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 후 엘피바로 출근하는 - 직장인의 투잡 일기
가끔 손님이 떠난 가게를 둘러볼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면 마치 잔상이 남은 것처럼 빈 테이블에 사람들의 모습이 어른거립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저 자리에서 웃고 떠들던 이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생각하면 괜히 묘한 기분이 듭니다. 이제껏 일하며 나는 몇 명의 손님을 마주했을까 하는 상상도 가끔 해봅니다. 이렇게나 많은 이들을 만났는데 여전히 서울에 모르는 사람이 태반이라는 게 신기합니다. 이 지구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걸까요. 저는 계속 상상을 이어갑니다. 손님과 나는 정말 초면일까, 사실 출근길 사당역에서 몸을 부딪쳤던 사이는 아니었을까, 혹시 다른 가게에서 내가 직원으로 마주했던 이는 아닐까, 어쩌면 먼 친척의 친척일 수도 있지 않을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 사소한 생각들이 근무 중 제 작은 즐거움입니다.
손님의 작은 행동을 통해 원하는 걸 정확히 눈치챌 때 또한 희열을 느낍니다. 아마 장기 알바 경험이 있는 분이라면 누구나 공감하실 거예요. 자리에서 번쩍 일어나 나오더니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는 저 손님, 95%의 확률로 화장실을 찾고 있습니다. 멀쩡히 술을 마시던 손님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주머니를 뒤적이며 밖으로 나갈 때, 93%의 확률로 담배를 피우러 가는 중이네요. 커플 중 남성만 나갈 경우와 4명 이상의 그룹 중 일부만 모여 나갈 경우 확률은 거의 99%로 올라갑니다. 이때 우리 알바생의 숙명은 바로 손님이 먼저 묻기 전에 화장실 위치를 가리키고, 나가려는 손님을 붙잡으며 “흡연실 안에 있어요!”하고 기쁜 소식을 알리는 것. 십중팔구는 예상 적중으로, 손님들의 환해지는 얼굴을 볼 수 있습니다.
허공에 네모를 그리는 손님은 89%의 확률로 메뉴판을 요청 중인데요. 다만 그리는 네모의 크기가 수상하게 작다면, 신청곡 종이를 요청하는 게 아닐지 의심해 봐야 합니다. 이 외에도 알바생을 일하는 내내 예리하게 감각을 세워둬야 해요. 기본 안주 팝콘을 요청 전에 리필해주는 건 당연하고요. 자신의 컵을 가리키며 집게손가락을 펴서 보여줄 땐 ‘한 잔 더’를 고요히 외치는 주문이므로 그분의 직전 술이 무엇이었나 번개처럼 떠올려야 합니다. 맥주 컵이 든 냉장고 앞에서 서성이는 분이 있다면 아마 자신이 택한 맥주의 전용 잔을 찾는 것일 겁니다. 이럴 땐 재빠르게 그분의 맥주를 스캔한 뒤 알맞은 잔을 찾아 건네 드립니다. 나의 작은 친절으로 눈앞에서 전구가 켜지듯 환해지는 얼굴을 볼 수 있다는 건 얼마나 귀한가요. 이건 분명한 특권입니다. 그리고 뒤따르는 한마디, “감사합니다“. 이 작고도 손쉬운 보답이 노동자의 숨통을 틔워준다는 사실을 알고 있나요? 참으로 고마운 한마디입니다.
비단 저뿐 아니라 어느 정도 숙련된 알바 또는 직원이라면, 손님을 향한 ‘예민 레이더’는 필수 장착템일 겁니다. 이에 따른 부작용도 있습니다. 가끔 손님들의 대화가 지나치게 잘 들린다는 것! 일전에 바에 앉으신 두 여성 손님께서 낯 뜨거운 연애 이야기를 아무렇지 않게 이어가시는 바람에 곤란했던 적이 있습니다. 함께 힘들어(?)하셨던 40대 사장님께 “저희가 NPC로 보이나 봐요”라고 하자 사장님은 그 말에 격하게 공감하시더니 지금까지도 유사 상황에서 그 얘기를 꺼내십니다. 마치 전부터 표현하고 싶었는데 이제야 방법을 알았다는 듯 말이죠. “쟤네도 우리가 NPC인줄 아나보다.” 하시면서요.
그러니 어느 가게든 방문하신다면 조금은 주의하시는 걸 감히 추천해 드립니다. 알바생과 직원의 입장을 남들보단 잘 이해하는 입장에서 드리는 말씀이에요. 좋은 가게일수록 일 잘하는 직원이 있고, 그런 직원일수록 레이더는 바짝 올라가 있습니다. 이들은 생각보다 여러분의 말들이 잘 들리는 상태일 테니 (절대 일부러 듣는 게 아니고요!) 무엇이든 밖에서 하기 조심스러운 말은 안 하는 게 좋답니다. 물론 굳이 신경 쓰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진짜 베테랑 직원이라면 사적인 이야기에 한해 레이더를 차단하는 능력이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저 역시 그 경지에 이르게 된다면 또다시 글을 써보아야겠습니다. 하지만 아직은 사방의 손님들을 향해 레이더를 켜놓을 수밖에요. 더 기민하게 움직이기 위한 조치이며 부작용은 많지 않으니 안심해 주세요. 모쪼록 앞으로도 손님의 사소한 움직임에 반응하는 직원이고 싶습니다.
조금 먼 미래엔 ... 그런 사장이고 싶고요. :)
*주 1-2회 엘피바 알바생으로 사는 직장인의 투잡 라이프를 들려드립니다. 여기가 어딘줄 아시는 분이 있다면 사장님껜 부디 비밀로 해주세요. 아직 말씀을 못드렸습니다.. (단독 행동 주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