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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지 Sep 09. 2021

[지브리 특집] :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

소덕소덕 : 소심한 덕후들의 소소한 덕질 라이프 14화

팟캐스트 14화는 여기에서 들을 수 있습니다. 


지브리의 시작

저는 지브리 특집으로 지브리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닌 지브리를 만든 애니메이션을 가져왔습니다. 바로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인데요. 당시 무명이었던 미야자키 하야오가 유명해지고, 그리고 지브리 스튜디오가 생기게 된 계기가 바로 이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입니다. 저는 그래서 이번 지브리 특집으로 나우시카를 골라 함께 지브리 스튜디오가 시작된 그 매력적인 영화 이야기를 다뤄보고자 합니다.

지브리의 시작을 만든 작품이기에 꽤 오래된 영화입니다. 1984년 작이죠. 미야자키 하야오는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에 근무하면서 여러 기획안을 작성하지만 거절당하고 이후 다니던 애니메이션 회사를 그만두고 애니메이션을 만들기 위한 원작 만화를 그리기 시작합니다. 월간 잡지에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를 연재하기 시작한 거죠. 그리고 미야자키 원작의 그 만화를 영화화 한 것이 바로 지브리의 시작, <바람계곡의 나우시카>가 되었습니다. 바로 이 영화를 시작으로 이후 지브리의 그 유명한 작품들이 제작된 겁니다. 나우시카가 없었다면 불가능했겠죠.


반전, 그리고 환경 보호 메시지?

지브리 영화의 특징은 전쟁에 대한 반대의 메시지, 그리고 환경에 대한 메시지로 짚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른 영화들에도 이와 같은 특징들이 잘 나타나죠. 그중에서 바람계곡의 나우시카가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특별히 환경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인간에 의해 파괴된 환경에 대해 보여주고 이야기하며 그 환경이 스스로 어떻게 치유하는지, 파괴된 것들을 어떻게 회복시켜주는지에 대한 메시지를 줍니다.

저는 특별히 이 영화가 오늘날 코로나 시대에 살아가는 우리에게 또 하나의 기시감을 준다고 생각합니다. 코로나가 터지고 얼마 뒤, 우리는 놀라운 자연의 회복을 목격했었죠. 자연을 파괴하는 인간이 전염병으로 인해 사라지니, 전세계에서 파괴되었던 환경이 놀랍게도 스스로 자정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죠.

역시 환경 파괴의 주범은 인간이며, 인간이 사라진 곳에서는 파괴가 아닌 회복이 일어나게 됨을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책에서 읽었던 내용인데, 환경을 보호하기 위한 우리의 최선의 선택이 다른 것보다도 자손을 낳지 않는 것일 수 있다는 것을 읽은 기억이 있습니다. 그처럼 환경의 최대의 적은 인간이라는 의미겠죠.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에서도 비슷한 맥락의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인간의 욕심으로 인한 전쟁 이후에 환경은 마구잡이로 파괴되어 인간이 살기 어려운 땅, 독소를 머금은 땅이 되어버렸습니다. 인간은 독소를 마구 내뿜어 숨쉴 수도 없게 만드는 식물들이 있는 부해, 그리고 그곳에 살며 부해를 파괴하려고 하는 인간을 공격하고 자신의 터전을 지키고자 하는 수많은 곤충들이 있습니다. 인간들은 당장은 독소를 내뿜어 살 수 없게 만드는 식물들을 적대하고 곤충들을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영화가 진행될 수록 나우시카는 부해 깊숙한 곳에서는 그 땅의 독소를 스스로 자정시켜 깨끗하게 만드는 식물들을 보여줍니다.

결국, 인간으로 인해 파괴된 자연이 인간으로부터 멀어진 그곳에서 사실은 스스로 회복시키고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자연의 회복을 위해서는 인간이 다가와서는 안 됨을 알았기 때문일까요? 우선 그들이 흔히 말해 '부해'라고 이르는 환경은 그 누구도 마스크 없이는 5분도 버티지 못하는 독소가 가득한 곳입니다. 때문에 인간이 쉽게 접근하지 않는 곳이죠. 이는 마치 인간이 있다면 회복될 수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인 것처럼 보입니다. 인간이 있으면 회복될 수 없음을 알고, 인간에게 독소를 뿜어내며 출입을 막는 모습과도 같아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또하나의 모습은 그정도로 인간이 자연에게 끼치는 해악이 크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렇게까지 독소를 뿜어내야만 회복될 수 있다는 것은, 그간 인간으로 인해 파괴된 것이 겹겹이, 아주 깊게 쌓여 있었다는 것을 또한 말해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코로나 시대와 유사한 나우시카의 세상

나우시카가 살아가는 영화 속 세상은 사실 지금 우리의 삶과 비슷해보입니다. 나우시카의 세상에서는 전쟁으로 개발된 거신병들로 파괴된 지구에서, 그 발달된 기술로 오히려 지구가 병들어버려 부해라는 것이 마구 생겨나게 되었고, 그 부해라는 곳에서는 마스크가 없이는 생명을 이어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부해의 주변도 땅이 병들게 되고, 사람들도 그 부해의 독성에 점차 영향을 받아 병들고 죽어가게 되었죠. 뭔가 기시감이 느껴지지 않으신가요? 네, 저는 오랜만에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를 보면서 지금 우리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그리고 서로를 바이러스로부터 지키기 위해 마스크에 의존하는 우리네 삶의 모습을 보게 됐습니다.

코로나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이야기가 많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에게 마스크는 인류의 존속을 위해 가장 중요한 물품 중 하나가 되었다는 겁니다. 마치 부해의 독성으로부터 막아주었던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속 마스크처럼, 이 땅에서 마스크는 코로나로부터 우리를 지켜주는 거죠.

그리고 또, 그렇게나 엄청난 거신병을 만들어 냈던 예의 그 인류가, 그에 의해 파괴된 상황으로 인해 이렇게나 고통받고 부해라는 새로운 재앙에 무력하게 스러져갔다는 그 모습은 코로나로 인해 한없이 무력했던 우리의 실제 삶의 모습을 또한 다시금 생각하게 만듭니다. 저는 지금도 가끔, 이렇게나 발전된 세상도 전염병 앞에서 이렇게나 무너지고 무기력할 수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어 인간의 무력함에 대해서 생각하곤 합니다. 이 영화를 통해서는 그를 마치 거울처럼 다시금 보게 되는 거죠.


한 사람의 희생으로 이룬 영웅적인 결말

나우시카의 결말은 나우시카의 희생으로 마무리 됩니다. 각 진영의 여러 인간들의 욕심을 보여주다, 결국 그 욕심으로 인해 오무라는 곤충을 유도해 바람계곡을 공격하게 만들게 되죠. 나우시카는 자신의 나라를 지키기 위해, 그리고 그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바람계곡으로 어떻게든 돌아와서 끝이 보이지 않게, 그리고 무서운 속도로 전진하는 오무 무리를 막으려다 그 사이로 떨어져버립니다.

그리고 그런 나우시카는 영화의 초반 언급되었던 예언, 자연과 인간이 화해하게 만드는 메시야적 인물로 밝혀지게 됩니다. 희생된 줄로만 알았던 나우시카 주변으로 화가 났던 오무의 눈들이 진정하게 되고, 다른 인간들과 다르게 곤충을 이해하려고 했던, 그리고 어린 오무를 구해주었던 나우시카의 마음이 통해 오무들에게 전달된 겁니다. 매우 극적인 엔딩이고, 클리셰적 결말이죠? 이런 우리에게는 조금 익숙한 마무리로 영화는 끝나게 됩니다.

그래서 한 사람의 영웅적인 면모가 이룬 결말을 보노라면, 이 세상은 사실 더 암울해보입니다. 이런 메시야적 인물이 없다면 해결되지 않을 문제로만 가득한 것일 수 있기 때문이죠. 어떻게보면 이런 결말은 나이브한 엔딩일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보다 구체적인 해결책을 주기보다는 한 사람의 영웅적인 서사에만 의지해 이야기를 전개해나가는 것으로 일면 보이기 때문이죠. 영화는 초반부터 계속해서 나우시카의 특출함, 다른 사람과 달리 곤충을 이해하고 부해의 진정한 역할을 이해하는 인물로 그려내고 이야기를 끌고 갑니다.

나우시카의 이러한 결말로 마무리되는 메시지는 이후 지브리의 모노노케 히메에서 좀 더 발전된 이야기의 모습을 띄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모노노케 히메를 더 많은 분들이 보셨을 것 같아요. 나우시카는 처음 작품이기도 했고, 모노노케 히메는 보다 한국에서 흥행하고 한때 나름대로 유행이었던 영화기도 했으니까요. 짧게 언급하자면 모노노케 히메는 자연을 파괴하려는 인간과 자연의 대결이 인간과 동물의 대결로 대표해 그려낸 영화입니다. 그리고 그 대결을 바라보는 다양한 시각들이 등장하죠. 또, 자연을 파괴하려는 인간의 욕심이 어떻게 누군가에게는 재앙을 불러일으키는지를 다층적으로 잘 그려낸 영화이기도 하고요.

모노노케 히메에서는 결국 각자에게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에 대해 묻습니다. 분명한 악역이 그려지지 않거든요. 숲을 개발하려고 하는 마을 사람들을 탓하고자 하더라도, 그들을 마냥 비난할 수는 없습니다. 나병 환자들도 보호하고, 여자들도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나라입니다. 소외된 사람들이 더 풍족하게, 풍요롭게 살아가고자 애쓰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지죠.

그런 면에서 나우시카로 시작된 미야자키 하야오, 지브리의 이야기는 모노노케 히메에서 보다 다양한 메시지를 우리에게 전해준다고 생각합니다. 한 사람으로 대표되는 메시야적인 인물에 집중하기보다 좀 더 많은 입장의 이야기를 다양하게 그려내 우리에게 고민할 지점을 준다는 점에서 지브리가 주려는 그 메시지의 깊이가 깊어졌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는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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