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시리즈'에 79,200 원을 썼다.
택시는 좀 이상한 교통수단이다. 분명 대가를 지불하고 이용하는 서비스인데도 예의는 나만 차리는 경우가 많을 뿐 아니라, 가끔은 반대 방향에서 탔다는 등의 알 수 없는 이유로 욕을 얻어먹기도 한다. 유턴을 하는 동안에도 미터기는 성실히 자신의 일을 하는데 말이다.
훈계를 듣기도 한다. 남자는 거기서 거기니 너무 고르지 말아라부터 시작해 자식이 없는 여자는 넘어진 아이를 봐도 일으켜주지 않는다까지, 낯선 사람이 운전하는 차에 탔다는 이유만으로 참을성 있게 들어 넘겨야 하는 말들이 너무 많다. 카카오 택시가 등장한 이후로는 별점 때문인지 이런 기사님을 만나는 빈도가 크게 줄었지만, 설령 만난다 해도 나는 별점 테러를 할 수없다. 우리 집이 어딘지 아는 사람에게 원한 살 일을 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아무튼, 택시>가 나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리고 아무튼 시리즈가 '내게 기쁨이자 즐거움이 되는, 생각만 해도 좋은 한 가지'를 다루는 에세이 시리즈라는 걸 알게 되었을 때 나는 복잡한 감정에 휩싸였다. 택시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 하지만 택시를 좋아할 수 있다는 것이 어쩐지 특권처럼 여겨졌다. 저자가 내가 아는 한 가장 웃긴 서평가인 금정연이 아니었다면 <아무튼 택시>를 살 일은 없었을 것이다.
아무튼 시리즈는 코난북스, 제철소, 위고 이렇게 세 출판사가 함께 펴내고 있다. 발레, 방콕, 문구, 떡볶이, 택시, 외국어 등 한 가지를 오래도록, 그리고 유별나게 좋아해 온 저자들이 그 사랑의 연대기를 들려주는 이 책은 한 손에 들어오는 작은 판형에 가벼운 종이로 만들어져 들고 다니기에 전혀 무리가 없다. 책을 읽는답시고 크게 각을 잡을 필요도 없다. 주로 열 페이지 이내의 작은 챕터들로 구성되어 있어 10분 정도 늦는다는 친구를 기다릴 때에도, 환승까지 세 정거장 밖에 남지 않은 지하철에서도 쉽게 펼쳐들 수 있다. 정가는 9,900원으로 관심 있는 주제의 신간이 나올 때 한 권씩 사기에도 크게 부담되지 않는다.
에세이를 좋아하지만, 비슷비슷한 에세이가 너무 많이 나오면서부터 약간의 피로를 느끼기 시작한 것도 사실이다. 몽글몽글한 일러스트가 들어간 표지와 부드러운 폰트로 적힌 긴 제목들. 각각은 모두 아름답고 위로가 되는 이야기인데 모아두면 어떤 평평한 전형성이 느껴져서 괜히 피하고 싶기도 했다. 반면 아무튼 시리즈는 각각의 주제가 좁고 확실하기 때문에 관심 있는 것만 골라 볼 수 있다는 점이 좋다.
내가 구매한 아무튼 시리즈는 <아무튼, 택시>, <아무튼, 잡지>, <아무튼, 스릴러>, <아무튼, 계속>, <아무튼, 방콕>, <아무튼, 식물>, <아무튼, 발레>, <아무튼, 술> 이렇게 총 여덟 권이다. <아무튼, 택시> 이후로 한 권씩 사모을 때는 몰랐는데, 이렇게 제목을 쭉 늘어놓고 나니 웃음이 난다. 이 시리즈가 꽂힌 책장을 누군가 본다면 나라는 사람을 단번에 파악할 수 있을 것만 같다.
이 중에서 잡지와 방콕, 발레와 술은 내가 쭉 좋아해 온 것들로, 책의 저자들처럼 열과 성을 다하지는 못했지만 늘 나의 관심 범위 안에 존재하는 대상들이다.
<쎄씨>, <키키>로 시작해 <보그걸>, <보그>, <W>, <Numéro>에 이르기까지, 나는 패션지 속 모든 활자를 정독하는 아이였다. <아무튼, 잡지>의 저자 황효진은 만화 잡지부터 틴에이저를 겨냥한 패션지, 아이돌 잡지, 해외 잡지 등 나보다 넓은 범위의 잡지를 섭렵했다. 여기저기 쌓여가는 잡지들을 어떻게 정리할까 고민하다 '아름다운 수납술'을 다룬 <까사 브루타스>를 사들고 와버렸다는 에피소드에서는 웃음이 터질 수밖에 없었다.
방콕은 내가 동남아에서 유일하게 방문해본 도시인 동시에 세 번이나 간 도시다. 지난 연말 극악의 트래픽을 경험한 뒤 다시 가게 될지는 잘 모르겠지만, 여전히 방콕의 매력은 유효하다. 유럽 미주 등의 여행지보다 훨씬 저렴한 가격으로 수영장 딸린 호텔을 이용할 수 있어 좋고, 양이 적은 대신 가격도 싼 음식들은 뭐든지 골고루 맛보고 싶은 내게 제격이다. 만성 어깨 통증에 시달리며 간질간질한 아로마 마사지보다 과감한 손맛을 선호하는 터라 1일 1 태국 마사지가 가능하다는 것 역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장점이다.
내가 누리는 것에 비해 가격이 왜 이렇게 싼지 궁금하기는 하다. 유럽에 가면 열심히 역사적인 건물들을 찾아다니고 성당에서 미사까지 보는 내가 왜 방콕에서는 사원이나 왕궁 한번 안 찾아가고 쇼핑과 식사, 수영과 마사지에만 열광하는 건지도. 사실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모른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아무튼, 방콕>의 저자 김병운은 매년 떠나는 애인과의 방콕 여행을 기록하면서 기막힌 가성비의 음식과 쇼핑, 그리고 호텔을 이야기한다. 동시에 에라완 사원 테러 며칠 후 방콕을 방문해 잘 먹고, 잘 자고, 잘 놀았던 기억을 소환하며 '착잡한 마음이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는 것에 안도한다. 내가 방콕만큼 <아무튼, 방콕>을 좋아할 수 있는 이유다.
<아무튼, 발레>에서는 내게 쉽게 곁을 내어주지 않는 대상에 대한 절절하고 꾸준한 사랑을, <아무튼, 술>에서는 흡사 내 일기장을 보는 것 같은 부끄러움과 공감을 동시에 읽었다. <아무튼, 식물>은 아직 시작하지 않았지만, 방에 아레카 야자를 들인 김에 찬찬히 읽어볼 생각이다.
다시 <아무튼, 택시>로 돌아와 보자. <아무튼, 택시>는 <아무튼, 스릴러>와 함께 '좋아하지 않는데 저자를 보고 산 경우’카테고리에 묶인다. 앞서 언급했던 이유로 '뭐라고 하는지 한번 보자'는 심정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책이 가벼우니 들고 다니면서 짬짬이 읽자는 계획과는 달리 앉은자리에서 다 끝내버리고 말았다.
금정연은 택시 일지를 작성하고 (비용은 적지 않는다. 일지를 적는 건 그가 '택시에 얼마나 많은 돈을 낭비하는 바보 멍청이인지 알기 위해서가 아니라 때때로 스스로를 얼마나 편안하고 자유롭게 대할 수 있는지 깨닫기 위해서'이기 때문이다.) 택시 탑승에 관한 빅데이터(!)를 산출한다. 뿐만 아니라 줄곧 테리 이글턴과 줄리언 반스, 이오네스코, 볼라뇨, 보르헤스 등을 인용하거나 언급한다. 이런 류의 책이 재미를 넘어 웃기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역시 금정연은 금정연이었고, 조금 치사하지만 택시 기사에게 구박을 받는 게 나뿐만은 아니라는 사실에 얼마쯤 안도하기도 했다. 여성들이 택시를 이용하며 겪는 불편과 두려움에 대해 그가 알고 있다는 사실에도.
어떤 대상을 사랑하는 일에는 에너지가 든다. 그 대상이 사람이나 사물이든, 어떤 장소나 행동이든 꼼꼼한 관심과 노력만이 애정을 유지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애인은 떠나고, 식물이나 동물은 병들거나 죽어버릴 것이며 (<아무튼, 식물>의 저자 임이랑은 '그들에게 내가 꼭 필요하다는 기분이 소중하다'라고 썼다.) 어떤 장소에는 영영 가지 못하게 되어버린다.
에너지를 쏟고 싶은 마음이 저절로 들지 않으면 정말 좋아하는 게 아니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현실은 그보다 복잡하다. 덜 사랑하지만 더 필요한 일들만으로도 기력이 달리는 날들이 적지 않고,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애정의 대상이 그 성격을 바꾸어버리기도 하니까. 아니 가끔은 대상이 원래 품고 있던 어떤 속성이 (그 모든 사랑에도 불구하고) 나를 미쳐버리게 만들기도 하니까.
그래서 오래도록 한 가지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꾸준히 공부하고 곁에 두는 사람들을 조금씩 존경한다. 어릴 때는 별종이나 너드, 오타쿠로 보였던 친구들이 이제는 자기만의 세계를 만들어낸 멋진 취향의 어른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이제 사람들은 그들이 '무언가를 아낌없이 좋아하는 이야기'를 읽기 위해 돈을 낸다. 8권의 '아무튼' 시리즈를 산 나처럼. 내가 아무튼 시리즈의 저자라면 <아무튼 아무튼>을 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