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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작가 Feb 19. 2020

나의 어른, 나의 선생님

 선생님은 스물두 살에 학원에서 처음 뵀다. 주로 이론 수업이나 콘티를 직접 그리도록 하는 수업을 하셨다. 그때 당시에는 다소 이해하기 어려웠던 영화를 보고 감상문을 써가면 그 위에 첨삭해주시고는 했다. 화려한 화법이나 기술로 학생들을 휘어잡으며 가르치시기보다는 정해진 진도 안에서 짜인 설명을 반듯하게 하시는, 고등학교 기술 가정 선생님 같은 분이었다.


 입시가 몇 개월 정도 남았을 때 이론 수업은 필요하지 않아서 선생님의 수업을 거의 듣지 않게 됐고, 학원에 나가는 요일이 달라지면서 선생님을 자주 못 뵙게 되었다. 해가 넘어가고, 영화과에 합격한 뒤 한숨 돌리고 있을 때 선생님에게 잘 지내냐는 연락을 받은 적이 있다고... 기억한다. 사실 꽤 오래전 일이라 잘 기억나지 않아서 도대체 어떻게 선생님과 연락이 닿았는지 복기해 보았는데, 아마도 그랬던 것 같다. 내가 입시 결과를 학원에 따로 알리지 않았었는데 선생님은 그게 개인적으로 궁금하셨던 모양이었다. 다행히 합격 소식을 전해드리면서 선생님이 그 당시 조교로 계셨던 동국대 안에 있는 식당에서 만나 뵙기로 약속을 했다. 그날 이후 해가 바뀌거나, 계절이 바뀔 때, 날씨가 갑작스럽게 차가워지거나, 문득 스승의 날이라는 걸 자각했을 때 등 선생님과 종종 연락을 주고받았다. 만남의 주기는 대부분 1년을 넘기지 않았다.


 학교에서 영화를 찍느라 터무니없는 시나리오를 첨삭 부탁드렸을 때에도, 졸업한 뒤 꽤나 긴 백수 생활을 할 때에도, 첫 회사에 취직하고 퇴사한 후에 이직 준비를 하고 있을 때에도, 선생님은 나에게 '조언' 하신 적이 없었다. 다만 시나리오를 보며 어떤 고민을 하는 게 더 나은 방향인지 알려주셨다. 무언가에 열정적이지 않으면서 마음만 불안한 시절에 있는 나를 보며, 타인의 욕망에 이끌려 살다가 결국 자살을 선택했던 부사관 이야기를 해주실 뿐이었다. 시간의 빠름에 허우덕 대고 있는 나에게는, 40대인 지금도 시간보다 느리다며, 느리게 사는 것에 조금은 익숙해졌다고 얘기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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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는 "수현아, 네가 어떤 선택을 하게 될 때 나에게 연락을 해라." 아마도 평생 못 잊을 것 같은 이 말씀도 하셨다. 살면서 선택의 순간이 이리도 자주 찾아올 것이라고 몰랐으며, 그 선택에 따른 책임의 무게를 덜 느낄 때 들었던 말이다. 물론 선생님께 어떤 답을 듣기 위해 연락을 드렸던 적은 없었다. 다만 여러 개의 차선 앞에서 어느 차선을 타야 되는지 혼란스러울 때마다 어디로 가든 괜찮다고 그 문장이 북돋아주는 것 같았다. 자주 뵙지는 않았어도 인생의 중요한 순간마다 선생님의 말들이 불쑥 튀어나와 나를 다독였다.


 올해 1월 2일. 거의 3년 만에 선생님을 뵌 곳은 필동의 파스타 가게였다. 샐러드와 파스타 두 개를 시키고 그간 못 했던 이야기를 나눴다. 교수님이 된 선생님은 더욱 바빠지셨고 방학이었지만 늘 학교에 나가셨다. 그간의 근황과 최근에 봤던 영화 이야기를 나눴다. 유럽을 갔다 왔다고 하니, 이 생활에서 아예 벗어나 있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며 어디든 매 해 가라고 하셨다. 오라는 회사의 포트폴리오가 하고 싶지 않은 작업이라는 내게는 '그럼, 영화했던 사람인데.'라고 말씀하셨다. 그때 회사를 너무 고르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자괴감 비슷한 것에 빠질 때쯤이었는데 선생님의 그 말이 '아직 괜찮아. 자신감을 가져'라는 말처럼 들렸다. 책을 추천해 달라는 내게, 봤던 영화와 읽었던 책을 기록해 놓은 핸드폰의 메모장을 열어 하나하나 추천해주셨다. 그렇게 한참을 묵혀뒀던 대화를 나누고 선생님은 다시 학교로 들어가셨다. 선생님은 여전하셨다. 그저 대화다운 대화를 나누는 것. 선생님과 만나면 그게 다였다.


 몇 년 전 어느 가을날 선생님은 '수현아, 바람이 차다. 잘 지내고 있니?'라며 연락하셨다. 바람이 차가웠던 어느 날. 선생님은 내 생각이 나셨던 걸까. 어느 날과 다름없는 날에 누군가를 떠올리다는 건, 그 사람이 한 사람의 삶에 한 자리쯤은 차지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어느 때와 다름없이 갈듯 말듯한 겨울의 끝자락에서 선생님과의 첫 만남부터 마지막 만남까지 되새겨보고 있는 걸 보니, 선생님은 내게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인 게 분명했다. 이 겨울이 다 가기 전에 선생님께 연락드려봐야겠다. '선생님, 아직 날이 많이 차요. 잘 지내시죠?'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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