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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지 Sep 09. 2021

[옥타비아 버틀러 특집] : 킨

소덕소덕 : 소심한 덕후들의 소소한 덕질 라이프 12화

팟캐스트 12화는 여기에서 들을 수 있습니다. 


여전히 유효한 메세지를 담은, <킨>

저번주에 이어 이번주도 '옥타비아 버틀러' 특집으로 진행합니다. 저는 소설 <킨>을 골랐는데요. 이 소설은 제가 개인적으로 다른 책 모임에서 함께 읽고 나누었던 책이기도 합니다. 제가 이 책을 고른 이유는 제가 최근에 읽었던 sf 소설 중 제게 강렬한 이미지를 남겼던 책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제가 많은 종의 sf 소설을 읽은 것은 아니라서 이런 말을 하는 게 민망하긴 합니다.) 그래도 이런 말을 감히 할 수 있을 만큼 옥타비아 버틀러의 이 작품, <킨>은 여전히 우리에게 울림을 주고, 강렬한 메세지를 주는 책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였을까요? 책을 읽으며 느꼈던 것은, 이 책이 그리 오래되지 않았을 거란 생각이었습니다. 그만큼 여전히 메세지가 유효했기 때문이겠죠. 그래서 그녀가 47년생이라는 사실, 그리고 2006년 유명을 달리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는 꽤 놀라웠습니다. 제가 고른 <킨>은 1979년 발표된 sf소설입니다. 그녀의 대표작 중 하나죠.

요즘 핫한 sf 작가인 김초엽 작가님을 아시나요? 그분의 한 인터뷰를 우연히 보았는데, 인터뷰에서 작가님은 옥타비아 버틀러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생각지도 못하게 SF 작가로 덜컥 데뷔한 이후 ‘이제부터 대체 무슨 글을 써야 하나’ 고민에 빠졌던 때, 옥타비아 버틀러의 작품들을 만났다. 버틀러는 SF계의 ‘그랜드 데임(Grand Dame)’으로 불린 작가다. 탁월한 문학적 성취를 거둔 동시에 흑인 여성이라는 자신의 소수자성을 작품에 녹여냈다. <킨> 외에도 출간된 그의 모든 작품이 완벽하다. (2019년에) SF 소설을 쓰는 여성 작가로 살아가면서 버틀러의 영향을 벗어날 방법은 없다.

이처럼 <킨>은 SF 작품으로, 특별히 여성 작가의 작품 중에서 상징적인 작품임에 틀림 없습니다. 그렇다면 왜 <킨>은 SF계에서 그렇게 상징적이고, 대표적인 작품이 되었을까요?


시간여행이 드러내는 차별의 민낯

저는 그것이 작가 옥타비아 버틀러가 자신의 소수자됨을 잘 표현해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녀는 여성으로, 또 특별히는 '흑인' 여성으로 겪는 그 차별과 어려움들에 대해 그 민낯을 '시간 여행'이라는 설정을 통해 효과적으로 드러냈습니다.

네, 이 소설은 '시간 여행'으로 주된 사건이 전개되는 소설입니다. 보통 시간 여행이면 무언가 흥미로운 시대로 가서, 과거의 유명한 인물이나 유명한 사건들을 마주하는 흥미진진하고 재밌는 것으로 여겨지죠. (대표적으로 제가 좋아하는 SF 작가인 코니 윌리스의 작품에서 그런 맥락의 '시간 여행'을 즐길 수 있답니다.) 그러나 옥타비아 버틀러의 <킨> 속의 '시간 여행'은 두렵고 공포스러운 시간입니다. 왜냐하면 주인공이 흑인 여성이기 때문이죠. 흑인 여성으로 100년 전 과거로 시간 여행을 한다는 것은, 노예제가 폐지 되기 이전으로 돌아가야 하기 때문에, 그 자체로 더더욱 공포스러운 일입니다. 어디서 어떻게 죽을 지도 모르고, 언제 고문을 당하거나 죽임을 당할지 모르는, 또한 언제건 성폭행을 당할 수도 있는 상황에 처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주인공은 다나는 흑인 여성입니다. 그녀는 백인 남성인 케빈과 결혼했죠. 그렇게 일상생활을 하며 보내고 있을 때, 아주 갑작스럽게 다나는 과거로 떨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루퍼트라는 아이를 만나게 되죠. 그리고 어찌저찌하다보니 다나는 자신이 루퍼트가 위험에 처할 때마다 시간 여행을 하게 된다는 것을, 그리고 루퍼트가 자신의 조상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다시 현실로 돌아오려면 자신의 목숨이 위협받는 위태로운 상황에 처해야 함도 알게 돼죠. 그렇게 다나는, (그리고 이후 여행에서는 케빈도 함께 과거로 떨어집니다.) 100년도 전인 과거로 가서 수많은 사건을 겪게 됩니다. 그 이야기가 담긴 것이 바로 이 <킨>이라는 소설입니다.

그렇기에 이 소설에서 '시간 여행'이라는 사건은 흥미진진하거나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에 대한 기대감을 고취시킨다기보다는, 생존과 연계된 두려움을 주는 도구로써 사용됩니다. 특히 과거로 떠난 시간 여행은, 과거의 유명한 사건을 알고 있는 전제로 펼쳐지기에 이미 알고 있는 그 사건 속에서 어떻게 소설 속 이야기가 전개되고 유기적으로 연결되는지가 주요한 관전 포인트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킨에서는 그 과거의 사회적인 맥락 속에서, 잘 알지 못하는 '조상', 유명하지 않은 그 인물과의 관계 속에서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지 전전긍긍해야 합니다. 과연 주인공 다나가 무사할 수 있을지 마음 졸이며 지켜보아야 하는 거죠. 그렇기에 이 소설의 재미는 기존 SF 장르에서 느낄 수 있는 재미와는 조금 결이 다를 수 있습니다. 적어도 제가 좋아하는 코니 윌리스의 작품의 재미와는 다른 결의 목적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코니 윌리스의 옥스포드 시간여행 시리즈 중 <블랙아웃>이나 <올클리어>를 생각해보면 명확히 비교가 될 것 같아요. 그녀의 작품들은 과거 유명한 사건, 특별히 세계 대전을 배경으로 유명한 사건들을 역사적으로 연구하기 위해 시간 이동을 한 역사학자들의 이야기로 전개되거든요. 그리고 더불어 기존 SF 소설이 백인 남성의 전유물이었다는 사실에서 옥타비아 버틀러의 작품은 그 자체로 유의미한 족적을 남겼습니다. 그들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SF라는 장르를 활용해, 그리고 그 장르를 활용한 자신의 작품을 통해 옥타비아 버틀러는 인종문제에 대해, 그리고 젠더문제에 대해 다루며, 차별과 억압 등에 대해 이야기했죠. 그렇다면 이를 통해 SF 장르에 어떤 메시지를 전한 것은 아닐까요?

사람들은 나를 'SF 작가'라고, 내 소설은 당연히 SF라고 규정한다. 그러나 나는 소설을 쓰는 '작가'일 뿐이다. 내가 좋은 이야기를 썼는지 아닌지만 판단받기를 원하는.

이런 맥락에서 소설 속 케빈과 다나의 상반된 상황에 대한 반응을 살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100년 전 시대에 떨어진 케빈은 그곳에서 역사의 산 증인이 될 수 있으리라 기대하며 기대감을 가졌거든요. 이 모습은 두려움을 느끼는 다나와 퍽 대비되는 모습이었습니다. 누군가에게는 단 하루도 생명이 보장되지 않는 삶이지만, 누군가에게는 꽤나 낭만적이거나 기대되는 삶일 수도 있다는 게 잔인하지만 정말 현실적인 이야기로 다가왔습니다.

여긴 굉장히 살기 좋은 시대일 수도 있어. 여기에 머무는 게 얼마나 큰 경험일지 계속 생각하게 돼. 서부로 가서 이 나라의 건설을 지켜보고, 옛 서부 신화가 어느 정도나 사실인지도 보고 말이야.

차별을 겪지 못하는 이들은 그 무게나 크기를 짐작도 못한다는 것, 차별과 억압의 현실에 대해 이렇게나 무지할 수도 있다는 게 참으로 씁쓸했습니다. 하지만 사실, 이런 케빈과 같은 모습은 지금 이 사회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태도입니다.

이와 같은 맥락의 포인트를 하나 더 짚고 넘어가고 싶습니다. <킨>에서는 '시간 여행'이라는 도구를 사용함으로 과거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현재의 인물 다나가 겪게 되는데요. 바로 이 다나가 겪게 되는 일들이 낯설지 않다는 점입니다. 분명 과거에 일어나는 일이고, 이미 100년이라는 시간의 괴리가 있는데 어떻게 이것이 가능할까 생각해보면, 결국 이 현실이 그다지 바뀌지 않았기 때문에 그토록 과거에 돌아가 겪게 되는 차별과 억압에 대한 메시지가 여전히 유효하다는 생각으로 읽히게 됩니다. (꽤 절망적이죠?) 그런 면에서 옥타비아 버틀러의 <킨>은 (아주 슬프지만) 여전히 유효한 이야기가 담겨진 책이고, 그를 시간 여행이라는 도구로 아주 영리하게 풀어낸 소설이라고 평할 수 있습니다. 시간 여행이라는 걸 통해 결국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 거리를 두고 객관적으로 그 상황을, 우리가 잘 인식하지 못한 그 차별과 억압을 조금 더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거든요. 과거로 떠난 시간 여행을 통해 오히려 현실의 삶도 다를 바가 없음을 깨우치게 되고, 그 여전한 차별의 민낯을 보게 만드는 거죠.

그런 의미에서 <킨>에서의 시간 여행은 기술적인 발전을 보여주거나, 과학적인 성취를 드러내는 의미로 쓰이지 않습니다. 그저 이야기를 효과적으로 드러내기 위한 하나의 소설적인 도구일 뿐이죠. 그렇기에 <킨>에서는 시간 여행이 어떻게 가능한지, 어떤 이유로 시간 여행을 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생략합니다. 그건 옥타비아 버틀러가 말하고자 하는 내용과 크게 관련이 없기 때문이겠죠.


다나의 좌절에서 발견하는 

우리 시대의 모습들

다나는 자신의 조상인 루퍼트의 뼛속 깊게 내제되어 있는 노예에 대한 인식, 그리고 특별히 흑인 여성 노예에 대한 인식을 뜯어 고치고자 합니다. 다나는 루퍼트와 특별한 관계를 형성하며 지속적으로 그를 깨우치고자 노력하죠. 다나의 그런 모습은 누가봐도 이질적인 이방인의 모습입니다. 게다가 그곳에서 다나의 말투는 어색하기만 합니다. 다나의 말투가 마치 '백인 같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다나의 복장도 '남성'처럼 바지를 입은 어색한 모습으로 보여지죠. 이처럼 그들 사이에서는 다나는 이방인이었고, 그들 깊게 내제되어 있는 규칙을 계속해서 어기는 이질적인 인물이었습니다.

이질적인 인물이었던 다나는 그속에서 자행되고 있는 차별과 실제로 부딪혀야 했고, 두려움을 딛고 싸워내야 하는 상황과 마주했습니다. 비록 그 싸움이 적극적으로 보이지 않더라도, 저는 그 차별과 억압 아래의 싸움이 어떤 소극적인 모습을 하고 있더라도 그를 비난하고 싶진 않습니다. 그만큼 사회 체제가, 그 뿌리 깊은 문화의 거대함이 한 인간을 압도하고 있기 때문이죠. 그렇게 다나는 자신의 조상인 루퍼트, 그리고 그가 사랑하고 소유욕을 느꼈던 앨리스의 관계를 지켜보았습니다. 특히 인종차별이 심각할 정도로 자행되었던 미국 남부, 게다가 여성에 대한 차별이 당연시 되었던 시대 상황은 그런 사랑이 어떻게 쉽게 소유욕으로 바뀔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큰 틀에서의 배경이 됩니다.

다나는 그 속에서 먼저 권력, 힘을 가진 농장의 후계자인 자신의 조상 루퍼트를 계몽하고자 하지만 실패합니다. 그리고 이후 글을 배우고자 하는 흑인 노예들을 교육하지만, 그도 좋은 결과로 이어지지 못하죠. 이런 일련의 일들이 계속되자 다나는 무기력해지고, 자신이 하던 일들의 의미를 찾지 못하게 되며, 망연자실한 채로 일종의 무기력한 모습으로 체제에 순응해가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 모습은 마치 이 세상의 비틀어진 면모들을 깨우고자 애쓰는 목소리들이 어떻게 힘을 잃고 스러져가는지를 보여주는 모습과도 같았습니다.

그리고 더불어 다나는 흑인 여성으로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인정받지 못합니다. 자신의 생각이, 자신의 의견이 그속에서 얼마나 더 외롭고 공허한 목소리일 뿐인지를 마주할 뿐이었죠. 연대가 상실된 상황 속에서 다나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보였을 겁니다. 그리고 이내 다나는 지속되는 폭력과 차별에, 점차 무기력해지고 익숙해지게 됩니다. 그리고 자기도 모르게 이런 말을 내뱉게 됩니다.

숲과 들판을 더 지나고 마침내 내 앞에 사각형의 수수한 집이 나타났다. 아래층 창문마다 노란색 불빛이 가득했다. 나는 지쳐서 "겨우 집이네" 하고 말하다가 흠칫 놀라고 말았다.

다나에게 진짜 집은 그곳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우연히 시간 여행을 온, 감옥과도 같은 억압의 장소였죠. 그런데 다나는 이 장면에서 그곳을 '집'으로 표현한 스스로에게 흠칫 놀라게 됩니다. 그정도로 폭력은, 차별은 다나 그 자신에게도 아주 교묘하게 스며들어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깨닫게 된 거죠.

잠시 동안 들판과 그 집 사이에 가만히 서서 내가 지금 적지에 와 있다는 사실을 상기했다. 이제는 낯설어 보이지 않았지만, 그래서 긴장감을 풀고 실수를 저지를 가능성이 더 높아졌으니 오히려 더 위험했다.

그리고 다나가 되내이는 것은 자기가 그곳에서 입은 상처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그곳에서 익숙해지지 않기 위해, 그곳에서 정신을 차리기 위해 자신이 입은 그 상처를 상기했던 거죠. 이 모습은 마치 차별의 한복판에서 정신을 차리기 위해 상처를 들여다보며 싸울 투지를, 의지를 다시금 되새기는 모습과도 같아 보였습니다. 사실 이 모습은 사회 속의 만연한 여러 차별에 지친 이들이 가진 모습이 아닐까요? 저는 이 모습이 굉장히 익숙한 장면처럼 보였습니다. 여전히 반복되고 있는 모습처럼 보였고, 지금 어딘가에서는 일어나고 있는 모습 같았거든요.

저는 이처럼 차별에 대항하고 싸우고 있는 이들이 얼마나 사회 속에서 이질적인 존재, 이방인으로 여겨지는지에 대해 생각하게 됐습니다. 더불어 그들의 싸움이 얼마나 무력해보이는지, 그리고 외로운 싸움인지를 생각하게 한다는 점에서 이 소설은 여전히 우리 사회에 여러 유의미한 메시지를 던져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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