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격한 성장만이 최고는 아니다
얼마 전 채용팀의 팀장에게 내가 이 회사에 선발된 이유 중 하나를 듣게 되었다. 당시 면접관 중 한 명이었던 본부장이 나에게 한 평가 중 하나는 "한국 사회에서 워킹맘으로 생활하기에 많은 장애가 있을 텐데도 지속적으로 성장을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은 점"이라는 내용이었다.
나는 이직을 준비하면서 나름대로 커리어 개발을 위해 노력해다는 점을 이력서에 어필하려 했다. 임신과 출산, 육아를 하는 중에도 국내 MBA를 휴학하지 않고 졸업했으며, 내가 이직하는 이유는 편하게 다닐 수 있는 회사를 찾기 위해서가 아니라 좀 더 바빠지더라도 내가 충분히 기여하고 나의 장점을 발휘할 수 있는 조직을 찾기 위해서라는 내용을 서류와 면접에서 부단히 강조하였다.
이런 부분이 아마도 본부장의 눈에는 '성장을 위한 노력'으로 보였던 모양이다. 하지만 브런치에 워킹맘에 대한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과연 워킹맘에게 성장이란 어떤 의미일까 하는 의문이 생겼다.
조직에서 바라는 성장은 아마도 지속적인 자기개발 노력, 일에 대한 열정, 자신의 시간이나 가정에서의 시간을 일부 희생하면서도 일에 몰입하는 것, 그리고 가장 중요한 <계속해서 눈에 띌만한 성과를 내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 테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직장생활을 하면서 계속해서 일에 몰입하고 빠르게 성장하는 시기만을 보낼 수 있을까?
사람들 대부분 삶과 경력 전반에 걸쳐 ‘급격한 성장 궤도’와 ‘점진적 성장 궤도’ 사이를 왔다 갔다 한다. 그러므로 한 사람을 특정 범주에 영원히 집어넣는 것은 불가능하다.
(킴 스콧 저, '실리콘밸리의 팀장들' 중)
여기서 급격한 성장 궤도에 있는 사람이란 조직에서 변화의 원동력이 되고 야심차며 항상 새로운 기회를 추구하는 유형이다. 그리고 점진적 성장 궤도 있는 사람은 안정감을 추구하고 현재의 역할에 만족하며 직장이 아닌 외부 요인에 더 활발한 관심을 갖고 있는 유형을 말한다.
회사나 팀이 급격하게 변화하는 환경 속에서 새로운 기회를 만들어내야 하는 상황이라면 '급격한 성장 궤도'에 있는 직원들이 많은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점직적 성장 궤도에 있는 사람이 필요 없다는 의미는 아니다. 안정 역시 성장만큼 중요하다. 여기서 안정은 업무의 숙련도가 높고 갑작스러운 변화보다는 점진적인 개선을 추구하며 강한 집중력과 끈기를 뜻한다. 즉, 조직을 구성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변화를 추구하고 미래를 향해 빠르게 나아가는 사람뿐 아니라 숙련된 안정감으로 팀을 묵묵하게 지탱해주는 사람 역시 필요하다는 것이다.
20대와 30대 초반까지 직장생활을 하면서 빠르게 성장을 경험했던 사람이라면 육아휴직을 하면서 혹시나 조직에서 나의 가치가 떨어지지는 않을까, 복직을 하고 나면 치고 올라오는 후배들에게 밀려서 도태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을 하는 경우가 많다. 나 역시 휴직 중에도 회사 그룹웨어에 접속하여 이메일을 체크하며 회사가 어떤 상황인지 감을 잃지 않으려고 했고, 휴직으로 인해 조직생활에서 이대로 밀려나는 것이 아닐까 하는 불안감을 느꼈었다.
복직을 하고 계속 일을 하기로 마음먹은 상황이라면 호흡을 더 길게 가져가야 할 필요가 있다. 한때는 급격한 성장 궤도에서 조직의 빠른 성장과 변화를 이끄는 입장이었다 하더라도 한 동안은 점진적 성장 궤도에 머물르게 된다. 일 외에도 관심을 갖고 관리해야 할 요소(육아, 집안일 등)가 많기 때문이다. 게다가 육아나 집안일 등은 회사 일보다 더 익숙하지 않고 어떤 때는 더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이때 적절하게 에너지를 잘 분배하지 않으면 직장이나 일에서 번아웃(Burn-out)되고 결국 어느 한 가지를 포기하는 상황에 다다를 수도 있다.
그러나 사회는 안타깝게도 계속해서 급격한 성장 궤도에 있기를 요구한다. 안정감과 숙련된 경험으로 팀을 지탱하는 역할보다는 과감하게 도전하는 슈퍼스타를 치켜세우고 개인의 경력을 화려하게 만든 사람들에게 박수를 보낸다. 때문에 한 때 빠르게 성장했던 사람일수록 그 궤도에서 벗어난 후의 상실감은 더 클 수밖에 없다.
우리는 모두 삶에서 성장이 빨라지거나 느려지는 시기를 겪을 수 있다. 여성 뿐 아니라 남성 역시 그런 상황을 겪을 수 있고 그것은 내 선택이 아닌 주변 환경의 영향 때문일 수도 있다. 실제로 주변의 리더들을 보면 빠르지는 않지만 꾸준하고 지속적으로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경험을 쌓아 리더의 자리에 오른 사람들의 비율이 결코 적지 않다. 그리고 우리는 매사 승승장구했던 화려한 스타보다는 안정감 있고 꾸준히 성장한 리더에게 더 인간적인 정을 느끼는 경우도 있다.
아직 부모의 관심과 손이 많이 필요한 어린아이를 양육하는 사람이라면 어느 정도 안정적인 성장 궤도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꼭 여성뿐 아니라 집에서 아이와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내고자 하는 남성도 마찬가지다. 육아가 아닌 집안에 몸이 아픈 가족이 있거나 개인의 건강에 문제가 생긴 경우도 해당된다.
하지만 그런 시기를 겪고 나서 다시 개인의 삶이 안정화되면 급격한 성장 궤도로 분명 돌아갈 수 있는 기회가 생길 것이다. 어느 정도의 쉼은 개인에게 다시 에너지를 불어넣어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워킹맘에게 직장에서의 성장이란 숨 가쁜 백 미터 달리기가 아니라 중간에 잠깐 쉬더라도 끝까지 완주해야만 하는 마라톤이다. 마라톤은 1등을 하지 못하더라도 완주하는 것만으로도 큰 가치가 있다. 그리고 사회와 워킹맘의 주변 가족들이 그런 점을 충분히 이해하고 마라톤을 포기하지 않도록 지지해주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