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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정을 잊어버리셨나요?
by
집쓰니
Aug 15. 2023
반복의 미학에서 육아를 재발견하다
단색화 거장 정상화
무제 87-2-10. 1987. 캔버스에 아크릴릭
단색화 거장 3인(박서보, 윤형근, 정상화) 중
한 명인 정상화 화백(1932~).
정상화 화백의 작품은 반복의 산물이다.
유화를 바른 캔버스를 접었다 펴며
격자무늬를 만든다.
격자 속에서 다 마른 물감은 뜯어내고
빈속을 물감으로 채운다.
그런 다음 또다시 같은 과정을 되풀이한다.
패턴의 반복으로 이루어진 제작 활동은
수행자의 구도를 연상케 한다.
승려가 108배, 1080배를 하듯
수십 번 수백 번씩 반복하기.
그래서일까.
그의 작품 앞에 서면 숙연해진다.
고령의 화가가 커다란 캔버스를 앞에 두고
묵묵히 같은 노동을 반복하는 모습을 그려본다.
반복된 노동은 흩어지지 않고
하나의 예술작품이 되었다.
꾸밈없이 담백하고 누구보다 진실되게.
같은 행위의 N 회차 반복은
육아도 마찬가지다.
아이가 의사소통이 가능해질 무렵
나는 엄청난 착각에 빠져있었다.
이제 말귀를 알아들으니 얘길 하면 잘 듣겠지.
하지만 그것이 착오였다는 걸 깨닫는 데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언어의 학습은 이성의 진화와 연결된다.
의사 표현을 할 줄 안다는 것은
호불호가 생기고 의지가 명확해진다는 것.
"싫어"와 "아니"는 마법 같은 단어다.
짧지만 엄마를 충분히 미치고
환장하게 만드는 매직.
양치를 싫어하고
감기약을 거부하는 아이에게
싫어도 해야 하는 이유를 설득하기란
해도 해도 끝나지 않는,
똑같은 일의 무한한 반복이었다.
말이 설득이지 실상은 거의
애원과 협박에 가까웠다.
"양치하자"는 하루 세 번,
일주일이면 21번, 한 달이면 90번..
약 먹이기는 시간과의 싸움인데
약을 한 번 먹이려면
40분은
입씨름을 해야 했다.
말로 해도 안되면 몸으로 한바탕
씨름을 해야만 끝이 났다.
작가는 반복된 수행 끝에 작품을 완성하는데
나는 뭐 대단한 일을 한다고 이러고 있나.
인간을 완성시키나?
어쩐지 허망하다.
나만 힘들게 키우는 것 같아 억울함이 올라올 즈음
어린 시절의 기억이 떠올랐다.
알약 삼키는 것을 극도로 무서워해
열 살이 넘어서도 엄마를 답답하게 했던 나.
나의 알약 공포증은 고모의 한마디로
깨달음을 얻어 단숨에 사라졌다.
포도씨를 내뱉기 귀찮아서
알을 통째로 삼켜 먹는 나를 보더니
고모가 한 마디 한 것이다.
"얘, 너는 알약보다 더 큰 포도알도
잘만 삼키면서 알약은 왜 못 먹니?"
아쉽게도 그런 깨달음은
우리 아이에게 오지 않았다.
아이가 못 먹는 것은 물약인 데다
쓴맛 자체를 몹시 싫어하는 것.
양치도 "웩~ 하면 어떡하지?"라 반문하며
칫솔을 입에 넣기 꺼려했다.
초등학생이 된 요즘은 조용히 미루는 것으로
저항의 양상이 바뀌었다.
여전히, 단숨에 해치우지 않지만
그래도 시간이 단축되긴 했다.
아주 조금씩...
육아 전문가들은 얘기한다.
원래 그런 거라고.
한 번 일러줬다고 해서
아이가 달라질 거라 기대하면 안 된다고.
수십 번, 수백 번을 일러줘야 한다고.
될 때까지.
대체 우리 애는 누굴 닮아서
이렇게 유난인가? 했던 속상함은
자기 성찰의 시간을 가진 후로 누그러들었다.
누굴 닮긴, 날 닮았지.
그게 다 업이다. 내 업.
아이가 자라도 반복 훈육은 이어졌다.
이 닦기와 약 먹기는 기한 내 숙제하기,
스스로 방 정리하기로 미션이 고도화되었다.
나도 그에 맞춰 레벨 업이 되어야 하는데
부족한 인내심이 발목을 잡는다.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삶의 저항에도
계속 나아가려면 인내가 필요하다.
뜯어낸 빈자리는 채워주고,
또 흠이 생기면 다시 메우듯
아이가 올바른 생활습관을 익힐 때까지
반복해서
알려주며 이끌어주는 것이다.
"뜯고 메우는 무한한 반복이
자칫 바보스러워 보일 수 있지만,
그 행위 안에 다른 생각이나 행위가
개입하는 순간 모든 것은 무너집니다.
그래서 무수히 반복하는 행위가
바보스러움은 아닙니다.
어떤 분야든 가장 중요한 것은 노력입니다."
- 5월 31일 자 뉴스 1 기사
인터뷰 중에서
이미 숱하게 반복해 온 이야기일지라도
오늘 생긴 흠은 어제의 것과
다르다는 마음으로
그 자리를 새롭게 채워나가는 것이다.
그렇게 하루하루 메워지며
조금씩 달라질 것이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가 아니라
내 손의 바가지가 작았던 것이다.
간장 종지만 한 바가지.
간장 종지로 부었을지언정
나의 채움은 새어나가지 않고
독 밑바닥에 고여있다.
그렇게 하나의 독을 채우면
새롭게 채울 독이 나타날 테지.
그러면 또 채우는 거다.
언젠가는 내
종지도 커지겠지.
안 커지면, 더 많이 움직여서 부으면 된다.
그조차 힘들면, 기간을 길게 가지면 될 일이다.
채움의 반복.
득도를 구하는 마음으로,
캔버스를 메우는 작가의 집념으로,
오늘도
아이의 그릇에 물을 채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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