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모임 '트레바리'에 1년 동안 81만 원을 썼다.
해가 갈수록 점점 확고해지는 생각이 하나 있다. 한 사람과 모든 걸 다 할 수는 없다. 20대의 나는 단짝 친구 혹은 연인이라면 나와 같은 걸 먹고, 보고, 마시고, 이야기해야 한다고 철석같이 믿는 인간이었다. 이런 경향은 특히 연애를 할 때 두드러졌는데, 거의 소울메이트라고 믿었던 남자 친구가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무심히 들어 넘기거나 개봉날만을 손꼽아온 영화를 꾸역꾸역 같이 봐주는 느낌이 들 때마다 나는 내심 토라졌다. 아니 혹시 우리는 서로 완전히 다른 사람인 게 아닌가, 불안해졌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겠다. 남자 친구와의 관계가 파국으로 치닫는 동안에는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취향은 다정한 말을 할 줄 모른다. 취향은 받고 싶은 전화만 받고, 취향은 거짓말을 한다.
나는 한 사람에게서 모든 걸 찾기를 그만두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나와 똑같은 사람을 만나는 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기로 한 것이다. 그 대신 와인을 좋아하는 친구와는 와인을 마시고, 미술에 관심 있는 친구와는 그림을 보러 다녔다. 이런 방식에도 한계는 있었다. 아무래도 친구가 친구에게 쏟는 에너지의 비율은 한정적이다. 일이 바쁘고 공부가 바쁘고 연애가 바쁘다 보면 우선순위에서 밀려나기 쉽다. 나부터가 그랬다. A를 꼭 하고 싶다, B를 보러 가자고 해놓고 날씨가 궂고 가방이 무거우면 그냥 주저앉아 술이나 마시고 싶어 졌다.
트레바리의 페이스북 광고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이었다. 한 달에 한 번, 한 권의 책을 읽고 4시간 정도의 토론을 한다고 했다. 400자 분량의 독후감을 쓰지 않으면 절대 모임에 참여할 수 없다고 했다. 돈을 내야 한다고 했다. 내가 직접 모임을 만들면 책값과 커피 값 5천 원만 쓰면 되는데 고작 한 달에 한 번, 총 네 번 모이면서 20~30만 원을 내라고? 이걸 하는 사람이 있어?
트레바리 서비스를 처음 접하는 사람들의 머릿속에 대부분 떠오르는 생각일 것이다. 물론 나도 이 금액이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오히려 그래서 해보기로 했다. 돈을 낸 이상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하기로 했던 일을 미룰 수 없을 테니까. 나와 같은 책을 읽고 3시간 40분 동안 이야기 나눌 의향이 확실한 사람들만 모일 테니까. 서로에 대한 애정, 기가 막히게 통하는 취향에 기대는 대신 '돈을 내고 산 서비스를 최대한 만족스럽게 활용한다'는 목표로 우리는 최선을 다할 테니까.
낯선 사람과 만나 책 이야기를 하는 데 돈을 쓰기로 결심했다면 이제는 어떤 클럽에 들어갈지를 결정할 차례다. 한 달에 한 권 책을 읽고, 독후감을 쓰고, 서로의 독후감을 읽고 의견을 나누는 것이 트레바리의 기본 시스템이다. 클럽장 혹은 정해진 멤버가 발제문을 준비하고 그 순서에 따라 토론한다. 하지만 클럽마다 읽게 될 책의 주제는 제각각이고, 해당 분야의 전문가이자 모임의 리더 격인 클럽장의 유무-그리고 그에 따른 비용-도 차이가 난다. 트레바리의 덩치가 커지고 멤버가 늘어나면서 경제경영부터 문학과 인문학, 커리어, 과학 기술 등 책으로 엮을 수 있는 거의 모든 주제의 클럽을 찾아볼 수 있게 되었다. 부동산 관련 책만 읽는 클럽, 영어 원서를 읽는 클럽, 아니면 특정 주제 없이 멤버들의 투표로 읽을 책을 고르는 클럽도 있다.
내가 처음으로 선택한 것은 문학-비문학이었다. 클럽장 없이 파트너(모임이 원활하게 이루어지도록 일종의 반장 역할을 하는 멤버)와 일반 멤버들로만 이루어진 클럽으로, 한 달에 한 권만 읽는 다른 클럽과 달리 문학 하나, 그와 관련된 비문학 하나를 읽는 모임이다. 처음에는 전공이나 관심사와 아무 관련 없는 클럽을 고를까도 생각했다. 문학 전공한 사람이 문학 읽는 모임에 나가는 건 진부하니까. 이왕 돈을 내고 독서 모임을 하는 거라면 내가 모르는 분야를 배우기라도 하는 게 낫지 않을까. 하지만 나는 이내 마음을 고쳐 먹었다. 내가 이 모임에 나가는 건 돈을 내고라도 관심사를 공유하고 싶어서지, 새 분야를 공부를 하기 위해서는 아니다. 게다가 낯을 가리는 성격 상 다루는 주제가 맞지 않으면 모임에 가기 싫어질지도 모른다.
나름의 신중한 숙고 끝에 결정했음에도 첫 시즌 나의 출석률은 저조했다. 시간을 쪼개 두 권의 책을 읽고 독후감도 성실히 썼지만, 막상 모임날이 되면 바람을 뚫고 압구정 아지트(트레바리 모임이 진행되는 '아지트'는 압구정과 안국, 성수, 강남에 있다. 강남 아지트는 지금까지 공유 오피스 we work의 한 층을 사용해왔지만, 트레바리만을 위한 전용 건물이 막 오픈한 참이다.)까지 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문학-비문학이라는 분야는 너무 광범위한데, 클럽을 체계적으로 이끌어줄 클럽장이 없다 보니 투표로 하는 책 선정이 그다지 마음에 와 닿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때맞춰 회사에서도 일이 뻥뻥 터지는 바람에 이불 덮고 쉬고 싶은 마음만 굴뚝같기도 했다.
내 게으름은 돈으로도 어쩔 수 없나, 괜한 낭비 말고 집에서 혼자 읽을까 생각하던 차에 다음 시즌 신청 기간이 돌아왔다. 한 번 체험해 본 것으로 만족해야 할지 고민하며 무심하게 개설될 클럽들을 살펴보던 중, <매거진 B> 손현 에디터가 클럽장을 맡는 '그 인터뷰'가 눈에 띄었다. 클럽장이 있는 대신 멤버십 비용은 31만 원으로 비싼 편이었지만 (클럽장 없는 문학-비문학은 19만 원이었다) 인터뷰는 개인적 관심은 물론, 콘텐츠 에디터라는 직업상 업무적 관련성도 있는 분야였기에 과감하게 (무이자 할부로) 결제했다.
결과부터 말하자면, 나는 이 모임에 100% 출석했다. 업무로 종종 인터뷰를 해왔지만 몸담고 있던 매체 특성상 긴 호흡의 인터뷰는 어려웠다. 시간과 공을 들여 한 인물과 주제를 파고드는 인터뷰를 읽는 일이 거기에서 오는 갈증을 조금이나마 해소해주었다. 마지막 모임에는 로컬 숍 연구 잡지 <브로드컬리>의 조퇴계 편집장이 함께 하며 생생한 이야기를 들려주어 특히 즐거웠다.('생생한 이야기'는 클럽장 있는 클럽의 장점 중 하나인 듯싶다.)
나는 세 번째 시즌에도 '그 인터뷰'를 신청했다. 지난 시즌과 다른 책들로 구성할 거라는 말을 듣고 내린 결정이었는데, 클럽장님은 막상 내가 또 나타나자 약간 당황한 눈치였다. 어쨌든 약속대로 새로운 인터뷰집-혹은 인터뷰와 관련 있는 책들-을 만나볼 수 있었기에 나는 만족스러웠다. 이 시즌을 마지막으로 손현 에디터는 트레바리 클럽장을 그만두었는데, 혹시 내가 다음 시즌에도 신청할까 봐 두려웠던 것은 아니길 빈다...
회사와 친구만 오가는 생활을 계속했다면 알기 어려웠을 다양한 분야의 멤버들과 만나는 것도 즐거움 중의 하나였다. 말과 글, 인터뷰를 업무에서 다뤄야 하는 사람들 뿐 아니라 요식업 운영자, 스타트업 임원, 엔지니어, 자연대 대학생까지 스펙트럼이 넓었다. ( 지금까지 내 생활 반경에 엔지니어나 자연대 대학생은 없었기에 매우 신선한 경험이었다.) 4번의 모임을 거치는 동안 엄청나게 친해져서 매주 번개를 하고 술을 마시는 클럽도 있다는데, '그 인터뷰'는 그런 분위기는 아니었다. 독서토론과 뒤풀이를 마치고 집에 가는 길에는 다들 화기애애해졌지만 만나는 텀이 길다 보니 모임을 시작할 때면 어김없이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내게는 큰 단점이 아니었다. 적당한 거리감과 차분한 분위기 속에서 대화를 나눌 수 있어 오히려 좋았다.
이렇게 네 달씩 세 시즌을 거쳤으니 나는 꼭 1년을 트레바리와 함께한 셈이다. 삼십만 원을 내고 나갈만한 모임이냐 묻는다면 그건 각자의 상황에 따라 모두 다를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아깝지 않은 투자였고 무엇보다 첫 시즌 실패 후 다시 한번 도전한 점이 다행스럽게 느껴진다.
포인트는 독서모임에 나가려는 목적을 분명히 하고, 내게 잘 맞는 클럽을 찾는 것. 지금껏 해온 일, 앞으로 하고 싶은 일에 관련된 주제를 택할지, 혼자서는 도저히 다가갈 엄두가 안 나는 주제에 도전할지(후자라면 클럽장이 있는 클럽을 추천한다)부터 생각해 봐야 한다. 나처럼 게으른 인간이라면 아지트의 위치와 교통편도 고려하자. 퇴근 후 혹은 피 같은 주말에 모르는 사람들과 책 얘기를 하러 가야 하는데 거리가 너무 멀면 아침까지 불타던 의욕은 금세 꺾인다. 여러 시즌 개설된 전력이 있는 클럽이라면 이전 시즌 선정 도서 목록을 살펴보는 것도 도움이 된다. 이 클럽이 앞으로 어떻게 흘러갈지, 어떤 유의 책을 주로 볼지 예측할 수 있는 방법이다.
지금은 트레바리를 잠시 쉬고 있다. 또 다른 소셜 모임 서비스에 덜컥 돈을 내버렸기 때문이다. (돈 내고 하는 모임에 중독된 것 같다. 돈을 열심히 벌어야겠다.) '독서'로 한정되지 않는 모임이 궁금해 선택했지만 하고 있는 건 결국 글쓰기 모임. 다음 리뷰는 '트레바리'와 '소셜 살롱 문토'의 비교가 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