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의 음운 가르치는 선생님이 "탐구형 학습지" 좀 참고하게 보여 달라고 했다. 10년 전에 중학교 1학년들과 음운 체계를 탐구했던 학습지밖에 없어서 그거라도 보여 드렸다.
이 학습지는 우선 자음의 조음 위치를 스스로 알아내고, 각 조음 위치에서 서로 다른 방식으로 나는 소리들을 구분하는 순서로 되어 있다. 흔히 하는 대로 '그, 느, 드'처럼 하면 조음 위치가 닿았다가 떨어지므로 조음 위치가 닿는 짧은 순간을 파악하기가 어려워서 '윽, 은, 읃'처럼 종성을 통해 조음 위치를 파악하게 짰다. 종성의 자음은 닿은 위치에 조음 기관이 머물러 있기 때문에 파악하기가 쉽기 때문이다. 하지만 'ㅅ, ㅈ, ㅊ' 등은 'ㄷ'으로 변해 버려 초성에 배치하였다.
그 선생님이 전화로 물어 봤다.
"이걸 아이들이 직접 알아낸다고요?"
"네, 한 시간 내내 자기들끼리 '윽, 은, 읃!' 하면 다 알아냅니다."
"'ㄹ'은 제가 아무리 해 봐도 모르겠는데요."
"어떤 아이들은 윗니에 닿는다고 느끼고 어떤 아이들은 앞입천장에 닿는다고 느껴요."
"그럼 풀이는 어떻게 해 줘요?"
"'ㄹ'이 서로 다른 자리에 닿는다고 생각하는 아이들끼리 토론하면서 더 많은 친구들을 설득하는 쪽이 이기겠죠? 어떤 아이들은 '르' 할 때의 'ㄹ'과 '을' 할 때의 'ㄹ'이 다르다는 걸 발견하기도 하고요. 그래서 신나게 토론을 한 다음에, 결판이 안 나면 그냥 넘어 가요. 그리고 다음 장에서 조음 방법할 때, 파열음, 비음, 마찰음 같은 거 또 알아낸 다음에 마지막에 'ㄹ'의 자리를 잡기가 참 애매하지? 그래서 이런 걸 따로 '흐름소리'라고 한단다. 'ㄹ'은 소리가 흘러가니까 흐름소리이고 혀가 닿는 자리도 정확하게 딱 짚기가 어려워. 이렇게 이어지도록 하지요."
"그럼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리지 않아요? 이제 중간고사까지 2주밖에 안 남았는데 그런 거 말고 이 학습지의 그림이 참 마음에 드는데, 이걸 가지고 좀 짧고 간단하게 탐구식으로 수업하는 방법은 없어요? 그냥 아이들한테 'ㄹ'은 여기야. 직접 해 봐. 이렇게 하면 안 돼요?"
하길래 그런 응용은 알아서 쓰시라고 말씀 드리고 끊었다. 며칠 뒤에 또 전화가 왔다. 이번에는 모음 체계 학습지가 문제였다.
"ㅗ+ㅣ랑 ㅜ+ㅣ가 진짜 우리가 발음하는 'ㅚ', 'ㅟ' 맞아요?"
"ㅗ+ㅣ를 아무리 빨리 이어서 발음해도 'ㅚ'로 안 들리는 게 맞는데요? 'ㅗ+ㅏ'가 'ㅘ'로 들리는 거랑은 다르죠."
"근데 왜 굳이 저런 활동을 넣었어요? 저렇게 ㅗ+ㅣ, ㅜ+ㅣ 로 발음하면 단모음이 아니잖아요?"
"아, 그건 아이들이 'ㅚ', 'ㅟ'를 직접 발음해 보라고 하면 모두가 이중모음으로 발음을 하거든요? 그런 애들한테 무작정 'ㅚ, ㅟ는 단모음이야.'라고 알려줘도 이해도 못해요. 일단 저렇게 해서 이중모음의 기본적인 개념을 잡아주고, 'ㅗ+ㅣ'를 빠르게 발음해 보라고 하고, 우리가 아는 'ㅚ'랑 같냐고 물어 봐요. 문자로만 보면 'ㅗ+ㅏ'가 'ㅘ'가 되는 거랑 차이가 없는데, 'ㅗ+ㅣ'는 'ㅚ'가 안 되는 걸 일단 아이들이 알아차리게 합니다. 그리고 단모음의 개념으로 돌아가요. '단모음은 처음과 끝의 입모양이 변화가 없는 모음'이라는 걸 아이들은 말로 잘 외우거든요. 그럼 'ㅗ+ㅣ'나 편하게 발음하는 'ㅚ'가 입모양이 변화가 있는지 없는지 해 보게 합니다. 아무리 해도 입모양이 변한단 말이죠? 그런데, 단모음 체계표에는 'ㅚ'와 'ㅟ'가 들어있거든요? 이 모순을 아이들에게 느끼게 해 주는 게 가장 중요한 출발점입니다. 그럼 단모음의 정의를 바꾸거나, ㅚ, ㅟ를 표에서 빼거나, 아니면 'ㅚ, ㅟ'를 단모음으로 발음하는 정확한 방법을 지금 배우거나, 셋 중에 하나를 고를 수 있게 됩니다. 단모음의 정의나 단모음 체계표는 교과서에 나와 있는 것이니 틀릴 가능성이 적죠. 여기까지 이야기하면 '우리가 그동안 ㅚ, ㅟ를 잘못 발음해 왔구나'라고 스스로 깨닫고 제대로 된 단모음 ㅟ, ㅚ를 배우는 동기 부여가 저절로 됩니다."
"음, 선생님 의도는 알겠네요. 근데 중간고사까지 2주밖에 안 남아서 우리는 안 될 거 같네요. 적당히 수정해서 쓸게요. 고마워요."
나는 문법에 관한 교사 연수를 많이 다닌다. 연수가 끝나면 좋다는 분도 있지만 찜찜한 표정을 보이는 분들이 더 많다. 탐구 수업이 좋다하니 탐구 수업을 해 보고 싶은데, 나는 강의하면서 문법 단원에 1달을 투자한다고 하면, 이미 한 학기 진도 계획이 다 짜져 있는데 1달을 어디서 빼 올 수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묻는다.
"시간을 덜 들이고 효율적으로 아이들이 탐구할 수 있는 학습지는 없나요?"
"이번 단원이 문법인데 2주 정도 뒤에 시험을 쳐요. 선생님 방법대로 하면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리지 않을까요?
"다음 시간이 품사 수업인데 품사 수업을 어떻게 하면 재밌게 할 수 있을까요?
안타깝게도, 짧은 시간에 효과적인 탐구 수업을 하는 방법을 나는 모른다. 그리고 다음 시간에 당장 써 먹을 품사 수업의 설계는 해 본 적이 없어서 답을 알려줄 수가 없다.
다음 시간이 문법 단원이니까 이제부터 문법 수업을 준비한다는 분들에게 시원한 답을 줄 수가 없다. 나의 문법 수업은 2월과 8월에 설계가 끝난다. 2월에 1학기 수업을 짤 때, 화법, 독서, 작문, 문학 영역을 줄여서 문법 영역을 1달 정도 비워둔다. 그리고 차시별 계획도 매우 여유있게 짠다. 수업 중에 학생들이 자유롭게 탐구를 하다보면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준비되지 않은 시간이 소모된다. 그래도 다음 차시가 있으니까 교사가 학생들의 자유로운 탐구를 멈추게 하지 않으려면 진도에 쫓겨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리고 문법의 탐구를 성공시키기 위해 다른 영역 수업을 할 때에 모둠 활동, 모둠 후 전체 공유 시간에 어떤 말을 해도 괜찮은 수업 분위기를 조성시켜 두어야 한다. 대신 다른 친구의 말을 잘 듣고 자기 생각과 비교하는 대집단 대화 방식도 엄격하게 훈련시켜 두어야 한다.
이런 이야기를 듣기보다 아이들에게 나눠주고 모둠 활동 시키면 아이들이 모두 신나서 열심히 탐구하는 그런 학습지나 수업 기법이나 자료 화면을 받아 가고 싶어하는 교사들을 위해서도 뭔가를 준비하고 싶은데 세계관을 바꾸기가 참 쉽지 않다. 2주 뒤에 교사 연수에서 또 무슨 이야기를 할까 정리하다가 일단 여기까지 정리해 둔다.
모음의 체계를 탐구하다 보면 이런 일도 있다.
ㅟ, ㅚ를 제외한 [표1]까지는 학생들이 쉽게 잘 찾아낸다. 그런데, ㅟ, ㅚ 의 정확한 발음을 모르는 상태에서, 아이들은 'ㅟ'와 'ㅞ'의 발음을 이용해서 체계적으로 사고한 결과 [표3]에 도달한다. 전설모음의 ㅣ, ㅔ, ㅐ를 "원순모음"으로 발음할 때, 'ㅣ'에 원순 자질 'ㅜ'를 붙여 'ㅟ'를 만들고, 'ㅔ'에 원순 자질 'ㅜ'를 붙여 'ㅞ'를 만드는 것이다. [표2]도 원리는 같다. 'ㅜ'에 전설 자질 'ㅣ'를 붙여 'ㅟ'를 만들고 'ㅗ'에 전설 자질 'ㅣ'를 붙여 'ㅚ'를 만드는 것이다.
[표2], [표3] 중에서 어느 게 더 합리적일까?
여기서 아까 말한 단모음과 이중모음의 정의를 이용해서 'ㅞ'를 퇴출시키는 방법도 있지만, 아래 [표4]를 보여주고 [표3]과 비교하게 하는 방법도 있다. [표2]는 'ㅟ, ㅚ'만이 아니라 'ㅔ, ㅐ'에도 적용되므로 적용 범위가 더 넓고 더욱 체계적인 표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굳이 [표3]을 거쳐 [표4]로 가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수업 중에 [표3]이 나타났을 때, 시간 관계상 외면하는 것보다는 그것을 충분히 다룬 다음 [표4]로 넘어가는 것이 더 낫다는 점에는 모두 동의할 것이다. 다만, 실제로 그렇게 하기에는 주어진 시간이 부족할 뿐이다.
퇴근 후 저녁에 피곤한 선생님들에게 효율적인 탐구 학습은 없고, 2월과 8월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설득하기에 3시간으로 부족하다. 그래서 이번에 강원도교육연수원에서는 나에게 9차시나 배정해 주었다. 하지만 끝나고 "좋은 말씀 잘 들었습니다만, 저는 그렇게 못하겠네요." 하는 반응은 변함이 없었다. 뭔가, 돌파구가 필요할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