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워풀하고… 그러면서 녹아내리는 듯한 단맛과 톡 쏘는 듯한 신맛이 확 밀려오는 느낌이야. 그거야말로 퀸의 보컬의 달콤하고도 허스키한 목소리를…중후한 기타와 묵직한 드럼으로 감싸는 듯한….뭐랄까, 클래식 같지만 그렇지도 않아. 이건 보다 모던한 느낌. 역시 ‘퀸’이에요.
이제껏 와인을 한 번도 마셔본 적 없다는 <신의 물방울>의 주인공 시즈쿠가 샤토 몽페라 2001년을 마시고 술술 읊어댄 내용이다. 내가 <신의 물방울>을 처음 본 것은 본격적으로 와인의 아로마를 공부하기 한참 전으로, 포도로 만든 술을 마시고 록 음악이, 그것도 특정 밴드의 음악이 들린다니 아무리 만화라지만 뻥이 심하다고 생각했다. 물론 와인 공부를 시작한 지금도 와인을 마시고 음악이 들리거나 무한한 꽃밭이 눈앞에 펼쳐지는 일은 없다. 첫사랑의 기억을 떠올리며 눈물을 흘리지도, 가면무도회로 시공간 이동을 하지도 않는다. 무엇보다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하는 부분은 평범한 대기업 맥주만 열심히 마셔온 사람이 처음 맛본 와인의 특성을 예리하게 파악해서 공감각적인 이미지로 그려낸다는 점이다.
작가는 시즈쿠가 이처럼 테이스팅과 표현에 특출난 사람이 될 수 있었던 배경을 나름대로 설명한다. 세계적인 와인 평론가인 시즈쿠의 아버지, 칸자키 유타카가 어린 시절부터 각종 과일을 먹이고 꽃향기를 맡게 했으며 심지어는 나뭇가지나 가죽 벨트를 핥게 했다는 것. 시즈쿠는 그런 훈련을 통해 와인의 아로마를 표현하는 데 쓰이는 재료들을 머릿속에 구조화한 것은 물론 그 맛과 향에 익숙해졌다는 이야기다.
와인 평론가 아버지도 없고 ‘블랙 커런트’나 ‘구스베리’는 구경도 해본 적 없는 보통의 한국 사람이라면 어떨까. 우리는 어떻게 공부해야 와인의 아로마를 익히고, 다른 사람들이 공감하는 언어로 표현할 수 있을까. 지난 주말, 함께 와인을 공부하는 H와 와인비전에 방문했다. 와인 학습자들이 훈련 도구로 흔히 이용하는 아로마 키트와 와인비전에서 곧 출시 예정인 아로마 카드 ‘아로마 파인더’를 체험하고 이야기를 나눴다.
(*이하 기자는 N, 동행한 친구는 H로 표기합니다.)
N: 지난번에 보르도 갔을 때 씨떼 뒤 방(Cité du Vin: 보르도의 와인 박물관) 기념품 숍에서 아로마 키트 샀잖아. 그건 어떻게 구성되어 있어?
H: 내가 산 건 54가지 향이 들어있는 키트야. 와인을 표현할 때 자주 사용되는 아로마 54개를 재현한 작은 병들이 있고 뚜껑에 번호가 새겨져 있어. 각각의 번호에 대응하는 카드도 있는데 거기에 아로마의 이름이 적혀 있지.
N: 그럼 생각날 때마다 아무 병이나 골라서 맡아보고 무슨 아로마인지 추측한 다음에 카드로 맞았는지 확인하는 거야?
H: 그렇게도 쓸 수 있는데, 집에서 혼자 갑자기 키트를 열어서 공부하게 되진 않더라고. 나는 와인을 마셨는데 무슨 아로마인지 불명확한 게 있을 때 그 빈 곳을 채우는 방식으로 써. 예를 들면 이런 거지. 와인을 마시고 다른 리뷰나 정보를 확인하기 전에 순수하게 내가 느끼는 아로마들을 일단 적어 놓고, 그다음에 비비노(Vivino) 앱 같은 데서 다른 사람들이 주로 언급한 아로마는 뭐가 있는지, 그 와인에 대한 전문가 리뷰가 있는지 찾아봐. 자료에서 공통적으로 언급되는데 나는 놓친 아로마가 있으면 아로마 키트에서 찾아서 향을 맡아 보는 거야. 그럼 아, 아까 내가 맡았는데 딱히 뭐라고 집어내지 못했던 아로마가 이거구나, 하고 각인이 되지.
N: 집에 구비해 두면 와인을 마신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바로 확인할 수 있어서 좋겠다. 가격은 얼마였지? 꽤 비쌌던 거 같은데. 그만큼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
H: 정확히는 기억이 안 나지만 300유로 정도였던 것 같아. 40만 원이 넘는 돈이니 비싸긴 하지. 그렇다고 매일 쓰는 것도 아니고. 그래도 나는 대체로 만족해. 꼭 그 가격만큼 자주 써서가 아니라, 아리송한 아로마를 키트를 활용해서 한 번이라도 찾아냈을 때 그 만족감이 ‘잘 샀다’라는 생각으로 이어지는 것 같아.
N: 사용하면서 불편한 점은 없었어?
H: 이게 정말 백 퍼센트 그 향일까 하는 의구심은 가끔 들어. 병 안에 든 게 재료 그 자체가 아니고 다양한 성분으로 향을 재현한 거니까. 사람마다 혹은 컨디션에 따라 향을 다르게 느끼기도 하는 것 같아. 우리 그때 트러플 아로마 병을 열었는데 오히려 양송이 같은 느낌이라고 얘기한 거 기억나? 지금 여기 있는 걸로 맡아보니 양송이도 아닌 것 같고, 여전히 트러플 느낌도 아니야.
N: 이번에는 아로마 카드를 좀 살펴볼까? 이름은 ‘아로마 파인더’래. 98개의 아로마를 정리해둔 카드야.
H: 향료는 없고 카드만 있네?
N: 응. 직접 향을 맡고 훈련하는 것보다는 와인을 어떤 단어로 표현할 수 있는지 머릿속에 구조화하는 게 카드의 목적이래. 예를 들어 와인에서는 과일과 꽃, 스파이스 등의 아로마를 느낄 수 있고, 과일의 아로마에는 또 검은 과일, 붉은 과일, 핵과, 시트러스, 열대 과일 등이 있다는 것, 한 단계 더 내려가서 검은 과일의 종류에는 블랙베리나 블랙커런트, 블랙체리 등이 있다는 사실을 머릿속으로 정리하는 거지. 컴퓨터에 폴더 만들어서 파일 정리하듯이.
H: 정말 폴더처럼 카테고리마다 표지에 해당하는 카드가 있네. 나는 그 ‘검은 과일’ 단계까지는 잘 찾아지는데 그 아래로 내려가는 게 어렵더라. 하위에 어떤 아로마들이 있는지를 미리 정리해 두었다가 기회가 있을 때 직접 맡아보면 좋을 것 같아. 근데 각각의 카드 아래에 또 뭐라고 쓰여 있어.
N: 이 아로마의 소속에 대해 적혀 있는 것 같아. 우선 와인 양조의 어느 단계에서 더해지는 아로마인지 나와 있어. 프라이머리(Primary)는 포도 자체가 가진 아로마고, 세컨더리(Secondary)는 발효 과정에서 더해지는 아로마, 그러니까 젖산 발효나 오크통 사용 여부에서 정해지는 아로마들이야. 터셔리(Tertiary)는 에이징과 보관 과정에서 생겨나는 향들이고. 그 옆에는 아로마의 상위 분류를 적어 놨네.
H: 아몬드나 호두 같은 너트류 아로마가 산화 때문에도 나타날 수 있는지는 몰랐어.
N: 나도! 그리고 여기 땀나는 말이랑 썩은 계란, 젖은 판지도 있는 거 알아? 왜 가끔 내추럴 와인에서 마구간 냄새 난다고, ‘브렛’ 때문이라고 하잖아. 대충 그렇게만 알고 있었는데 여기 써 있는 걸 보니 브렛의 풀네임이 브레타노미세스(Brettanomyces: 효모의 일종)인가 봐. 그리고 부쇼네라는 게 있다고만 들었지 어떤 냄새가 나면 부쇼네일 확률이 높은지는 몰랐는데, 젖은 판지 카드에 ‘코르크 테인트(Cork Taint: 코르크 오염)’라고 적혀 있으니 이게 부쇼네의 특징인가 보네.
수다를 떨어가며 열심히 아로마 키트를 킁킁대고 카드를 분류하다 시계를 보니 어느덧 두 시간이 흘러 있었다. H와 내가 내린 결론은 이랬다. 아로마 키트는 활용하기에 따라 시음을 풍부하게 만들어 준다. 어딜 가야 산사나무를 볼 수 있는지, 마르멜로는 모과랑 어떻게 다른 과일인지 알기 힘든 한국의 도시인들이 느끼는 답답함을 일부나마 해소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카드는 아로마를 직접 체험할 수 없다는 점이 아쉽지만, 일반적인(살 만한 가격의) 아로마 키트에 비해 아로마의 종류가 다양하고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있어서 어려운 와인 용어들로 이미 눈이 팽팽 도는 초심자에게 믿는 구석이 되어 준다. 각자의 사정과 필요에 따라 갖춰두고 훈련하면 몽페라에서 퀸 음악은 안 들리더라도 보다 정확하고 풍부한 표현이 가능해질 것이다. 온갖 아로마를 탐험하며 목이 말라진 우리는 자리를 옮겨 뉘 생 조르주를 마셨다. 축축한 버섯 풍미가 느껴진다는 내 말에 H는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