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마 PM이 1년 동안 깨달은 것들
일하는 게 마냥 행복했던 첫 1년.
1년 동안은 스타트업 뽕?에 취해 지금 나에게 이보다 더 좋은 직장이 없다 생각했던 것 같다. 월요병이 무엇인지, 왜 직장인이라면 주말을 기다린다는 건지 공감하지 못하고 야근하는 시간 마저도 즐거웠을 정도로.
그랬던 나에게도 1년이 지나니 보이지 않던 '현실'의 냉정함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주말을 기다리기 시작했고, 월요일에 유독 피곤함을 느끼는 직장인이 되었다는 것도 있지만(ㅋㅋ), 그것보다는 스타트업, PM의 고충을 실감하고 있다.
내가 내린 결론은 단순하다.
스타트업과 PM은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아주 훨씬 어렵다.
시작하기 전에도 리스크가 큰 힘든 길이라는 걸 막연하게는 알고 있었다. 그런데 정확하게는 몰랐다. 어떤 부분이 어떻게 얼마나 힘든건지. 리스크가 크다는 게 뭔지. 그랬기 때문에 합류 직전에 사수 분이 "막상 오면 기대하는 바와 다를 수 있다. 조이한테는 다른 선택지가 많으니 신중히 고민해봐라." 라고 하셨을 때 천진난만하게 전 괜찮다고, 너무 여기에 있고 싶다고 할 수 있었을 거다.
그랬던 내가 1년이라는 시간 동안 현실에 직접 부딪히며 깨닫게 된 것들을 적어두고자 한다. 또 다른 1년이 지나고 보면 재미있겠지. 이 기록이 또 다른 누군가에게도 도움이 될 수 있다면 더더욱 좋겠고.
아, 스무 명 정도의 작은 스타트업 한 곳을 1년 동안 경험한 한 사람의 이야기이기에 일반화 될 수 없음은 염두에 두시길 :)
1) 수평적이고 자유로운 문화.
우리 회사의 80-90%는 트레이닝 복을 입고 출근한다.
복장이 보여주듯, 스타트업은 다른 곳들과 비교하여 확실하게 자유롭다. 규칙이 일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규칙의 최소화를 추구한다. 출퇴근 시간, 복장이 대표적으로 보여지는 것이겠고, 그 외에도 협업하는 데에 지장이 없다면 개인에게 많은 자율성이 주어진다.
그리고 확실하게 수평적이다. 어떤 사람의 의견이 받아들여지는 데 나이 차이와 경력 만이 근거가 될 수 없다. 다른 팀원 분의 경력 앞에 스스로 주눅이 들 때야 어쩔 수 없지만. 전통과 규모가 있는 곳에 취업한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내가 의견을 활발히 제시할 수 있고, 그 의견이 받아들여지는 것이 쉽게 누릴 수 없는 환경임을 깨닫곤 한다.
덕분에 동료들과 끈끈해지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환경이기도 하다.
2) 나를 빨리 알 수 있다. 경력이 없음에도 내가 해볼 수 있는 것들이 많다.
스타트업은 늘 사람이 부족하다. 어쩔 수 없이 1인 다역을 해야하고, 하는 역할이 조그맣게라도 수시로 바뀐다. 그렇기 때문에 해본 적 없는 일에 대해 최종 책임자가 되어야 하는 일들도 종종 생긴다.
그 과정에서 나에 대해 굉장히 많이 배울 수 있다. 내가 잘하는 것과 못하는 것,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고, 주어진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내 역할을 스스로 정의해 나감으로써 내가 딱 알맞은 자리에서 쓰임받는 경험을 할 수 있다.
이 경험이 나에게는 정말 값졌다. 그리고 이 부분은 내가 사회초년생이어서, 그리고 PM이라는 제너럴리스트의 영역에 있기 때문에 더욱 누릴 수 있었던 것 같다.
3) 기업과 일의 본질을 빠르게 깨달을 수 있다.
내가 스타트업에 와서 가장 감사한 부분 중 하나이다. 주어진 일을 잘 해내는 것에 익숙한 나는 만약 대기업에 있었다면 기업이 동작하는 큰 그림을 보지 못했을 것 같다. 지금은 스무명 남짓의 작은 스타트업에 있으니 대표님을 가까이서 볼 수 있고, PM으로서 하나의 팀을 맡고 있으니 하나의 프로덕트가 만들어지기 위해, 그리고 하나의 회사가 만들어지고 살아남기 위해 어떤 팀원들과 어떤 요소들이 필요한지를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그걸 이해하고 나니 내가 하는 역할이 회사 전체에서 어떤 중요성을 갖고 있는지, 어떻게 더 중요해질 수 있는지 서서히 알 수 있게 된다. 누군가가 시켜서 혹은 해야해서 하는 일이라고 생각할 때와 이걸 깨닫고 난 뒤에 일을 대하는 마음가짐, 그로 인한 생산성은 천지차이인 것이다.
사실 위에서 나열한 좋은 점들을 조금만 다르게 생각하면 스타트업이 어려운 이유를 쉽게 알 수 있다.
1) 시장 상황에 영향을 많이 받는다.
이것이 대기업과의 가장 큰 차이 중 하나일 듯 한데, 스타트업은 여러 방면에서 시장 상황에 영향을 많이 받는다. 시장 상황이 안 좋은 지금 더더욱 체감하고 있는 것들이기도 하다. 투자 유치, 프로덕트(PMF(product-market-fit)를 찾는 과정에 있다면 더더욱), 그리고 리크루팅에 있어서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 사실 지금 우리가 맞닥뜨린 상황이라 이런 시기를, 나는 특히 PM으로서, 어떻게 하면 잘 헤쳐나갈 수 있을지 고민 중이다.
2) 체계적인 시스템이 없다.
대기업(회계법인, 로펌 등 포함하여)에 다니는 친구들이 부러운 순간 중 하나는 그 친구들이 오랜 시간에 걸쳐 만들어진 체계 속에서 성장하고 그 체계를 배워나가는 것을 볼 때이다. 스타트업은 체계적인 시스템을 갖추는 것이 사치일 때가 많다. 일단 살아남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스템이 없는 상태에서 시작해 약간의 체계를 갖춰나갈 때마다 시행착오를 많이 겪는다.
우리가 겪었던 시행착오 중 떠오르는 것들은 컬쳐데이, 성과평가, 복지 정도이다. 우리가 서로의 정신적 건강 상태에 대해 인지하고 있지 못한 것 같다는 목소리를 듣고 시작한 컬쳐데이가 어느새 형식적인 절차가 되어 버리기도 했고, 각자가 얼마나 잘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목소리를 듣고 시도해본 성과평가가 스무명 규모의 스타트업에 너무 과하게 느껴지기도 했으며, 우리 규모에서 팀원들을 위한 복지의 적정선을 찾아가는 과정도 쉽지 않았다.
3) 회사도 나도 끊임없이 성장해야 한다는 부담이 있다.
투자를 받았다, 고객의 반응이 있다, 분명 축하할 일이지만 안주해서는 안된다. 안주하면 스타트업은 살아남을 수 없다. 스타트업은 작아서 기민하게 반응할 수 있지만 작기 때문에 큰 기업에 비해 약하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우리의 장점을 최대로 살려서 다른 곳에 흔들리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는지, 살아남는다 그리고 성공한다의 기준은 무엇인지 명확하게 인지하고 그 기준을 달성해야 한다. 역시나 불안정하다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그 불안정한 환경 속에 있는 나 또한 주체적으로 끊임없이 성장해야 한다. 성장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면 회사에 걸림돌이 될 수 있다. 이 사실이 부담스러울 때가 종종 있다. 특히 내 의지와 힘이 고갈되었을 때면 그저 주어진 일을 단계별로 할 수 있는 환경이었으면 싶기도 하다.
하지만 시장 상황에 영향을 많이 받기 때문에 시장 상황을 잘 알 수 있고, 그걸 견디는 과정에서 팀원들과 더 끈끈해질 수 있고, 체계적인 시스템이 없지만 그 체계를 함께 만들어나가는 기쁨이 있고, 끊임없이 주체적으로 성장해야한다는 부담감이 있지만 성장의 폭에 제한이 없는 환경에 대한 감사함이 있다. 그렇기에 아직은 스타트업이라는 곳이 좋고 매력적인가 보다.
다음 글에서는 내가 이러한 환경 속에서 PM으로서 한 일들, PM의 현실을 깨달으며 느낀 점들을 정리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