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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집나물 Mar 06. 2023

나이가 들수록 다르게 보이는 작품

 초등학교 방학식 당일은 분주했다. 교실엔 방학을 맞아 흥분한 초등학생 30여 명과 그들을 다스리는 담임 선생님이 있었다. 선생님들은 꼭 연두색이나 분홍색 A4 색지에 방학 숙제를 프린트해서 나눠줬다. 방학 숙제는 매년 비슷했다. 일주일에 일기 세 편 이상 쓰기, 박물관/미술관에 다녀온 뒤 체험 학습 보고서 작성하기, 과학 탐구 보고서 등이 있었다. 초등학교 3학년 즈음 여름방학 숙제로 독서 신문 만들기도 있었다. 그 해에 나는 '어린 왕자'를 좋아했다.


 어린 왕자는 그림이 많고 글자는 적었다. 어리석은 어른들이 등장했고, 의미심장하게 말하는 동물들이 나왔다. 삐죽삐죽한 노란 머리에 연두색 옷을 입은 남자아이가 하는 말들이 좋아서 여러 번 읽었다. 게다가 청소년 권장도서 목록에 매년 오르는 책이었다. 어른들은 권장도서 목록에 선정된 책을 읽는 아이들을 좋아한다는 걸 아는 나이였다.


 독서 신문을 만들기 위해 푸른색 A3 용지를 문방구에서 구입했다. 신문처럼 펼쳐볼 수 있게 반으로 접었다. 주제목을 써야 했는데 '★어린 왕자★'라고 적으면 너무 대충지은 것 같아 고민하다 결국 네이버에 검색했다. '어린 왕자 독후감'. 어른들의 쓴 독후감 몇 편이 나왔다. 서너 편 읽어보니 공통된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나이가 들수록 읽어야 하는 책이란다. 읽으면 읽을수록 다르게 느껴진단다. 어른이 되어 읽는 기분은 모르지만 제목으로 쓰기에 그럴듯했다. 검은색 색연필로 적었다. '나이가 들수록 다르게 읽히는 책, 어린 왕자!'


 줄거리를 간략히 소개하고 그 옆에 책 표지를 직접 그려 넣었다. A3는 글로만 채우기엔 너무 큰 용지였다. 어떻게든 비어보이는 곳들을 채워 넣어야 했다. 당시 푹 빠져 읽었던 '괭이부리말 아이들', '나는 선생님이 좋아요' 같은 책 표지를 그려 넣었다. 학교에서 나눠준 권장도서 순위도 한편에 적었다. 아무리 채워도 A3종이를 빼곡히 채우기엔 역부족이었다. 머리를 쥐어짜 퀴즈도 냈다. '어린 왕자를 기다리던 동물은 무엇일까요? 1. 사자 2. 고슴도치 3. 여우 4. 강아지 (정답은 뒤에 있습니다!)' 시시한 퀴즈였다. 어쨌거나 독서신문을 만드는 일은 일기 쓰기보다 재미있었다. 개학날이 되자 같은 반 친구들은 방학 숙제를 선생님께 제출했다. 며칠 뒤 칭찬받을 만한 작품들이 교실 뒤편 게시판에 달렸다. 게시판 한가운데 내가 아닌 다른 아이의 독서신문이 걸렸다. 아쉬웠지만 열심히 만들었기에 혼자 뿌듯해했다.


 그 이후로 '나이가 들수록 다르게 읽히는 책'은 고등학생 때 공부하기 싫어서 책꽂이에서 잠깐 꺼내 훑어본 것을 마지막으로 다시 읽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도 두고두고 읽히는 작품이 고전이라던데. 책이든 영화든 수많은 작품들은 모조리 흘러갈 뿐 다시 찾게 되는 작품은 없었다. 고전이 없어도 괜찮은 시절이었다. 결혼을 하고 나서도 마찬가지였다. 책과 점점 멀어지고 영화나 드라마를 봐도 그때뿐이었다. 다시 찾아보는 작품은 없었다. 반면 남편은 영화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를 반복해서 보곤 했다. 스무 살 초반에 부모님과 그 영화를 봤었다. 2시간 45분이나 되는 상영시간 동안 주인공은 큰 위험에 빠지거나 심각한 갈등을 겪지 않아서 지루하다고 느꼈다. 부모님은 너무나 잘 봤다고 말했다. 졸음을 참아야 했던 나는 할 말이 없었다.


 남편은 중요한 일이 때마다 이 영화의 특정 장면을 찾아봤다. 화상면접을 보기 바로 직전, 남편은 카메라와 마이크 테스트를 마치고 유튜브로 영상을 틀었다. 곧 면접인데 무슨 영상을 보는지 궁금해서 다가갔다. 극 중 벤자민이 딸에게 쓴 편지를 읽는 장면이 나오고 있었다. 영화를 보고도 기억나지 않는 장면이었다. 아버지가 딸에게 해줄 법한 당연한 말들이 나오고 있었다. 남편은 잠언 구절 같은 말을 곱씹고 있었다.


For what it's worth, it's never too late, or in my case, too early.
가치가 있는 것을 시작하기에 너무 늦거나 이른 건 없단다.

To be whoever you wanna be. There's no time limit.
너가 되고 싶은 사람이 되기에 시간제한은 없단다.

Start whenever you want.
원하는 건 언제든 시작해

You can change or stay the same.
넌 변할 수도 있고 그대로일 수도 있겠지

There are no rules to this thing.
정해진 규칙은 없단다

We can make the best or the worst of it.
우리는 최선을 다하거나 멋대로 할 수도 있겠지

I hope you make the best of it.
너는 최선을 다하길 바란다.

I hope you see things that startle you 
놀라운 경험을 해보길 바란다

I hope you feel things you never felt before.
전에는 경험해보지 못한 것들을 경험하길 바란다

I hope you meet people with a different point of view.
너와는 다른 시각을 가진 사람들을 만나길 바라고

I hope you live a life you're proud of.
자랑스러운 삶을 살길 바란다

If you find that you're not, I hope you have the strength to start all over again.
만약 그렇지 못한다면, 용기를 내서 다시 시작하길 바란다


 남편은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같은 영상을 보았다. 다짐하는 그의 모습은 물 한 모금 마시는 것처럼 일상적이었다. 나는 여러 번 그 모습을 지나쳤고, 어느 날 걸음을 멈추고 그 영상을 보았다. 그날은 어쩐지 이상했다. 자막 한 줄 한 줄이 눈에 들어왔다. 가치 있는 것을 시작하기에 늦은 건 없다니. 되고 싶은 사람이 되기에 시간제한도 없다니. 원하는 건 언제든 시작해도 된다니. 그러고 보니 가치 있는 게 뭔지 고민한 게 언제였더라. 되고 싶은 사람은 어떤 모습이었더라.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원하는 것도 딱히 없고 지금 이대로도 괜찮다고 여겼다. 정해진 규칙 안에서 사는 건 안전했다. 놀라운 경험을 할 일이 없었으므로 평화로웠다. 용기가 필요 없는 나날이었다.


 나이가 드는 일은 당연한 것들을 까먹는 일인 걸까. 적어도 내게는 그랬다. 최선을 다하는 마음보단 걱정과 두려움이 더 커졌다. 다시 시작하기에 너무 늦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어른이 되면 타인의 작품을 도르래 삼아 다시 시작할 용기를 끄집어 올리나보다. 그래서 나이가 들수록 다르게 보이는 작품이라고 하나보다. 초등학생 시절 모르고 썼던 표현을 20년이 지난 후에야 이해하게 되었다.


 그날 이후로 남편을 따라 그 영상을 찾아본다. 용기가 필요할 때마다 브래드 피트를 따라 혀를 굴려본다.


 스탈트 올로버러겐.

 스탈트 올로버러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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