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게 맡는다, 라는 한자 이름을 가진 사람
“오, 첫째인 줄 알았어요.”
사람들은 조금 놀랐다는 표정과 함께 이렇게 곁들이곤 했다. 1남 1녀의 막내딸, 늦둥이 부모님 덕에 친가와 외가 통틀어 막내 중에 상막내인 나 역시 이제는 ‘그렇게 보인다고 하더라구요~’하고 웃으며 넘길 만큼 익숙해졌다. 그러다가도 때로 궁금해진다. 뭐지, 내가 그렇게 독립적으로 보이는 건가? 그래도 “아~ 역시! 막내일 줄 알았어요!”라고 하면 그건 또 그 나름대로 찜찜하려나 싶긴 하지만 말이다.
나는 알아서 잘하는 막내였다. 대개 맏이에게 주어지는 책임감, 야무진, 든든한, 같은 류의 수식어는 언제부턴가 늘 나를 둘러싸고 있었던 것 같다.
심장에 작은 구멍이 있어 아기 때부터 고생했다는 세 살 많은 오빠는 손이 많이 가는 아이였고 건강히 태어나 초등부 육상 선수를 할 만큼 심장도, 다리도 튼튼했던 나는 알아서 잘하는 아이로 자랐다.
‘알아서 잘한다’는 말이 어렴풋이 뭔가 좀 다르게 느껴졌던 건 밀린 방학 숙제를 하던 무렵. 부랴부랴 탐구생활 숙제를 만들던 내 옆에서 오빠의 숙제를 대신해 주던 엄마에게 들은 ‘넌 알아서 잘하잖아’ 였던 것 같다. 시간이 흘러 조각난 기억이지만 아직까지 생생한 걸 보니 어린 귀로 듣기에도 서운하기는 했나 보다.
어린 시절의 우리는 대체로 타인의 필요와 기대에 따라 행동하게 된다.
사춘기까지 쎄게 앓았던 오빠를 바라보며 유순한 학창 시절을 보낸 나는 그렇게 알아서 잘하는 아이로 굳혀졌다. 이제는 심장도, 위장도, 치아도 나보다 더 튼튼한 오빠지만 한번 굳혀진 역할은 달라지기 쉽지 않았다. 대체 내가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3년간 세 사람에게 얼만큼의 고난이 있었던 건지는 알 수 없지만 여전히 부모님의 손을 필요로 하는 오빠를 볼 때면, 그렇게 키웠으면서 정작 내게 아드님 투정을 하는 부모님을 볼 때면, 절로 한숨이 나온다.
그 한숨에 밀려 나온 무게감이 저절로 잘하게 됐던 결과가 아니라 부단히 노력해왔던 원인이었다는 걸, 휴학하겠다고 할 때도 퇴사하겠다고 할 때도 마음 한구석에는 슬쩍 한 번쯤 반대해주길 바라고 있었다는 걸, 짐을 나눠 지지 못하는 탓에 떠나간 남자친구가 있었다는 걸, 엄마와 아빠는 알까.
알아서 잘하기까지의 숱한 고민과 노력이 우리가 같이 해나간 것이 아닌 혼자 해낸 것일 때의 외로운 성취감. 난 그걸 너무 일찍 체화했고, 지금의 내게는 너무나 익숙한 방식이 되었다.
알아서 잘해왔더니 칭찬만 받을 줄 알았는데, 손해가 될 수 있다는 걸 사회에 나와서야 알게 됐다.
시키는 일을 곧잘 해오니 그만큼 일이 없어지는 게 아니라 더 생겼던 거다. 내 일뿐만 아니라 남의 일까지 떠안고 일하다 새벽이 되어서야 퇴근하기가 다반사였던 대리 시절에는 남의 일까지 대신 해야 해서 대리인가 싶었다. 그래서 얻은 건 위염과 안구 건조증뿐인 줄 알았는데 다행히 좋은 평판과 사람들을 얻어 회사를 옮겼다.
남의 일까지 하기 싫어 그만두고 옮긴 회사에서는 내 일도 남의 일처럼 느껴져 더 문제였다.
영화의 흥행을 위해 배우를 이용하던 ‘영화 마케팅’을 하다가 영화가 흥행하든 말든 어찌 됐건 배우만 살아남으면 되는 ‘배우 마케팅’을 하려니 주어와 목적어가 뒤바뀌어 한동안 애를 먹었다.
애초에 배우보다 영화가 좋아서 이 일을 시작한 내가 주어와 목적어, 서술어 모두를 배우에게 맞추려니 고역이 따로 없었다. 점점 내가 할 수 있는 일과 관계의 반경이 넓어지면 넓어질수록 ‘영화’라는 코어에서 밀려나는 것 같아 초조했다.
기왕 코어에 들어가 보자 마음먹고 창립 20주년을 맞은 영화 제작사에 입사했다.
한국영화 기획 1세대로 불리는 대표님을 사수로 두고 22주년을 지나 온 지금 비로소 내 일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입사 첫날, 걸음이 빠른 편이니 곁에서 나란히 걸어달라고 하신 대표님은 3년 아낌없이 가르쳐줄 테니 쑥쑥 커서 그 후 3년간 보은해달라고 하셨다.
그렇게 2년을 뒤쫓아 걷고 있는 나는 4년 후 대표님의 대타가 될 수 있을까? 아직은 모를 일이다. 내 몫을 충분히 하면서 더 나은 나로 성장할 수 있다면, 그만큼 누군가를 대신할 수 있는 역량까지 키울 수 있다면 기쁘겠다.
그럼에도 앞으로의 갈림길에서는 알아서 잘하지 않으려고 한다. 혼자 알아서 잘하기보다는 앞서거나 나란히 걷고 있는 누군가에게 잔뜩 치대고, 응석도 부리고, 도움을 받아서 잘했으면 좋겠다. 그러다 보면 ‘어, 몰랐는데 막내 같은 구석도 있네요~’ 라는 말도 들어볼 수 있지 않을까?
/ from 에세이드라이브 글감 '대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