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이 퓌메의 소비뇽 블랑
레스토랑이나 바의 와인 리스트에서 가장 쉽게 눈에 띄는 화이트 품종은 아마 샤르도네(Chardonnay)와 소비뇽 블랑(Sauvignon Blanc)일 것이다. 두 품종 모두 세계 각지에서 재배되어 와인으로 만들어지고, 그 스타일은 기후와 토양, 양조 스타일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와인 입문자로서 소비뇽 블랑을 처음 마주했을 때 받은 인상은 색이 옅고 향이 가벼우며 산도가 높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런 의문이 뒤따랐다. 음식과 페어링하기는 편하겠지만, 와인 그 자체로 즐기기에는 샤르도네에 못 미치는 품종이 아닐까?
이 섣부른 판단은 다양한 소비뇽 블랑을 맛보면서 점차 바뀌었다. 뉴질랜드 소비뇽 블랑은 잔디나 채소를 연상케 하는 푸릇푸릇한 아로마를 잃지 않으면서도 익숙한 열대과일의 풍미로 초심자의 뻣뻣한 입맛을 달래주었다. 캘리포니아 출신의 소비뇽 블랑은 둥글고 부드러우며 유질감이 있어 버터로 조리한 생선이나 닭 요리에도 잘 어울릴 것 같았다. 그러나 개안하는 수준의 충격을 안겨준 것은 다름 아닌 루아르의 푸이 퓌메(Pouilly Fumé), 그중에서도 디디에 다그노(Didier Dagueneau)의 소비뇽 블랑이었다.
푸이 퓌메는 프랑스 중부 루아르 강 상류의 아펠라시옹으로, 루아르 소비뇽 블랑의 명성을 양분하는 상세르(Sancerre)와 강을 사이에 둔 채 마주 보고 있다. 진흙과 석회암을 포함한 이회토 그리고 부싯돌이 이 지역의 테루아를 구성하며, 부싯돌은 비교적 서늘한 기후에서도 포도가 문제없이 여물 수 있도록 열을 보존하는 동시에 푸이 퓌메의 특징인 ‘연기에 그을린 듯한 아로마’를 더해준다.
프랑스어 퓌메(fumé)는 영어의 스모크드(smoked)와 같은 뜻이다. 훈연 향, 화약 향에 비견되는 특징적 아로마를 ‘푸이 퓌메’라는 이름이 잘 담고 있는 것이다. 이 지역 소비뇽 블랑을 ‘블랑 퓌메(
Blanc Fumé)’라는 별칭으로 부르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소비뇽 블랑 특유의 푸릇푸릇한 느낌과 높은 산도에 날카로운 미네랄리티와 연기의 뉘앙스가 더해지면 ‘와인 그 자체로는 파워가 약한 품종’이라는 편견은 산산이 조각난다.
푸이 퓌메의 앙팡테리블, 디디에 다그노의 와인들은 그 개성이 한층 뚜렷하다. 와인 가문에서 태어났지만 가업을 물려받지 않고 바이크 레이서로 살던 디디에 다그노는 잇단 사고 끝에 고향인 생 탕들랭(Saint-Andelain)으로 돌아와 와인 양조를 시작한다. 그러나 이 ‘돌아온 탕아’가 얌전히 아버지 밑에서 일을 배웠을 거라 생각했다면 오산이다.
1982년 자신의 이름을 달고 첫 빈티지를 생산한 그는 점점 밭의 면적과 퀴베를 늘려갔다. 포도 수확의 전 과정을 수작업으로 진행했으며 파격적으로 수확량을 줄여 품질을 높였고, 그렇지 않은 이웃의 와이너리들을 거세게 비판해 미움을 사기도 했다. 1993년 바이오다이나믹 농법을 전면 도입한 그는 말을 이용해 밭을 일구는 등 다양한 시도를 서슴지 않았다. 쨍하고 깨끗한 맛만을 강조하던 전통적인 양조 방식에서 벗어나 특별 제작한 작은 오크 통을 발효에 활용하기도 했다.
이런 실험적 태도와 완벽주의 성향은, 와인 메이커로서의 커리어를 시작한 뒤에도 개 썰매 레이스에 출전해 챔피언을 자리를 거머쥘 정도로 유별난 경쟁심에서 비롯되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는 올리버 스타일스와의 <디캔터> 인터뷰에서 ‘가족보다 와인을 잘 만들고 싶다는 마음’이 최초의 동기였으며 더 나아가 ‘세계 최고의 소비뇽 블랑을 만드는 것’이 목표였다고 밝힌 바 있다.
내가 맛보고 개안의 충격을 느낀 것은 도멘 디디에 다그노의 중간급 와인이라 할 수 있는 ‘뷔쏭 르나르(Buisson Renard)로, 이 이름이 탄생한 데는 재미있는 배경이 있다. 뷔쏭 르나르를 만드는 포도들은 생탕들랭 언덕의 아래쪽 밭, 오래도록 ‘뷔쏭 메나르(Buisson Mesnard)’라 불려온 구획에서 재배된다. 와인 역시 뷔쏭 메나르라는 이름을 달고 출시되어왔는데, 유명 와인 평론가 미셸 베탄(Michel Bettane)이 자신의 와인 가이드에 실수로 ‘뷔쏭 르나르’라 적은 것을 디디에 다그노가 그대로 차용해 이름을 바꾸어버렸다는 것이다. 프랑스어로 뷔쏭(buisson)은 덤불을, 르나르(renard)는 여우를 뜻하며, 오늘날 뷔쏭 르나르의 레이블에는 건방진 자세로 누워있는 여우 그림이 들어간다. 덥수룩한 수염과 곱슬머리, 바이커 경력부터 경비행기 추락 사고로 인한 갑작스러운 사망까지 영화로 만들어도 손색이 없을 만큼 드라마틱한 그의 인생에 잘 어울리는 일화다.
2008년 디디에 다그노의 죽음 이후 도멘을 물려받은 아들 루이 뱅자맹 다그노(Louis-Benjamin Dagueneau)는 최근 과감한 결정을 내렸다. 푸이 퓌메 아펠라시옹 관리 위원회가 도멘 디디에 다그노의 2017년 와인에서 “식초 같은 맛이 난다”라며 인가를 거부하자 재인가를 위한 절차를 밟는 대신 향후 최소 5년간 푸이 퓌메 아펠라시옹을 사용하지 않기로 한 것. 그는 2017년이 자신이 생산한 최고의 빈티지 중 하나라고 생각하며, 레이블을 다시 생산하는 비용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에 계속 뱅 드 프랑스(Vin de France: 특별한 지역적 표기가 없는 프랑스 와인) 등급으로 와인을 출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아버지 못지않은 완성도로 인정받아온 그였기에 이런 결정이 푸이 퓌메의 명성에, 또 도멘의 앞날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디디에 다그노가 와인 양조에 뛰어들기 십수년 전, 푸이 퓌메의 명성은 미국 캘리포니아에도 새로운 물결을 일으켰다. 나파 밸리 와인의 선구자 로버트 몬다비가 자신의 와이너리를 설립하던 1960년대 미국에서 소비뇽 블랑은 싸구려 스위트 와인을 만드는 데 쓰이는 품종이라는 이미지가 지배적이었다. 로버트 몬다비는 이런 오명을 지우고자 자신이 생산한 소비뇽 블랑에 ‘퓌메 블랑’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붙인다. 푸이 퓌메 소비뇽 블랑의 별칭 ‘블랑 퓌메’를 빌려와 단어의 순서를 뒤집은 것이다. 직역하면 스모크드 화이트(smoked white)가 되니, 이 편이 영어의 어순에도 맞는다. (프랑스어에서는 일반적으로 형용사가 명사 뒤에 붙는다.)
몬다비는 여타 와이너리와의 차별화를 위해 소비뇽 블랑을 새 오크통에 숙성시켰고 그 결과 유질감과 부드러운 텍스처가 더해졌다. 이름은 빌려왔으나 푸이 퓌메와는 다른 매력의 소비뇽 블랑이 탄생한 것이다. 시장으로 나온 퓌메 블랑은 소비뇽 블랑의 새로운 이미지를 각인시키는 데 성공했지만 로버트 몬다비는 이 이름을 정식으로 등록해 소유권을 주장하거나 일정한 양조법을 강제하지 않았다. 이어 고급스러운 소비뇽 블랑을 목표로 하는 다른 와이너리에서도 ‘퓌메 블랑’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기 시작했고, 로버트 몬다비와 달리 아예 오크를 사용하지 않은 퓌메 블랑도 점차 등장했다.
소비뇽 블랑의 세계는 무궁무진하고, 푸이 퓌메의 매력은 걸출하다. 디디에 다그노 외에도 상세르와 푸이 퓌메 양쪽에서 활약하는 앙리 부르주아(Henri Bourgeois), 토마스 제퍼슨 전 미국 대통령의 사랑을 받아 ‘대통령의 화이트’라 불리는 샤토 드 트레시(Château de Tracy) 등 쟁쟁한 와이너리들이 그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 가격 경쟁력이나 접근성 면에서 뉴질랜드 소비뇽 블랑에 밀리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가성비로만 평가할 수 없는 복잡한 매력이 푸이 퓌메에는 있다. 주야장천 비만 내리다 멀어져 간 화이트의 계절을 아쉬워하며, 이번 주말에는 푸이 퓌메의 그을린 향을 즐겨보는 게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