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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포쟁이 뚱냥조커 Mar 08. 2020

유시민과 덴마라는 새해의 두 폐허와 역사의 두 천사2

벤야민의 사유 이미지를 덴마에서 수집하기

 




 5.

 

 앙겔루스 노부스라고 불리는 파울 클레의 그림이 있다. 그림에는 한 천사가 묘사되어 있는데, 그는 그가 응시하는 것에서 멀어지려는 것처럼 보인다. 그의 눈은 찢어져 있고, 그의 입은 열려 있으며 그의 날개는 펼쳐져 있다. 역사의 천사는 그러한 모습을 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그는 얼굴을 과거를 향해 돌린다. 사건들의 연쇄가 우리 앞에 나타나는 곳에서, 그는 폐허들로 뒤덮여 있으며 이 폐허들을 그의 발 밑에서 쌓아놓는 유일한 파국을 본다. 그는 그 자리에 머물러 죽은 자를 깨우고 파괴된 것들을 모으고 싶어한다. 그러나 천사의 날개를 사로잡은, 그가 날개를 닫을 수 없을 만큼 강한 폭풍이 천국으로부터 불어온다. 천사 앞에 있는 폐허의 더미가 하늘을 치솟을 정도로 쌓여가는 동안, 이 폭풍은 그의 등이 향하고 있는 미래로 그를 끝없이 몰아넣는다. 우리가 진보라고 부르는 것은 이러한 폭풍이다.

 -벤야민 역사의 개념에 관하여 중에서. 앙겔루스 노부스의 시선 22-23p 한상원 번역.

   

 파울 클레가 1920년에 그린 이 그림 앙겔루스 노부스, 새로운 천사를 벤야민은 뮌헨의 어느 갤러리에서 21년에 구입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서 그가 자살하기 직전에 남긴 최후의 글인 ‘역사의 개념에 관하여’에서 이 천사의 이미지에 대한 그의 고유한 사유, 시간관을 전개한다. 한상원의 설명에 따르면 이 새로운 천사는 진보라는 미래를 향해 부는 폭풍에 떠밀려서 ‘강제로’ 과거에서 미래로 운동하는 것이다. 이는 앞에서 말한 거룩한 천사가 인간을 신이 있는 영원한 미래로 인도하는 것과는 완전히 반대의 상황이다. 게다가 이렇게 미래로 떠밀리는 와중에서도 천사의 시선은 과거의 잔해를, 즉 과거 속에서 고통받고 억압받는 자들을 향해있다. 미래로 부는 진보라는 폭풍은 과거로부터 떠나가라고 천사를 압박하지만 천사는 이 폭풍의 망각하라는 압박에 저항하며 하나의 ‘망각의 탈압박’을 시도하고 있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분명 우리가 흔히 아는 천사와는 다른 새로운 천사다. 과거의 불의와 수난으로 인해 희생된 자들을 그저 잊고 미래를 위해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기억하며 추모하며 이 지옥같이 반복되는 현재를 중단시키기 위한 희망의 불꽃으로 삼는 과업이 바로 벤야민이 말하는 역사가의 일이다. 어떤 이는 이에 대해서 삼풍백화점이나 세월호 참사같은 과거의 비극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것이 아니냐고, 이제 그들을 놓아주고 마음에 묻어주는게 그들과 당사자들을 위한 게 아니겠냐고 되묻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그 질문은 마치 지금의 ‘역사와 현실‘이 과거의 비극을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않고 있다는 듯 현실을 은폐하려고 한다.

 올해 초 경향신문에서 이슈로 제기한 것과 같이, 한국은 하루에 세 명 씩 산업재해로 죽고 있지만 이에 대해선 당사자 가족 정도가 아니고선 모두들 망각하고 관심을 두려고도 하지 않는다. 게다가 다들 알다시피 한국은 자살자가 oecd국가중 1위를 다투는 나라지만 언젠가부터 자살은 정말 극적인, 속된말로 팔리는 스토리가 아니고선 뉴스에서 아에 다뤄지지도 않는다. 어쩌면 바로 이렇게 망각되는 과거에 대해서 저항하고 과거를 제대로 기억하고 재구성하기 위해서 역사가의 기억 투쟁과 수집 투쟁이 필요하다고, 기자 역사가 학자같은 지식-권력을 독점한 전문가만이 아니라 대중이 누구나 수집가, 역사가가 되어야 하고 진보라는 미래로 부는 폭풍에 맞서서, 자본주의 또는 경제성장이라는 폭주하는 열차의 비상 브레이크를 당겨야 한다고 벤야민은 말한 게 아닐까.

 

 6.

 흔히 독서란 책에 쓰여진 것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라고 다들 생각하지만, 벤야민은 앞서 말한 새로운 천사에 대한 사유처럼 반대로 생각했다. 독서란 바로 쓰여지지 않은 것을 이해하는 것이라고. 이는 흔히 말하는 행간을 읽어내는 좀더 수준높은 독서 뿐만이 아니라, 과거를 망각하려는 폭풍에 천사가 저항하듯 텍스트 안에서 억압되고 고통받으며 망각된 것들을 읽어내는 시선의 중요성에 대해서 말한 것은 아닐까. 기존의 역사 교과서에서 광개토대왕이 만주를 정복했다 같은 무슨 왕이 무슨 업적을 이뤄냈다는 그 기록 속에서 누가 희생되었는지 누가 망각되었는지는 결코 교과서의 글자 속에서 말해주지 않는다. 그런 고대사가 아닌 최근의 현대사를 따져보더라도 매우 대표적인 사례가 있지 않던가. 박정희가 경제개발 5개년 계획으로 가난을 극복했다고 흔히 가르쳐왔지만 그 경제개발 속에 얼마나 많은 소년공, 여공들의 피땀어린 희생이 망각되었는지 우리는 여전히 알지 못한다. 오히려 그런게 뭐가 그렇게 중요하냐고, 너도 지금보다 더 잘살아야 되지 않겠냐고, 한병철의 피로사회에서 하는 말처럼 더더욱 자기를 위해서 지금의 자신을 스스로 착취하라고 이른바 노오력하라는 지상명령에 시달린다.  

 이렇게 스스로를 사람이라기보다는 ‘인적 자원’으로 여기고 더 높은 연봉, 더 안전하고 더 행복한 미래라는 꿈을 향해 폭주하는 기관차처럼 달려가는 대다수 한국인들은 IMF 사태이후 지난 20년간 정말 끝없이 자기 계발을 하고 끝없이 노력하고 끝없이 힐링을 원한 끝에, 피폐해졌다. 지하철을 타든 버스를 타든 광장이나 거리로 나가든 삶의 기쁨으로 충만하고 행복해보이는 한국인의 얼굴을 찾아내기란 남녀노소 나이불문하고 스피노자가 에티카 마지막에서 영원한 행복에 대해서 말했듯이 참으로 드물고 어려운 일이다. 좀 과격하게 말하자면 지금 시대를 사는 대다수 사람들의 마음은 나 뿐만이 아니라 대다수가 이미 폐허나 다름없다. 이성복 시인이 이미 30년도 더 전에 ‘그 날’ 시에서 말한 구절을 패러디해보자면, 모두가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고, 안 아픈 척 건강한 척 행복한 척만 하고 있느라 더욱 병들고 있는 게 엄혹한 한국인들의, 어쩌면 21세기 전지구적 자본주의를 살고 있는 전세계인들의 내적 폐허나 다름없는 현실이 아닐까. 그래서 이 폐허가 된 마음에 새로운 신앙이, 종교가 침투한다.

 그리고 폐허란 기본적으로 더 이상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는, 내버려진 공간이다. 글의 앞부분에서 말한 백분토론 영상의 댓글이든 엉망으로 끝난 웹툰 덴마의 댓글이든, 그리고 서로에 대해 무관심한 태도가 삶의 최선이라 믿고 옆집 사람이 고독사해도 세달이 넘게 아무도 모르는 현대인들의 마음이든, 바로 이 폐허라는 말과 그리 멀리 떨어져 있다고 보기는 힘들 듯하다. 하지만 나는 한상원이 벤야민을 읽으며 아우구스티누스와 파울 클레라는 역사의 두 천사의 이미지를 상반된 것으로 날카롭게 구분했듯이, 유시민과 진중권의 토론같지 않은 토론과 완결없는 완결 웹툰 덴마라는 두 폐허의 이미지도 구분해서 다르게 접근하는 흉내를, 내버려진 폐허들에서 잔해를 줍는 수집가의 태도를 이 연재글을 통해서 모방해보려 한다. 어쩌면 유시민과 진중권이라는 한때 진보의 대중적 상징에 대해서도 어떤 이는 이미 조용히 차곡차곡 묘비를 새길 준비작업으로 산책과 수집을 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니 그들의 오랜 인기와 상당한 팬덤으로 볼 때 그건 재벌 걱정 만큼이나 쓸데없는 걱정일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나는 그쪽 걱정은 할 필요 없이 내가 사랑했던 폐허인 웹툰 덴마에 대해서 다시금 산책하고 수집해서 기억을 재구성해본다면 그 과정 자체가 의미가 있지 않을까. 벤야민이 남긴 유산, 사유-이미지라는 개념의 힌트에 근거해서 말이다.

 

 7.

 

 -벤야민은 사유가 이미지와 만나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미지가 가진 구체성, 즉 실제 생활들, 눈에 보이는 것들, 만지고 있는 것들, 바로 그것들을 동원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합니다. 그는 사유 이미지가 학문이나 철학의 영역을 외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 삶 속에서 행사되어야 하고 피를 얻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시각적 자유, 사유 이미지, 이미지 사유이자 변증법적 이미지입니다. 메트로폴리스, 대도시에서는 이러한 이미지 사유가 구체적으로 총체화되어 나타납니다. 메트로폴리스는 근대성의 자유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자본주의인데, 그 경제 논리가 아무리 첨예하고 정확하다고 하더라도 구체적 육체성을 가지지는 못합니다. 우리는 육체성을 담지하고 있을 때에만 근본적으로 행동으로 옮겨갈 수 있습니다.

 -고 김진영 선생님의 희망은 과거에서 온다 310p 중에서 인용.

 

 분명 벤야민이 그렇게 강조한 대로 미래를 위해서 과거를 망각하라는 폭풍에 저항하며 고통받고 희생당한 자들의 과거를 기억하려는 과업은 고귀하고 가치있는 일이다. 허나 그러한 사유가 단지 사유로만 그친다면 육체를 정신의 감옥으로 보던 플라톤 시절과 그다지 큰 차이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위의 인용에서 김진영 선생님이 말씀하시듯, 사유 이미지라는 개념을 통해 사진같은 새로운 기술을 다뤄서 매체 철학의 선구자로 평가받기도 하는 벤야민은 바로 그런 한계에서 벗어난다. 이미지가 가진 구체성, 구체적 삶 속에서 사유가 행사되어야만 그 사유에 피가 돌고 살이 된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시대에 사유가 이미지와 만나서 구체적으로 활동하는 변증법적인 이미지의 대표적 사례는 바로 수많은 터치를 통해 스마트폰으로 감상하고 터치로 나의 감상과 사유를 댓글로 남길수 있으며 심지어 음악이나 영화와는 달리 수월하게 일상속에서 2차 창작을 할 수 있는 웹툰이 아닐까.

 그 수많은 웹툰 중에서도 분명 미래 우주적인 스페이스 오페라의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내용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누가 보아도 비극적인 현대인과 현대 도시문명에 대한 풍자로 가득한 양영순의 덴마가, 벤야민이 말한 구체성을 가진 사유 이미지의 매우 적절한 사례가 아닐까 나는 감히 이 연재글을 통해 해석하고 기억해보려 한다. 물론 양영순이 딱히 벤야민을 읽었거나 벤야민의 철학을 자기 작품 속에서 녹여내거나 외부화하려고 하진 않았을 것이다. 허나 이전 문단에서 벤야민이 말했듯이, 독서란 바로 쓰여지지 않은 것을 읽어내는 일이 아니겠는가. 다음 달부터 매달 한편씩 덴마 에피소드와 벤야민의 역사철학을 연결짓는 시도를 주로 한상원과 김진영을 참고하면서 기록으로 남겨보려고 한다.     

 

1.덴마 만드라고라 에피소드와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난이라는 행복

 -도피한 삶에서 즐거움은, 행복은 있을 수 있는가?

 

2.덴마 야엘 로드 에피소드와 맑스의 해방서사라는 혁명.

 -해방된 미래가 약속되어 있다면 혁명은 더 추진력이 붙는가?

 

3.덴마 더 나이트 에피소드와 벤야민의 반복되는 현재를 중단시키는 지금시간.

 -도저히 탈출구가 보이지 않는 끔찍한 현재의 반복을 멈추는 힘은, 희망은 어디서 오는가?

 

이 세 편의 연재글을 통해서 천천히 이야기 할 테지만, 조금 성급한 사람들을 위해서 미리 연재글의 결론을 스포일러 하자면, 두 책의 제목을 패러디해서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듯하다...

 

어쩌면 희망은 과거에서, 앙겔루스 노부스-새로운 천사의 시선을 통해서 온다...


계속...





본 글은 한국철학사상연구회의 시대와 철학 웹진에도 연재될 예정입니다.


다음 주에는 다시 만화로 철학읽기 만드라고라 편이 올라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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