경이롭다 못해..선뜻 해가 잘 되지 않는. 도대체 무엇이 이러한 강남의 독주를 가능케 한 것일까?



오늘날의 강남대로, 양재까지 이어지는 말죽거리의 이면에는 많은 부동산 투기가 횡행했었다고 알려진다. 많은 이해관계가 얽혀있는 부동산의 복잡한 세계


강남의 대박비결

1. 강북억제정책

앞서 얘기한 것처럼 북한의 위협으로부터 강북은 안전하질 않았고, 사람들은 언제든 강남으로 튀어 도망갈수 있도록 준비를 해야 했다. 정부에서는 인위적으로 도심 기능을 강남으로 분산시키기 위해 강북에는 백화점, 시장, 대학등 사람 머리수 늘어나는 일체의 새로운 시설들에 대한 허가를 내주지 않았다. 심지어 강북의 논밭은 택지(건물지을수 있는 땅)로 전환도 못하게 했고, 일부 건물들은 신축/증축/개축도 다 막아버렸다. 그들은 눈물을 머금고 강북을 떠나 강남으로 옮겨갈수 밖에 없었다.


2. 강남 인센티브

이에 반해 강남지역은 개발촉진지구로 지정이 돼 처음에는 각종 세금이 면제되었다. 그리고 제3한강교, 경부고속도로, 지하철 2호선, 고속버스터미널, 법원-검찰청, 지하철 3호선등의 개발 호재들이 무더기로 쏟아졌다. 또한 어려웠던 지난 시절, 제대로 배우지 못해 한이 사무친 부모들이 강북의 명문학교들이 새롭게 이전한 강남 8학군에 얼마나 큰 욕심을 냈을까 어렴풋이 짐작이 간다.


3.  개발에 유리한 토지

강남(영동1,2지구)은 조성규모가 900만평이 넘어서 여의도 80만평하고는 애당초 쨉이 되질 않았다. 그만큼 원하는 그림은 다 그려 넣을수 있는 충분한 크기의 캔버스였고, 폭발적인 서울의 성장을 담아낼수 있는 충분한 크기가 나왔다. 각 필지들은 충분히 넓은 도로와 면해 있었고 네모반듯하게 잘 정리되어 있을뿐 아니라 강북과 달리 기존 건물이 새로운 개발을 방해하는 일도 없었다. 1980년 초까지만 해도 테헤란로변 땅들은 덩그러니 빈땅으로 놀고 있었으니 그후 20년간 강남에서는 필요한 만큼의 땅이 계속해서 공급될수 있었다.


4. 초기 낮은 지가와 짧은 경제성장 역사

앞에서 본것처럼 신당동의 땅값이 4만원할때 신사동의 땅값은 200원에 불과했다. 이는 강남이 단지 강 건너 깡촌이었기 때문만이 아니라 한강과도 연관이 있다. 즉, 한강은 전세계에서도 하상계수가 매우 높은 지역의 하나인데 여름철 장마에 집중되는 빗물탓에 강물이 범람하여 못쓰는 땅이 많았던 것이다. 그런데 한강변이 정비되고 한강 상류의 댐들이 건설되면서 연중 한강의 수위가 안정을 찾으면서 범람지역의 저평가 되어 있던 땅들의 가치는 수직으로 올라갔다. 게다가 1974년 1인당 GNP가 540달러에서 77년에 1천달러, 78년 1,392달러로 해마다 두자리 이상씩 성장하는 한국 경제는 너무나 빠른 속도로 성장했고 그만큼 부동산 가격도 빨리 올랐기 때문에 강남의 미친 투자수익이 나오게된 계기가 되었다.




거주하는 공간=집=부동산=돈

한 국가내 민간자본이 우리나라처럼 부동산에 올인되어 있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각 가정마다 자산의 70% 이상이 집 또는 건물, 땅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다른 선진국의 30~40%에 비하면 두배정도 높은 수준이다. 그동안 부동산으로 돈 번 이야기는 지천에 널려 있었고 그 대열에 동참해서 재산세 고지서라도 받아보는 영광을 누리려면 전재산을 다 털어넣고 무리를 하지 않으면 안됐다. 개인들은 이를 위해 전세를 통한 사금융(세입자에게서 돈을 빌림) 방식의 투자, 거치식 대출구조(팔거나 리파이낸싱을 목표로 이자만 갚음)를 통해 집이라고 하는 필수재화를 투자상품화 시키는데 성공한다. 극대화된 레버리지 전략을 구사하는 발빠른 개인들은 여러번 부동산의 손바뀜을 통해 (샀다 팔았다) 큰 부를 일궜고, 언론(광고수입), 건설사(분양), 정치(표), 금융(신규대출)의 이해관계자들은 열심히 박수치며 물심양면? 마음에서 끓어오르는 원을 아까지 않았다. 어느 누구도 집값이 떨어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세상이 바뀌면서 기름이 앵꼬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데도 악세레타만 밟대던 하우스 푸어의 문제가 점차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기 시작다. 앞으로도 집값은 오를거다, 아니다 폭락할거다.. 라며 말도 탈도 많아 누더기가 되어버린 집값에 관한 이야기는 다음편에서 조금 더 나눠보고자 한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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