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에서 자음 ‘ㄴ’ 하나 빠진 ‘이해’라는 단어를 여름 내내 알아갔다
대학을 졸업하고 5년 만에 친구a를 만났다.
친구는 내가 더이상 모임에 나가지 않겠다고 했을 때 처음 1년, 2년 때까지는 나의 행동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고 했다. 한동안 a의 남자친구에게 내 욕을 했다고. 그럴 때마다 a의 남자친구는 “너 정말 인혜를 좋아했나 보구나” 라며 a에게 말했다고 했다. 그 말을 들으며 우린 마치 재회한 연인처럼 대화를 이어갔다.
“나는 너를 정말 좋아했어”
“나도야”
그때 우리가 멀어졌던 건 마음에 여유가 없어서였다. 여유가 없을 땐 의도와는 상관없이 주변 사람에게 상처를 주게 된다. 그때 거리를 두는 일은 상대를 지키기 위한 방법이었다. 그랬던 일이 이렇게 길어질지 몰랐고 그렇게 5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는 거다.
a는 한 동안 나를 욕하다가도 시간이 더 지나서는 이해가 갔다고 했다. 말 못 할 이유가 있었겠지 라며 미워하는 대신 이해를 하기로 했다는 거였다. 그래도 내가 밉지 않았냐는 말에 “같이 지냈던 동안에는 네가 잘해줬으니까. 너를 많이 좋아하기도 했었고. 기숙사 생활을 할 때도 너는 종종 모임에 빠지곤 했지만 목표가 있었던 모습이 보기 좋았어. 곁에 있으면 자극이 됐어. 오빠도 너 옆에는 꼭 있으라고 했거든.”
| 때론 이해하고, 이해받기 위해 했던 행동으로 상대와 멀어지기도 하고, 아무런 조치 없이 조용히 흘러가기만 해도 묵묵히 이해받고 풀리게 될 때가 있다. 아직도 어느 쪽이 맞는 건지는 잘 모르겠다.
| 어제는 엄마랑 얘기를 하는데, “넌 너무 모든 상황을 그럴 수 있지 라며 이해하려고 해. 근데 이해할 수 없는 일도 있는 거야. 이해할 수 없을 땐,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넘어가. 굳이 이해하고 넘어가지 말고. 이해하지 못한 채로 이해하고 넘어갈 수도 있는 거야” 라며 내게 말했다.
“어차피 넘어가야 될 일이라면 굳이 당장 이해하려고 노력하지 말고, 이해하지 말고 넘어가 버려.”
| 손가락을 접어 꼽을 만큼의 몇 되지 않는 이해받고 싶었던 날들은 여전히 마음 한 구석에서 불길이 꺼지지 않은 채로 남아있다. 누군가와 멀어지기도 했고, 사랑이 끝나기도 했다. 결국 그 끝은 우리는 서로를 이해할 수 없는 존재임을 받아들이는 일이었는데, ‘서로의 처지를 헤아린다’는 뜻의 ‘이해하다’의 행위는 애초에 어쩌면 이해하고 이해받는 개체가 우리와 별개의 대상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대방과 상대방의 처지가 나아지면 그때 서로가 진짜 이해라는 걸 할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때까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서로의 처지가 조금 나아지고 여유가 생길 때까지 기다려주는 노력일지도.
| 예전에 친구와 나누었던 얘기가 문득 생각난다. ‘이제는 관계를 유지하는 거 만으로도 대단한 거야. 개선하는 건 사치일지도 몰라. 유지하려고 노력하면 작은 부스럼들은 저절로 개선이 돼. 결국 이해하고 넘어가는 거야.’
이번 여름엔 이름에서 자음 ‘ㄴ’ 하나 빠진 이해라는 단어를 여름 내내 알아갈 것 같다. 이해, 이혜.
이해하고, 이해받는 일에 대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