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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졸리 May 01. 2024

[인터뷰] 영문과 졸업 후 다시 3수, 한의대에 가다.

"돌연변이, 그 시작은 어디였는가" 2편 - 한의대 1학년

돌연변이, 그 시작은 어디였는가

- '이상한' 진로를 가진 돌연변이 20대들을 인터뷰합니다.

스물 다섯. 명문대를 졸업했지만, 사회가 정의한 보장된 성공의 길은 걷기 싫다는 '반골기질'이 나를 괴롭힌다. 이런 나에게 꼭 맞는 '직업'을 찾기 위해 방황하고 또 방황하지만, 그런 건 이 세상에 없는 것 같다. 나다운 길을 걷는다는 건 많은 걸 포기해야 한다는 의미이기에 쉽게 엄두가 나지 않는다. 내가 두려움에 숨어 '시작'조차 못하고 있을 때, 수많은 나의 꿈들이 그저 '가능성'의 상태에만 머물러 있을 때, 주위를 둘러보니 내 주변 이미 '시작'한 친구들이 보인다.

그들의 안부를 묻고, 그들을 만나 시작에 대해 묻다 보니, '이상한' 진로를 택한 돌연변이 20대들이 꽤나 많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사회적 기준에서 벗어난 진로를 선택할 용기가 있었던 사람들. 그 사람들의 '시작'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아직 '시작'을 망설이고 있는 나에게, 그리고 '시작'이 두려워 시작조차 못하고 있는 수많은 청춘들에게 이 이야기를 바친다.


2편

연대 영문과 출신 한의대 1학년

졸업, 다시 3수, 한의대에 가다.


Q. 대학 졸업하고 나서 수능 연속으로 세 번 봤잖아. 이번 수능은 어땠어?

이번에 완전 불수능이어서 사실 생각보다 잘 보진 못했어. 국어는 83점이었거든. 가채점 때는 1등급 컷에 딱 걸린 점수였는데, 성적표 받으니까 2등급으로 떨어진 거야. 수학이랑 영어는 잘 봐서 둘 다 1등급이었고, 사탐도 이번에 어려웠어. (나도 갑자기 수능 다시 봐 보고 싶은데?) 무슨 소리야. 절대 발을 들이지 마. 사람이 할 짓이 아니야. (웃음) 나도 1년 정도 공부하게 될 줄 알고 시작한 건데, 이렇게 오래 걸릴 거 알았으면 시작 안 했을 지도 몰라.


Q. 근데 왜 굳이 한의대야? 예전부터 한의사 생각이 있었던 거야?

예전부터 하고 싶었던 건 절대 아니야. 그래, 이게 젤 중요한 질문이지. 왜 한의대를 결정했냐면, 그게 내가 막학기, 4학년 때였는데 이제 한창 진로 고민 많잖아. 나는 사실 딱히 꿈이 없었는데, 막연하게 전문직에 대한 관심은 있었어. 솔직히 말하면 최대한 ‘돈과 명예’를 누릴 수 있다는 이유 때문에 전문직을 하고 싶었는데, 주변을 둘러보니 회계사, 행정고시, 로스쿨 이 셋 중 하나를 많이 하더라고. 세 개 다 준비과정이 어렵고 오래 걸리기로 악명이 높아서 해낼 자신이 없는거야. 되더라도 내가 계속 그걸 일로 삼을 수 있을까 싶고. 결국 회계사, 공무원, 변호사가 되더라도 회사원으로 일하게 되는 거잖아. 나는 아무리 전문직이라 하더라도 회사에서 사무직으로 일하고 싶지는 않았어.


그러다가 우연히 매체에서 알게 된 ‘김지원 아나운서’라는 사람이 있어. 그 사람이 내 인생을 바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야. 김지원 아나운서가 아나운서로 잘 나가다가 퇴사하고 한의대를 준비한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어. 그 때 처음 알았어. ‘한의대를 이렇게 늦은 나이에도 갈 수 있구나?’ ‘아나운서라는 멀쩡한 직업을 버릴 정도로 매력적인 직업인가?’ 그 전까지 나는 문과가 한의대 갈 수 있는지조차 몰랐거든. 상상도 못했지.


그게 2021년 봄 쯤이었어. 나도 그 기사를 보고 조금은 충동적으로 ‘한 번 도전해볼까?’ 싶은 마음이 들어서 일단 부모님한테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물어봤어. “엄마, 나 혹시 한의대 준비하는 거 어떤거 같아?” 딸을 연대까지 보내놨는데, 또 한의대를 간다 한다니, 난 당연히 안 된다 할 줄 알았어. 근데 엄마가 바로 “너무 좋은데”, 이러시는 거야. 그럼 일단 여름부터 수능 공부를 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당시에는 일단 시험 삼아 봐 보자 라는 생각으로 시작을 했지. 그런데 공부는 생각보다 호락호락하지 않았어.


Q. 공부하면서 어떤 게 제일 어려웠어?

그새 수능이 엄청 달라져 있더라고. 일단 수학은 문이과가 통합됐어. (웃음) 우리가 (문과 수학에서) 안 배웠었던 지수함수, 로그함수, 삼각함수 이런 게 추가됐고, 국어는 수능 안에 선택과목이 생겼어. 예전엔 화법-작문-어법이 통합이었잖아. 이제는 그게 ‘언어와 매체’, ‘화법과 작문’으로 나눠졌어. 나는 언어와매체를 선택했는데 이번에 문법이 진짜 어려워서 중간에 보다가 뛰쳐나갈 뻔 했어.


Q. 첫 번째 수능 끝나고 심경의 변화가 있었어?

맛보기로 보겠다고 말은 했지만, 되게 못 보기도 했고, 막상 결과를 보니 받아들이기 힘들어서 엄청 울었던 게 기억 나. (연대 입학 성적 보다 안 좋았어?) 응.  처음 보는 성적표였어. (웃음) 내 인생 모의고사 통틀어서 제일 못 봤지. 사람이 4년 지나니까 머리가 굳더라고. 학기 중에 15학점 들으면서 공부를 병행해서 그런 것 같기도 하고.


Q. 첫 번째 수능은 그냥 해보자 라는 마인드였다면, 그 이후에도 계속 도전할 수 있었던 드라이브는 뭐였어?

그냥 계속 하다보니 오기가 생겼던 것 같아. 이렇게까지 했는데 끝을 봐야 된다 싶기도 했고, 이미 발을 들였으니까 그거 말고는 또 다른 길로 샐 용기가 잘 안 나더라고. 주변 사람들이 나를 보고 제일 신기해했던 게 그건 것 같아. 전문직 시험은 그 자격을 따고 나면 바로 실무를 할 수 있잖아. 근데 나는 다시 학부 6년이라는 시간을 보내야 자격을 딸 수 있는 거니까 그만큼의 시간을 투자할 용기를 어떻게 냈냐고. 그 시간에 대한 아까움 때문에 다들 쉽게 결정을 못 하는 것 같아.


Q. 앞으로 6년이라는 시간이 더 걸리는 게 두렵지는 않아?

6년이 좀 막막하긴 한데, 그동안 생계가 문제 되지만 않는다면 6년 다니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을 했어. 나는 내 대학생활 4년이 좀 허무하게 지나갔다 생각하거든. 대학 가서 이뤄 낸 것 없이 허송세월 한 것 같아서, ‘리셋’ 버튼을 누르고 싶다고 항상 생각했어. 근데 리셋할 수 있는 방법이 있더라고. 그래서 열심히 준비했지.


Q. 대학생활이 왜 허무하게 지나간 것 같다고 생각한 거야?

일단 초반에는 원하던 대학을 간 거니까 자부심이 있었어. 사실 대학 갔다고 다 끝이 아닌데, 자부심에만 취해서 동아리도, 대외활동도 뭐 하나 한 게 없거든. 졸업할 때 되니까 준비된 게 없는 거야. 뭐 취직을 하려 해도 이뤄놓은 게 없으니까 자소서 한 줄도 못 쓰겠고. 왜 그렇게 살았는지 돌이켜보니 반성하게 됐어.


근데 그래도 대학 간 걸 후회하진 않아. 정말 좋은 인연들을 많이 만났거든. 다양한 분야로 뻗어나가고 있는 동기들, 친구들 보면 든든해. 그리고 내가 내 대학생활에 만족했다면 지금의 진로를 선택하게 되지 않았을 수도 있겠지? 그래서 오히려 감사해. 다른 꿈을 꾸게 해줬으니까.


Q. 한의사라는 일이 너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해?

그건 아냐. 가슴이 두근거리는 느낌은 지금까지 느껴 본 적 없는 것 같아. (그런 두근거림 없이도 진로를 결정할 수 있었던 계기는 뭐야?) 흠, 그러게. 일단 내가 직업을 선택하는 조건 중에 하나는 내 성향인데, 나는 스스로 성과를 내는 것보다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거나 좋은 영향을 끼치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늘 생각했어. 남을 도울 수 있는 수많은 직업들이 있는데, 그 중에 미래가 보장된 전문직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고, 그런 생각을 한창 할 때 내가 마침 한의원에 다니고 있었거든?


2021년, 한창 코로나 때문에 비대면 수업을 할 때였어. 집에 하루종일 앉아서 과제하느라 허리가 너무 아파서 집 근처 한의원에 갔는데, 그 한의사 분이 너무 친절하신 거야. 그리고 몸을 뜨듯하게 지지고 나니까 너무 힐링되더라고. 그 뒤로 별로 안 아팠는데도 그 느낌이 너무 좋아서 두 세번 더 갔어. 좁은 공간에서 별 거 아닌 것 같지만 누군가를 이렇게 힐링시켜줄 수 있다는 게 와닿았어.


또 중요한 계기 하나는, 우리 엄마도 동양의학을 진짜 좋아하시거든. 부황 뜨는 걸 좋아하셔서 집에 부황기도 있고, 목욕탕도 매일 가셔. 그래서 내가 한의사 되면 ‘울 엄마가 진짜 좋아하겠다’, ‘드디어 엄마한테 효도할 수 있겠다!’ 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 때 김지원 아나운서 사례도 알게 되면서 하나 둘 씩 연결됐던 것 같아. 생각해보니까 고3 때도 다리가 저려서 침 맞으러 한의원에 갔는데, 엉덩이에 침을 맞았는데 발 끝까지 피가 쫙 도는 느낌이 드는 게 신기했던 기억도 있다.


Q. 한의대 안 갔으면 지금 뭐 하고 있었을 것 같아?

음, 호주로 워킹홀리데이 갔을 것 같아. 공부에 너무 시달리다보니까 그냥 도망가고 싶다는 생각이 계속 들었었어. 안 되면 호주에 가야겠다. 떠나야겠다. 이 생각 뿐이었어. 내가 지금껏 한국에서 너무 좁은 시야로만 재미없게 살아왔던 것 같아서, 일단 외국을 좀 나가보자는 생각이 들었어. 그렇게 됐으면 인생이 지금과는 완전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을 수도 있겠지? 아니면 그냥 어영부영 취업을 했을 것 같은데, 대기업은 못 갔을 것 같고, 불만족스러워서 금방 때려쳤을 수도 있을 것 같아.


Q. 남들보다 늦었다는, 나이에 대한 강박은 없어?

막학기에 수능 준비하면서는 그래도 스물 셋, 스물 넷 정도였으니까 지금 되면 잃을 게 없다는 생각이었는데, 20대 중후반이 되니까 합격하기 전까진 불안했었어. 근데 막상 한의대 오니까 나보다 나이 많은 분들이 엄청 많으신 거야. 내가 동기들 중에 어린 편이야. 인생 2회차 준비하러 오신 30대, 50대 분들도 계셔. 나보다 어린 20대 초반 친구들은 3분의 1 정도밖에 안 되는 것 같아.


Q. 어떤 한의사가 되고 싶어?

나는 그냥 지방에 조용하게 내 의원 하나 차리는 게 꿈이야. 동네 어르신들 많이 오시는. 그리고 엄마 전속 한의사 돼서 효도 하고 싶어. (웃음)


Q. 직업을 떠나서는 어떤 삶을 살고 싶어?

내가 전문직이 되고 싶었던 이유, 돈을 많이 벌고 싶었던 이유는, 나를 위해서 돈을 쓰고 싶어서가 아니라 내 친구들한테 베푸는 삶을 살고 싶어서거든. 나에게는 친구들이랑 같이 보내는 시간이 너무 소중하고, 내 행복의 원천이야. 친구들 만나서 맛있는 거 사주고 싶고, 선물 좀 비싼 거 해주고 싶은데, 그럴려면 돈을 많이 벌어야 할 것 같고. (웃음) 대단한 거 원하는 거 없고, 진짜 인생에 딱 그거만 있으면 행복할 것 같다.


Q. 가장 힘들었던 2022년의 너에게 한 마디 해준다면?

힘들지? 버텨. 해는 뜬다.



<돌연변이 - 그 시작은 어디였는가>는 '이상한' 진로를 선택한 돌연변이 20대들을 직접 인터뷰하고 그들의 시선을 글로 엮어낸 모음집입니다. 사회적 기준에서 벗어난 진로를 선택할 용기가 있었던 청년들, 그 청년들의 '시작'은 도대체 무엇이었을지, 어디서 그런 '계기'가 생겨난 건지, 직접 만나 인터뷰하고 인사이트를 글로 풀어내고 있습니다.


사회가 정의하는 일반적인 성공의 길이 아니더라도, 과감하게 나의 길을 찾아 발을 뗀 사람들의 이야기가 필요합니다. 이미 성공의 궤도에 올라탄 직업인의 이야기가 아닌, 용기있게 진로를 결정한 것만으로 귀감이 되는 '시작하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입니다.


인터뷰, 출판 등의 문의 및 협업제안은 hyunjoly1573@gmali.com로 남겨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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