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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미 Mar 22. 2021

미리 읽은 아빠 일기

아빠를 사랑하는 딸내미가 읽고 쓰다

지난 2월, 의정부 큰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줄곧 의정부에 사셨던 의정부 큰아버지는 칠 남매 늦둥이 막내인 아빠의 가장 큰 형이었고, 늦둥이 막내의 막내인 내게는 할아버지 같은 분이셨다.

큰아버지의 뜻에 따라 장례는 한적한 숲속에서 수목장으로 치러졌다. 비 예보가 무색할 만큼 햇살이 내리쬐던 날. 중풍으로 내리 9년을 누워 계셨던 큰아버지의 마지막 길에는 모두 고개 숙여 작게 훌쩍일 뿐 큰 소리를 내는 사람은 없었다. 두런두런 한참을 머물다 서로의 어깨를 다독이며 내려오는 길에서 나는 아빠의 뒷모습을 보았다. 늘 큰 사람이었던 아빠의 헐거워진 모습에 덜컥 겁이 났다.


재작년 즈음부터였나. 부모님의 형제들이 하나둘 사라지기 시작했던 때가.

늦둥이 두 사람이 만난 탓에 두 분의 형제를 조부모님으로 삼아왔던 나는 자주 슬펐고 혼란스러웠다. 해를 넘길수록 빠르게 늙어가는 부모님을 바라볼 때면 언제까지나 내 곁에 있어 줄 거라던 약속은 어느새 희끗해지고, 우리에게 남은 시간은 점차 선명해지는 것 같아 초조했다. 더 늦기 전에 뭐라도 남겨두고 싶었다.

그 무언가를 찾은 건 딱 그즈음이었다. 큰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고 돌아온 그날도 밤샘에 피곤했을 텐데 아빠는 어김없이 일기를 썼다. 밀려있는 하루들을 더듬거려 기록해두는 모습을 보며 문득 궁금해졌다.

‘내가 저 일기를 읽을 수 있을까?’

아빠의 일기들

20년 가까이 하루도 빠짐없이 써 내려간 아빠의 일기들, 아빠가 떠난 후 덩그러니 남겨진 기록들을 그때의 나는 과연 읽을 수 있을까? 분명 몇 장 넘기지도 못하고 울어버릴 것만 같았다. 그럼 미리 읽어본다면? 꼬리를 문 물음표들이 결론에 이르렀다.

훗날 아빠의 일기를 읽어보고 그때 그럴걸, 하고 후회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럴 거면 차라리 허락을 받고 지금 읽어본 후에 좀 더 친해진 아빠와 앞으로 얼마나 남았을지 모를 시간을 소중히 쓰고 싶어졌다. 아무리 자식이라지만 내밀한 이야기까지 써둔 일기를 달라고 요구하는 격인데도 막무가내 딸내미에게는 어쩐지 꽤 합리적인 생각 같았다. 그렇게 구정 연휴의 마지막 날, 본가를 나서기 전 아빠를 설득했다. 아빠의 일기를 보여 달라고. 나는 아빠를 더 알고 싶다고.


고백하자면 이미 여러 번 아빠의 일기를 몰래 읽어봤다.

에헤이~ 그렇다고 계획적으로 막 훔쳐 읽었던 건 아니고~ 보통 안방 협탁 위에 무방비로 놓여있던 터라 지나가다 슬쩍~ 내가 궁금했던 날의 아빠를 펼쳐 읽어보곤 했다. 매일 밤 자기 전 의식처럼 침대에 엎드려 그날의 일기를 꾹꾹 눌러쓰는 아빠를 보면 나는 괜히 옆에 누워 한 귀퉁이 문구를 큰소리로 읽기도 했다. 쑥스러워하던 아빠의 얼굴을 좋아해서, 그 얼굴이 보고 싶어서 자주 하던 장난이었다.

정년퇴임 전까지는 일밖에 모르던 아빠라서, 무뚝뚝해 표현을 잘 감추던 아빠라서,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감정을 느끼며 사시는지, 어떻게 한결같이 40년을 일할 수 있었는지, 나는 아빠가 궁금했고 아빠와의 시간이 고팠다.


그리고 지난 금요일, 생일을 맞아 본가에 갔다.

생일은 가족들과 보내야 한다는 암묵적인 약속 때문이기도 했지만, 실은 생일 선물로 아빠의 일기를 받을 속셈이었다. 그런데 이런, 아빠는 이미 선물로 노트북을 준비해두셨다. 고장이  새로 사야 한다고 지나가듯 중얼대던 소리를 기억해두셨던 거다. , 너무 기쁘고 감동이지만... 이러면  되는데... 매번 수가 하나인 나는 여러 수를 꿰고 있는 아빠를 이길  없다.

내 노트북 선물을 위한 아빠의 다정한 꼼꼼함

예상 시나리오를 벗어나버렸지만 걱정은 없었다. 내게는 아직 비장의 무기가 있으니까! 애교와 조르기라는... 더는 귀엽지도 않을 무기에 아빠는 옜다 한번 져주셨고 2016년과 2017년의 일기를 내어주었다. “그래, 뭐 어차피 나 죽으면 보게 될 텐데 갖고 있으면 뭐해~”라는 아빠의 말에 당장은 그럴듯한 대답을 할 수 없었지만 당분간 2016~2020년의 아빠와 천천히 친해지며 찾을 수 있기를 바란다.


생일 선물로 받은 아빠의 일기와 노트북으로 나는 아빠에 대한 글을 쓰고 모아볼 생각이다.

그리고 책으로 엮어 아빠의 생신날 다시 선물하고 싶다.

이건 아직 아빠께는 비밀이지만! 쉿~!


/ from 에세이드라이브 글감 ‘묵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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