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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지원 Dec 23. 2023

우리나라는 정우성 보유국

#사랑한다고 말해줘 #서울의 봄 

 *제목 창의 정우성 사진은 구글에서 검색함 <사진=CJ엔터테인먼트>라 되어있음. 



 나의 하루 중 남편과 함께 하는 시간은 사실상 얼마 안 된다.

그중에서도 대화를 할 수 있는 시간은 더욱 그렇다.     

아침에 함께 일어나 몇 마디 대화를 나누고, 식탁에서 또 몇 마디, 

퇴근 후엔 소파에 앉아 조는 남편 옆에서 또 조잘조잘. 

나는 그가 듣든, 안 듣든 하고 싶은 말은 해야 살 수 있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어제 우연이 안경렌즈 도착했다고 문자가 와서 안경점 다녀왔는데, 

  거기서 허리가 90도로 굽은 할머니를 봤어. 이렇게 추운 날 파카도 안 입고...  

  마음이 안 좋아. 그렇다고 뭘 하지도 못했는데, 생각해 보니까, 

  입던 파카라도 입혀드렸으면 어땠을까? 그럼 난 새로 살 수 있잖아. "

"너네 할머니처럼 이북분이라 이 정도 추위는 아무것도 아닐 수도 있지. 

 무거워서 안 입고 나오신 걸 수도 있고"

"하긴 할머니 어려서 살던 거긴, 문고리에 손이 쩍쩍 붙는다고 했었는데

 이래서 기부라는 걸 하나 봐. 직접은 뭘 하기가...  

 어제 뉴스에 노숙자분들에게 저녁 식사 제공하고, 핫팩 같은 거 나눠주는 봉사자들 나왔는데... 

 이태원 참사 유족분들... 이 추운 날 오체투지하시는데... 어떡해 그분들...  

 어제 한블리에서 봤는데... 

  ... 어쩌고 저쩌고 주절주절, 주절주절 어쩌고 저쩌고... "

 

나도 모르게 점점 장황하게 말이 길어지고, 어느 순간 안드로메다를 헤매고 있다.  

그리고 알게 된다. 지금 나 혼자 말하고 있다.  


"내 말 듣고 있어?"  


그의 동공이 흔들린다. 

"너무 길어..."




영화 포스터. 


 지난주 드디어 '서울의 봄'을 봤다. 

예비 중학생이 된 막내와 이 영화를 생각만 해도 짜증이 난다는 남편과 함께.

평일 저녁임에도 꽤 많은 관객이 극장 안을 채우고 있었다. 

요즘 극장에서 영화 보는 재미를 알게 된 우리 막내는 엄마와 아빠 사이에 앉았다.

호기심 가득한 눈을 반짝이고 있다. 

영화가 시작되고 답답한 상황이 이어지자 한 칸 건너에 앉은 남편의 한숨 소리가 

나에게까지 들려온다. 내 옆의 막내가 아빠의 귀에 속삭인다. 


"근데, 아빠 누가 이겨?"

 

남편의 한숨 소리가 또 들려온다. 결말을 알고 보는 게 이렇게나 힘든 일이다. 

그 무렵 나는 일곱 살이고, 광화문에서 가까운 용산에 거주하고 있었다.

세상이 그렇게 돌아가는 것도 모르고 컬러 TV 좋아! 야구 좋아!  

MBC청룡 어린이 회원이 되기 위해 원효대교인지, 마포대교인지 암튼 여의도까지 놓인 다리를

걸어서 건넜다. 남편과 나, 우리는 그렇게 평범하게 살았다. 

민주화를 위해 청춘을 바친 적도 없고, 조상 중 잊히고 억울한 독립운동가가 있지도 않지만 

그럼에도 내 정치적 성향이 명확한 이유를 이 영화를 보며 다시 한번 납득했다. 

적어도 고문을 한쪽보다는 고문당한 쪽을 지지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승리했고, 아주 오래도록 잘 먹고 잘 살았다.

그리고 이태신, 아니 정우성은 고문을 당했다.

짜증인지, 억울인지, 분노인지, 모를 거대한 돌아버림이 나를 장악했다. 

극장을 나오며 남편에게 말했다.


"이태신이 정우성이라 마음이 더 아픈 건가?  

  정우성이 아니었으면 덜 아팠을까? 하여간 마음이 많이 안 좋네." 



 요즘 드라마들, 왜 이렇게 재미가 없나? 드라마가 별로라는 게 아니라, 

드라마를 보는 내 눈이 달라졌다는 의미다. 그중에 딱 하나, 독보적으로 내 취향을 저격하고 있는 

드라마는 '사랑한다고 말해줘'다. 

K 드라마 속 남자 주인공은 온갖 실장님, 사장님, 아픔 있는 재벌 2세... 

그런데 이 드라마의 남자 주인공은 농인이고 심지어 고아다. 어떻게 이게 가능한가? 

알고 보니 원작이 일본 드라마다. 

오래전 일드 덕질을 했던 적이 있다.  

나도 모르게 그때의 감성이 올라온다. 이젠 제목도 잊어버린 일본 드라마들. 

어떤 건, 바다에 인접한 마을에서 아주 특별한 서사도 없이 잔잔했는데, 

어느 순간 눈물이 고였다. 시아가 흐려지고 또르륵 흘러내렸다. 

'사랑한다고 말해줘'도 그렇다. 모든 장면이 아름답다.  

특히 사랑하는 여자의 말을 알아듣기 위해 애를 쓰는 정우성의 촉촉한 눈. 

그 느린 깜박임이 내 마음속 호수에 큰 파문을 일으킨다.       


"오빠, 눈 좀 깜박여봐 봐."

"왜?"

"아니 아니, 안 해도 될 거 같아. 하지 마." 

"그래도 농인이 남자 주인공인 드라마가 나왔네. 우리나라 많이 발전했다."

"일드 원작이야."

"아..."


사랑한다고 말해줘 한 장면 구글에서 검색해서 찾음



지난 주말 

기숙사에 있는 대학생 큰애까지 집에 와, TV앞에 온 가족이 앉게 됐다. 

예전엔 흔한 이 장면이, 요즘은 희귀하다. (자식은 크면 집을 나간다.)   

마침 '사랑한다고 말해줘' 1회부터 6회까지 핵심만 정리한 몰아보기가 방영되고 있어   

유튜브 써머리 아니면 드라마를 못 보는 남편까지 소파에 딱 앉히고 

다 같이 시청을 했는데, 남편이 그나마도 집중을 못하고 자꾸 딴짓을 한다. 

이 드라마를 전부 다 꼼꼼하게 시청한 나의 부연설명도 듣지 않는다. 


"내 말 듣고 있는 거야?"

"그냥 1회부터 10회까지 방송된 후에 유튜브 써머리로 보면 깔끔해"


정우성의 촉촉한 눈에 퐁당, 아니 풍덩 빠진 내가 불편해 어깃장 놓고 있는 건가? 

아니, 그럴 리 없다. 그런 인간은 아니지. 익숙한 상황인데도 머리가 띵하고 가슴이 답답해진다.  

옆에서 우리의 대화를 보고 있던 큰애가 요즘은 자기 학교 남자친구들도 유튜브 써머리로 

드라마를 본다며 아빠한테 너무 뭐라 하지 말라고 한다.  

현장에서 생고생하며 드라마를 제작하는 사람들은 이 사실을 알고 있는지 모르겠다.    


"귀에 뚫려있으면 뭘 해, 내 말을 듣질 않는데. 

 정우성의 저 깊은 눈 좀 봐라. 듣지 못해도 내 마음속을 다 들여다보는 거 같지 않니? 

 저렇게 들어주려고, 들어보려고 애쓰는 것만 봐도 엄마는 눈물이 난다."


큰 애가 공감을 해준다.

 

"그러게... 엄마 정우성 너무 잘생겼어. 따듯해. 

 눈빛이 깊어, 아주 깊어. 빠져드네. 정말. 멜로 보고 설렌 거 진짜 오랜만이야."


"마음도 착하시다. 난민을 위한 구호활동도 하고,  

 서울의 봄도 정우성이 나와 동분서주하니 더 가슴이 더 아파.

 애통하다...  얼마나 다행이냐, 우리나라에 정우성이 있어서.

 우리나라는 정우성 보유국이다."   


영화'서울의 봄'을 통해 2030 세대들이 우리나라의 근 현대사에 관심을 갖게 됐다고 들었다.

기쁜 소식이다. 서울의 봄이 오면 좋겠다. 좋을 텐데...  




우연이가 그린 우리 가족 풍경 




정우연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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