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군은 왜 21세기에도 매력적인가
21세기 군주론. / 20260124 이상하
-Fate zero 10년 만의 2정주행 후기
왕관은 유령
심장을 찌른 군세
유령의 무게
무려 10년도 더 전에 본 애니메이션을 또 본다는 건 꽤 큰 결단을 요구한다. 총 25화. 러닝타임만 10시간에 가까운 장편 애니 시리즈를 굳이 또?
페이트 제로는 여러 면에서 그러한 우려와 의구심을 단 1화 만에 해소해주는 명작이다. 일단 제작사인 유포터블이 지금은 귀멸의 칼날 제작으로 유명하지만 그들이 처음에 양지로 부상하게 된 것은 바로 이 미려한 작화와 연출의 페이트 제로. 그들이 제로를 만들고 블루레이를 무려 5만장이나 팔아서 그 해의 최고 애니로 꼽히는 승자가 되었다는 것. 그리고 사실 나는 20년 전에 페이트 스테이나이트 원작 게임을 했었기에 이 ip의 워낙 탄탄한 스토리와 연출이 시간이 지나도 별로 빛바래는 일 없이 오히려 고전의 반열에 들어가기 직전급이 아닌가 하는 감탄.
브리튼의 아서왕, 마케도니아의 이스칸달 즉 알렉산더 대왕, 인류 최초의 서사시인 바빌로니아의 영웅왕 길가메시 등이 나오며 모든 소원을 들어주는 성배를 차지하려 싸우는 이 애니는, 10년 전에는 그저 와 화려하고 재밌다 둘이 싸우면 대체 누가 이길까 정도의 감상으로 봤었다. 하지만 네이버 치지직에서 2주간 제공하는 같이보기로 여러 스트리머와 같이 정주행을 한 이후, 특히 11화나 23화의 알렉산더 대왕의 멋진 연출에 스트리머와 시청자들이 열광하는 공통적인 흐름에 나는 근본적인 의문에 휩싸였다.
"중세 군주의 시대는 끝난 지 오래인데 왜 여전히 사람들은 왕을 갈구하고 신하를 자처하는가"
왜 사람들은 마치 자신들의 해방을 원하는 듯이 자신들이 예속되기를 자처하는가?
라는 의문을 스피노자는 이미 17세기에 암스테르담에서 제기한 적 있다. 어쩌면 작중 내에서 공정하고 정의로운 치세를 주창하고 희생적인 왕 아서 팬드래건, 아서왕이 현대의 이상적인 통치자에 더 부합하는 면이 많지만... 여전히 그보다는 왕이란 누구보다 치열하게 삶으로써 모두를 매료시키고 그럼으로써 모든 신민의 뜻을 아우르는 존재라고 역설하는 알렉산더 대왕의 강력한 카리스마. 21세기에도 우리는 그 폭군 또는 독재군주의 말에 강력한 매혹을 느낀다.
니체의 말처럼 신은 죽었지만,
신앙은 사라지지 않는다...
하다못해 나귀라도 숭배하려는 그 마음들
이 간극을 정확히 짚어내고 제대로 해결하려는 문제의식이 없는 한, 아마 현대 정치는 여전히 17세기의 마키아벨리나 스피노자의 논의에서 더 나아가지 못하는 게 아닐까... 아니면 이 폭군이나 독재자의 매력은 이론적으로 정치나 철학이 해결할 수 없는 무한의 악 딜레마일까. 여러 고민이 드는 1월의 밤이다... 이번 목요일까지 치지직에서 무료공개니까 관심있는 분은 정주행 츄라이.
왕관은 이제 유령같이 박물관에만 있지만
모두가 왕의 권위를 탐내는 시대
독재자나 친위쿠데타의 망령이 지구를 배회한다
왕관이란 유령은 여전히 악몽같이 우리의 머리 위를 짓누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