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샷의 철학 철학의 스샷 9 아즈마의 느슨 철학 i
그럼 죽어! 라는 무섭지만 웃기는 이 짤방
오래걸리고 지루하고 쓸데없는 설득이나 논쟁 대신 "그럼 죽어"라고 끝내는 밈이 올해 초에 한국 인터넷을 휩쓸었다. 물론 다들 알다시피 우리는 더이상 설득, 논쟁으로 타인을 바꾸기란 불가능에 가까운 21세기 탈진실의 세계를 살고 있다.
북한이 개입한 부정선거라든지 중국인이 제주도를 다 샀다는 황당한 음모론을 단체로 믿는 자들이 수백만 단위로 메뚜기떼처럼 인터넷의 광야를 먹어치운다. 그리고 이러한 극단적 정치를 신봉하는 자들을 포퓰리스트, 인기 영합주의 정치인들이 지지하고 대표하기도 한다. 과연 이들을 상대로 공론장이니 숙의 민주주의니 뭐니 하는 세련된 언어들이 공허하지 않을 수 있을까.
물론 이러한 탈진실이나 반지성주의적 포퓰리즘의 사례는 꼭 21세기 최근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아즈마 히로키 아재는 고대 그리스의 플라톤 전집을 다시 읽으면서 소크라테스의 죽음 에피소드에서 포퓰리즘에 대해서 사유한다. 인류 최고의 지성 중 하나라고 극찬받는 소크라테스인데 그는 아테네 민회에서 민주적으로 사형을 받는다.
서양 유럽 철학의 절반은 플라톤, 다른 절반은 기독교라는 언명은 과감하지만 꽤나 거부하기 힘든 마치 수학의 공식같다. 바로 그 플라톤이 스승으로 모셨지만 스승의 죽음을 집단적으로 승인한 충격적인 아테네의 민회에 대해 20대의 플라톤이 분노하지 않을 리가 없다. 아즈마 아재도 분명히 20대 학부생 시절에도 읽었을 테지만 20년 지나 40대에 읽으니 또 다르게 읽히는 고전의 감칠맛.
고대 기원전 5세기에 아테네는 노예제 경제 위에서 민주 정치제도와 풍요한 그리스 문화를 이루었다는 설명은 세간의 상식이다. 그런데 큰 전쟁 이후 사회가 혼란에 휩싸이자 소크라테스는 독재자가 아닌 시민들의 재판으로 사형을 받는다.
특별히 명백한 죄목도 없이 너는 뭔가 믿기지 않는 말을 한다 너는 대중의 분위기와 다른 요상한 말로 젊은이들을 선동한다 그러니 사형! 등의 감정의 폭주가 넘실거리는 아테네의 민주 법정. 이는 현대의 인터넷 sns에서 벌어지는 범인 몰기와 조리돌림의 현장과 하나도 다를 바가 없지 않은가
이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지극히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변론으로 끝까지 맞서지만, 논리적으로 자신이 사형을 받을 것이라 이미 알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소크라테스가 악법도 법이다 라는 말을 남겼다고 하나 이는 일본 한 작가의 일방적 주장을 한국에 무분별하게 잘못 수입된 소문이라는 게 21세기 들어 번복되었다는 것도 유명하니 이 또한 반지성주의적 포퓰리즘의 실패 사례가 아닐까.
대화와 이성과 설득보다는 "그럼 죽어!" 라는 반지성주의적 결단이 효율적이라고 믿고 심지어 다들 재밌고 공감되지 않냐고 낄낄대며 소비하는 현대인의 현실은 하버마스 같은 철학자가 말하는 공론장의 이상과 참으로 멀어 보인다. 그럼에도 물론 이성적인 접근과 설득은 여전히 필요하다. 그러면 대체 어떻게?
플라톤의 국가론은 그러한 논리적인 소크라테스의 죽음에 대한 고찰에서부터 시작한다. 잘 훈련된 철인이 폴리스를 지배해야 한다는 그는 명백히 엘리트주의자고 민주주의 혐오에 매우 가깝기에 그의 논의를 21세기에 그대로 받아쓰기하는 것은 물론 공자왈 맹자왈하는 것만큼이나 의미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인간은 논리적이지 않고 대화를 쌓아간다고 해서 저절로 사회 정의가 실현되지 않는다는 수천 년 간의 인간 사회의 현실을 반드시 인정하고 수용해야만 한다. 아즈마 아재 말처럼 모든 정치와 철학은 이를 전제로 해서 시작해야만 한다. 그렇지만 또 쉽게쉽게 지적 냉소주의나 반지성주의의 유혹에 빠져들거나 포기하지 않기 위해서는, 이전 글에서 언급했듯이 위대한 한 명의 천재나 철학자가 아니라 흔하고 평범하지만 글을 좋아하는 수만명의 관객 독자가 중요한 건 아닐까. 한 인디언의 격언처럼, 우리가 바로 우리가 기다리단 그 사람들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