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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야 Sep 19. 2019

좀생이처럼 보일까 봐 말도 못 하고

네 번째, 상사 이야기

어느덧 사계절을 모두 겪고 반복된 새로운 계절을 맞이했다. 그 사이 회사는 두 번 정도 이사를 했고, 나는 이런저런 일을 해나가며 적응하고 있었다. 하지만 마음속에는 여전히 갈증이 남아 있었다. 신선한 물이 필요했다.




초여름, 회사엔 대학생 인턴 3명이 찾아왔다. 학교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방학 기간 동안 회사에서 일하며 사회생활 미리 보기를 하는 활동이었다. 회사는 대게 야근과 클라이언트의 무분별한 요청에 지쳐 있었는데, 학생 인턴들과 일하다 보면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분위기 환기도 되었다.

아무튼 학생 인턴들은 대체로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 이들이었는데 이때만큼은 달랐다. 물론, 그들의 잘못이라기 보단 겉으로 드러내기엔 어려운 직장인들의 속사정이라 해야 할 듯하다.




그 무렵, 회사는 이름만 대면 알만한 제과회사에서 경쟁 PT를 제안받았다. 제과회사 주력 상품의 캐릭터를 만들고 싶다는 내용이었는데, 총 3곳의 회사가 시안을 가지고 PT를 한다고 했다.


나는 좀 설렜다. 이전에 맡은 프로젝트와 마찬가지로 캐릭터 디자인 프로젝트이긴 하나 그간 해보지 못했던 보다 상업적인 분위기의 디자인 프로젝트였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만약 내 시안이 선택된다면 과자 패키지에 내 캐릭터가 찍혀 나오는 내 나름대로 영광의 순간을 경험하게 될지도 몰랐다. 하지만 너무 속물적인 이유에서였을까. 그 바람은 금방 부서졌다.


대표 C는 직원들에게 잘 맞춰주려 노력하는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회사에 ‘경험’을 하러 온 인턴들에게 ‘단순 잡일’보다는 성취감을 느낄 수 있는 ‘실무’를 경험시켜주고 싶어 했을 거라고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나 역시 인턴들에게 실무를 경험시켜주는 것에는 동의한다.


하지만 ‘캐릭터 기획 총괄’을 인턴 E에게 맡겼을 땐, 충격이었다. 물론, 인턴 E가 인턴 3명 중 유일하게 드로잉이 안 되는 학생이었기에 인턴 E에게 기획을 맡긴다는 명목이 있었지만 나는 서운함을 느꼈다.

나는 회사에 다니기 시작한 초반부터 기획에서 작업까지 모든 프로세스를 경험할 수 있는 프로젝트에 참여해보고 싶다고 누누이 말했었다. 그런데 이 프로젝트에서 내가 맡은 일은 전과 다름없었다.


일하는데 흥이 나지 않았다. 하지만 학생 인턴을 상대로 대표 C에게 이것은 부당하다고 말하는 게 너무 좀생이처럼 보일 것 같아서 참았다. 나는 늘 그렇듯, 비록 즐겁지 않더라도 이왕 할 거면 잘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캐릭터 작업을 하고 있었다. 그래도 캐릭터의 컨셉이나 디자인은 어느 정도 내 생각대로 작업할 수 있어서 하다 보니 조금 즐거웠다.


그리고 직원들이 다 같이 서로 만든 시안을 보며 최종적으로 제출할 시안 몇 개를 골랐다. 내 것은 탈락했다. 시안이 탈락하는 것 하나하나에 일희일비하지 않기로 마음먹었지만, 인턴들의 시안이 모두 후보에 오른 것을 볼 땐 솔직히 서글퍼졌다. ‘이 길이 내 길이 아닌 걸까?’ 하는 고질적인 질문이 머릿속에 둥둥 떠올랐다.


후보 선정 후, 함께 일하는 선배가 급한 프로젝트로 바빠진 탓에 나는 선배의 캐릭터 시안을 넘겨받았다. 기본형으로 만들어 놓은 캐릭터의 성격을 나타낼 수 있는 다양한 응용 버전을 만들었다. 내가 만든 캐릭터로 작업하지 못해 아쉬움은 있었지만, 회사 일이란 게 다 이런 거 아니겠느냐며 나를 달랬다. 그런데 정말 별것 아닌 말 한마디에 비뚤어지고 말았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열심히 마우스를 클릭하고 있을 때였다. 인턴 E가 나에게 다가와 정중하게 ‘선배, 혹시 시간 되세요?’하고 물었다. 내가 ‘무슨 일이에요?’하고 묻자 인턴 E는 내 옆에 바짝 다가와 자신이 캐릭터 컨셉을 바꾸어 봤는데 한번 봐 달라는 거였다. 응용 동작까지 다 만들었는데, 캐릭터 컨셉을 바꾼다니 어떻게 된 일이지 싶었지만 일단 들어보자는 생각에 ‘어떤 수정이에요?’하고 물었다.

그러자 인턴 E는 무언가 열심히 적어 놓은 자신의 노트를 보며 캐릭터의 성격을 바꾸어 보았다고 얘기했다. 그리고는 때마침 내 모니터에 보이는 그 캐릭터를 보며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래서 이 캐릭터는 빨간색으로 하면 좋겠고요. 이 캐릭터 색깔은···.’ 인턴 E는 열정적으로 색 수정을 요청했고, 놀랍게도 나는 이 말에 화가 솟았다.     


비단 이때뿐만 아니라 디자인 작업을 하고 있을 때 불현듯 느껴지는 ‘입력한 대로 뽑아내는 프린트 기계’가 된 기분. 그 참담한 기분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나는 인턴 E에게 ‘전체적인 캐릭터 성격은 말한 대로 반영하면 될 것 같고요. 캐릭터 색은 E 혼자 정해서 오지 않아도 될 것 같아요. 그것보단 세계관 내용이랑 캐릭터 소개 수정 먼저 해주면 좋을 것 같아요.’하고 자리로 돌려보냈다.     


아주 복잡한 감정이 밀려왔다.


입력한 대로 뽑아내는 프린트 기계가 된 것 같은 기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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