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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포쟁이 뚱냥조커 Mar 01. 2020

유시민과 덴마라는 새해의 두 폐허와 역사의 두 천사1

앙겔루스 노부스의 시선과 덴마에 대한 진지한 소고

벤야민과 만화-폐허 산책하기 1편 서론.

  -유시민/진중권과 웹툰-덴마라는 새해의 두 폐허와, 역사의 두 천사


                             -2020.02.29 뚱냥조커 이상하  

 

 1.

 누구나 1월 1일 새해엔 또 좋은 일이 있을 거라 믿으면서 해피 뉴이어를 외치고 새해의 소원을 빈다는 신성한 제의를 행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2020년이라는 나름 기념비적인 새해가 찾아온지도 벌써 두 달이 지나가고 있고, 이젠 운동이든 공부든 무엇이든 새해 소원 또는 결심이 다소 흐트러지거나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을 즈음이다. 하지만 나는 올해에 새해 소원이 무너지거나 포기할 일 자체가 없었다. 내가 마음을 굳건히 먹고 소원을 온몸으로 실천해서가 아니라, 새해 첫날부터 황량한 두 폐허를 목격하게 되면서 새해에 대한 희망이나 소원 자체를 가지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자칫 올해도 소원따위 마음먹고 기대해봐야 마음만 다치고 작년과 비슷한 뻔한 반복이 되는 건 아닐까 하는, 그런 공포심리가 악몽같이 나를 짓누른 것이다.

 이렇게나 나의 마음을 피폐하게 만든 새해 첫날의 두 폐허란, 첫 번째로 새해기념 백분토론이었다. 유시민과 진중권은 한때 나뿐만이 아니라 스스로 진보를 자처하고 실천하려는 상당수 사람들의 아이콘, 아니 더 과격히 말해서 진보적 시민들의 아이돌이었다. 유시민의 책 거꾸로 보는 세계사나 진중권의 미학 오딧세이를 어린 시절에 읽고서 세상을 기존 시점과 좀 다르게 봐야겠다는 마음을 품기 시작한 사람이 이 한국에서 수십만명 이상일 것이고, 그 사람들은 지속적으로 독서 시장에서도 유시민과 진중권의 신간을 소비해 왔다. 허나 한때 같은 진보정당에 소속되어 노유진의 정치카페같은 인기 팟캐스트를 진행하기도 했던 이 대중 지식인들은, 작년 조국 사태에서부터 완전히 갈라졌다. 물론 여기까지는 수많은 운동과 진보의 역사에서 보면 그리 특별한 일은 아니다. 같은 정당이어도 정파는 다를 수 있고 추구하는 노선은 당연히 더더욱 다를 수 있으니까. 분열은 어쩌면 진보가 살아있다는 증거라고도 볼 수 있기에.

 허나 이 유시민/진중권의 갈등이 극에 달해 폭발한 새해 백분토론은 이 둘의 갈등이 진보 운동의 노선차이나 목표하는 이상의 차이와는 다른 것이라는 것을 명백히 드러냈다. 한 때 자기 소속 정당의 보수성에 비판과 쓴소리를 아끼지 않았고, 국회에 정장이 아닌 청바지를 입고 입장하는 파격으로 신선했었던 정치인 유시민은 이제 죽었고, 남은 건 오로지 노무현-문재인 계파의 돌격대장 또는 대변인으로서 자기 편에 불리한 건에 대해선 침묵하거나 감추기 급급하고 자기 외의 다른 편은 다 나쁜 놈이라는 진영논리의 함정에 빠져버린, 자기 자신의 표현대로 그야말로 어용 지식인의 한계를 유시민은 낱낱이 보여줬다. 진중권 또한 10년 전에는 영화 디워에 대한 비평 논란이나 황우석의 거짓 논문에 대한 폭로 국면에서 수많은 국민이 자신을 비난하더라도 결코 물러서지 않고 자신의 비판적 입장을 지속하는, 사르트르가 말한 ‘자신의 일이 아닌 일에도 옳지 않다며 참견하는 지식인’다운 일기당천의 모습을 보여준 바 있다. 하지만 이 새해기념 백분토론에서 보여준 진중권의 모습은, 교수라는 직위와 기득권을 억울하게 빼앗겼다면서 자신을 비판한 대중을 그저 스스로 생각을 못하는 홍위병으로 몰아붙이고 비하하는 엘리트주의자의 실망스런 모습이었다. 심지어 토론 도중에 상대방 말 끊기를 하는 등 기본적인 매너에서도 최악인, 그야말로 이게 토론인가 싶은 황량한 폐허를 새해 첫날부터 목격해버렸다. 그리고 이 첫 번째 폐허에서 난 평소 안식 또는 구원으로 여겨온 만화의 세계로 도피하려 했으나, 곧이어 네이버 웹툰에서도 또 하나의 망한 댓글의 잔해로 가득한 폐허를 보았다. 바로 10년간의 연재 끝에 완결없이 완결나버린 양영순의 웹툰 덴마에 대한 이야기다.         

 

 2.

 나의 이 두 폐허라는 감상에 대해서 의문을 표하는 분들도 있을 듯하다. 유시민과 진중권이라면 한떄나마 한국의 진보, 대중적 지식인의 아이콘이라 할 수도 있겠지만, 양영순과 덴마가 무슨 한국의 문화 예술계의 상징은 커녕 만화계의 대표라고 말할 정도의 위상인가? 90년대 한국에서 서태지를 문화대통령이라 대중과 언론에서 호명하고, 00년대 원더걸스와 소녀시대가 걸그룹 춘추전국의 시대를 연 것과 같은, 양영순이 만화 쪽에서 그런 문화적 영향력과 대표성을 가진 적이 있었던가? 물론 양영순의 덴마는 단 한번도 네이버 요일웹툰 안에서도 1위를 한 적도 없고 단행본이나 신문연재 부수로 무슨 붉은매처럼 백만권을 판 전적도 없다. 허나 유시민과 진중권 또한 이 보수적인 한국 정치판에서, 최장집의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책에서 말하듯 국가의 기원부터 오른쪽으로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진보’의 대중적 상징으로 성장하고 널리 활용되었듯이, 양영순도 데뷔작인 성인만화 누들누드부터 최근의 스페이스 오페라 덴마까지 마이너하고 파격적인 만화 분야에서 하나의 상징으로 기억될 수도 있지 않을까.

 더 강하게 말해본다면, 나는 양영순이 일본 만화체의 아류 또는 표절작이거나 한번 보면 두 번 다시 볼 생각이 안 드는 진부한 학원물로 차고 넘치는 이 한국 만화-웹툰계에서, 스타워즈 시리즈같이 스페이스 오페라라는 마이너 장르로 무려 10년의 장기연재를 해온 양영순에게 무조건적인 지지와 응원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왔다. 방탄소년단에게 팬덤 아미가 있듯이, 나는 열성적인 양영순의 팬덤, 이른바 ‘덴경대’란 이름의 열성적 독자 중 한명이었다. 덴마 작중에 등장하는 ‘백경대’라는 일종의 중세 유럽 영주의 기사같은 경호원 집단을 패러디한 ‘덴경대’ 독자들은, 양영순 작가의 연재 지각이 계속되자 독자들 스스로 웹툰이 업로드되면 즉시 알려주는 덴경대 어플을 만들기도 하고, 연재 말기에 작가가 그리기 어려운 단체전투 액션 씬을 스킵해버리자 자신들이 직접 액션신을 그려서 팬사이트에 올리기도 하는 등 단순한 소비자가 아닌 생비자prosumer 개념으로 진화하여 2차 창작을 즐기는 충성스런 독자들이었다.

 한국에서 보기 드물게도 웹툰계에서 일종의 컬트 집단이 된 덴경대는 괜히 다른 웹툰 댓글에 가서 이런 수준낮은 만화말고 깊이있는 양영순의 덴마를 보라고 무리한 영업을 하는 등 흔한 팬덤의 부작용도 있었지만, 마치 BTS의 팬덤 아미가 단순 소비자가 아니라 2차 창작을 통해 방탄소년단의 음악과 메시지를 전세계에 공유하고 전파하듯, 분명 한국의 웹툰 소비자들이 진화하고 있다는 명확한 풍경 중 하나였다. 하지만 양영순의 무리한 스토리 진행 및 그동안 깔아둔 수많은 떡밥, 복선에 대한 아무런 수습도 없는 무책임한 완결 덕분에 이 수많은 충성스런 팬덤 백경대는 완전히 극한의 안티로 돌아서게 되었고, 이제 덴마의 댓글란은 그야말로 엉망진창, 댓망진창으로 가득하여 하나의 거대한 폐허더미가 되고 있다. 이 또한 단순히 마음에 들지 않는 상품에 대해서 그저 무시하거나 소비를 중단하는 것이 아닌, 더 적극적으로 소비파업, 불매 운동을 펼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추락하는 것에는 날개가 있다고 한 어떤 소설 제목처럼, 양영순과 덴마는 독자들에게 하나의 ‘물신’처럼 여겨지며 함부로 비판해서는 안될 정도로 고평가되었던 만큼 퇴락도 끝이 없는 무저갱처럼 지하의 지하로 떨어졌다.       

 

 3.

 지금 시대에 그다지 좋지 않은 비유일 수 있지만, 나에게 이 두 폐허의 풍경은 마치 한때 너무나 사랑했던 첫사랑을 사창가에서 스치듯 다시 만난 듯한 충격이었다. 하지만 이것이 과연 단순히 양영순 혼자만의 과실일까. 물론 양영순은 무책임한 작가로서 자신을 믿어준 독자들에게 백번 사죄해야 마땅하지만, 나는 이것이 단순히 개인의 문제라 생각하지 않는다. 덴마의 이 형편없는 폐허같은 완결은 현재 네이버 웹툰을 비롯한 퇴락하고 있는 한국 웹툰계의 상태에 대한 하나의 징후 또는 증상이 아닐까. 더 이상 신선하면서도 깊이있는 신작이 나오지 않기에 그저 수익을 위해서 기존의 인기작가를 휴재 후 미리보기 유료연재를 하라고 쥐어짜거나, ‘신과 함께’나 ‘치즈 인 더 트랩’ 같은 예전에 인기있던 명작을 재연재하는 네이버웹툰. 이는 덩치만 공룡같이 커지고 전세계로 수출중이라 자랑하는 이 한국 웹툰계가 내부적으로 매우 부실해졌다는 상징적인 증상이 아닐까. 나는 의심해본다. 그리고 이것이 과연 웹툰계만의 일인가. 거꾸로 생각해보게 된다. 영화나 음악 같은 문화 계열뿐만이 아니라 한국 경제와 정치야말로 새천년의 지난 20년간 과연 무엇이 새로웠던가. 계속 재탕에 삼탕은 아니었나.

 노무현이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갔다고 씁쓸하게 말한 이후, 부동산 토건귀족과 재벌 대기업 위주의 한국경제는 정말이지 구조적으로 전혀 변하지 않았고, 한국의 정치 또한 지역주의 정서와 구도는 여전하고 정치인-국회의원을 나를 잘먹고 잘살게 해주는 일종의 먹고사니즘 메시아로 보는 분위기가 팽배하다. 한국이라는 총체적 폐허 속에서 상념에 잠기다가 이쯤 되면 니체의 철학 개념중 하나인 영원회귀에 대한 가장 비관적이고 악몽스러운 해석이 떠오른다. 수십만년이 지나도 이 세계는 눈꼽만큼도 변하지 않고 그저 어제와 같은 오늘이 내일도 영원히 반복될 것이라는, 삶이란 그저 반복일 뿐이고 어떠한 노력도 실천도 아무런 의미가 없고 미래를 바꾸지 못한다는 극한의 허무주의적 해석이 나를 새해 첫날부터 악몽처럼 짓눌렀다.

 그래서 나는 이 반복되는 악몽으로부터 또 한번 도피했다. 새해 정치 토론쇼에서 나의 위안이자 구원이었던 만화의 세계로 도피했듯이, 또다른 구원이었던 도서관, 독서의 세계로. 그 와중에 우연찮게도 새해의 첫 독서로 독일의 철학자 벤야민의 유언장이자 역사철학이 담겨있는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 등 몇권을 읽었다. 물론 번역이 되어있음에도 그 내용은 결코 해석해보기가 쉽지 않았고, 그렇기에 두 권의 해설서를 같이 읽게 되었다. 김진영 선생님의 ‘희망은 과거에서 온다’ 와 한상원 선생님의 ‘앙겔루스 노부스의 시선’ 이 두 권의 해설서를 통해 벤야민 속을 이리저리 산책하고 방황하면서, 나는 그저 망해버린 폐허라고 생각했던 새해 첫날의 두 풍경이, 그저 폐허나 악몽인 것만은 아닐 수 있다고 다시금 생각해보게 되었다. 이것이 이 글이 시작된 씁쓸하지만 희망적인, 매우 개인적 감상이 많이 첨가된 서론, 첫 시발점이다.    

 

 4.

 

 역사의 시간은 어디로,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가.

 근거없는 천박한 낙관주의와 공허하고 무책임한 허무주의를 넘어,

 미래의 구원(희망)이라는 이름으로 과거를 정당화하고

 망각하려는 시도들에 맞서 망각에 저항하고 과거를 기억함으로써

 미래로 ‘도약’하려는 ‘몫 없는 자들’의 서사를 재구성하려는

 역사철학의 가능성은 어디에서부터 찾아질 수 있는가.

  -한상원 저 ‘앙겔루스 노부스의 시선’ 뒷표지 중에서.

 

 “역사가는 과거로부터 희망의 불꽃을 가져와 점화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입니다. 우리가 빼앗긴 전통을 회복하고 새로운 미래를 만드기 위해서는 미래의 내 아이들의 얼굴이 아니라 과거의 우리 아버지들과 어머니들의 얼굴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김진영 저 ‘희망은 과거에서 온다’ 뒷표지 중에서.

 

 벤야민같은 특유의 통찰력과 흡입력있는 문장력, 게다가 드라마틱한 인생여정의 스토리텔링으로 인해 인기많은 스타 철학자에겐 번역서 못지않게 한국의 해설서도 수십 권이 나와 있지만, 그 중에서도 이 두 권을 고르게 된 것은 이 뒷표지의 문구 덕분이다. 누구나 연말에는 자신을 자책하며 이제 과거는 잊자고 다짐하고, 연초 새해에는 미래엔 새로운 좋은 일이 있을거라고 쉽게 기대한다. 하지만 새해 첫날에 이제 뭔가 좋은 기대를 품으려고 하자마자 내가 보게 된 것은 한때 내가 10년 전부터 오래 아끼고 사랑했던 것이 몰락한 두 거대한 폐허였고, 난 그것들을 이젠 떠나보내고 잊어야하나 스스로를 책망하며 크나큰 실망으로 가득찬 1월을 보냈다. 허나 그건 한상원이 꼬집듯이 근거없고 천박한 낙관주의와 무책임한 허무주의라는 미래에 대한 두 극단을 내가 겨우 24시간만에 왔다갔다 했을 뿐인지도 모른다. 진정 미래로 도약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미래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과거를 그저 망각하는 것이 아니라 벤야민을 따라서 망각에 저항하는 회상의 기억 투쟁이 필요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바로 미래가 아니라 과거의 폐허 속에 우리가 잊고 살았던 희망의 불꽃이 잠재되어 있을지도 모르기에.

 한상원은 이렇게 역사철학이라는 과거의 기억으로부터 희망을 불러오기 위해 앙겔루스 노부스의 시선 책의 서문격인 ‘들어가며’ 에서 ‘역사의 두 천사’를 불러온다. 한 천사는 우리가 흔히 아는 불사의 존재이며 신과 인간을 매개하는, 아우구스티누스가 신국론에서 묘사한 ‘거룩한 천사들’이다. 세속 국가에서 살고 있는 인간은 언젠가 신의 왕국에 들어가기 위해서 영원한 미래를 향하는 거룩한 천사의 시선을 따라 현재의 고통과 수난을 끝없이 감내해야만 한다.  왜? 이 고통과 수난들은 신의 왕국이 지상에 도래하는 최후의 순간, 종말의 순간이 오면 모두 보상받거나 가혹한 심판을 받을 것이기에.

 한번 지나간 사건은 다시는 역사 속에서 반복되지 않고 오로지 미래를 향해서 직선적으로 운동하는 이 기독교적 종말론의 시간관은, 천년 전의 아우구스티누스가 정립해놓은 역사의 원칙이지만 2020년을 살고 있는 지금의 우리들에게도 결코 낯설지 않은, 오히려 굉장히 친숙한 관점이다. 좋은 대학에 가야하니까 힘든 지금의 수험생활을 참아야하고, 좋은 직장에 가야 하니까 사랑도 취미도 접어둔 채 취업에 올인해야만 하고, 미래에 내 집 마련의 꿈을 위해 저축과 대출을 하고 뼈빠지게 수십년간 대출금을 갚아야 하는 대다수 한국인들의 시간에 대한 관점은 아우구스티누스와 매우 흡사하다. 그리고 딱 백년 전 1920년에 그려진 또 하나의 새로운 천사, 앙겔루스 노부스와 그에 대한 벤야민의 해석은, 오히려 천년 전 아우구스티누스의 관점보다 훨씬 지금의 우리들에게 낯설고 신선하며, 또한 두렵게도 느껴진다.




...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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