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 균, 쇠> - 제러드 다이아몬드

현대 문명의 불평등은 어디에서 시작되는가?

by 근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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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명이 제국을 무너뜨린 날


1532년 11월 16일, 페루 카하마르카.


프란시스코 피사로가 이끄는 스페인 병사 168명이

잉카 제국의 황제 아타우알파를 생포했다.

광장에는 수천 명의 잉카 수행단이 있었고,

주변 고지대에는 수만 명의 잉카 정예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스페인 측 사망자는 0명이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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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리의 질문


1972년, 뉴기니.

진화생물학자 재러드 다이아몬드는 뉴기니의 현지 정치인 얄리에게

한 가지 질문을 받았다.


"당신네 백인들은 그렇게 많은 화물을 만들어서

뉴기니까지 가져왔는데,

우리 흑인들은 왜 그런 걸 만들지 못한 겁니까?"


이 질문은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었다.

왜 유럽인이 아메리카를 정복했고,

아메리카 원주민이 유럽을 정복하지 않았는가.

왜 어떤 대륙은 총과 강철과 문자를 만들었고,

어떤 대륙은 만들지 못했는가.


인류 역사에서 가장 불편하고 근본적인 질문이다.


이 질문에 대한 답으로

인종적 우열이나 민족적 성향등을 들먹이는 사람들이 여전히 있다.

간단히 생각해보면 꽤나 설득력이 있지만,


"만약 근면성실하다고 생각하는 우리가, 그들이 사는 환경에서 살았다면 ? " 이라는 질문을 하면


그런 방식은 근본적인 해답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다이아몬드는 그 대답이 틀렸음을 증명하기 위해

25년을 보냈다.



25년의 집착 — 재러드 다이아몬드라는 사람


다이아몬드의 커리어를 알면 이 책이 다르게 읽힌다.


그는 원래 생리학자였다.

하버드에서 생화학을 전공하고,

케임브리지에서 담낭막의 이온 수송을 연구해 박사학위를 받았다.

UCLA 의과대학 생리학 교수로 재직하며

학술 논문을 쓰는 전형적인 과학자의 삶을 살고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또 다른 삶이 있었다.

일곱 살 때부터 시작된 탐조(探鳥)에 대한 열정.

1964년 첫 뉴기니 방문 이후,

그는 생리학 실험실과 열대 우림을 오가며

조류학 논문을 동시에 발표하는 이중 생활을 이어갔다.


뉴기니에서의 경험은 새에 대한 연구 이상의 것을 남겼다.

UCLA 매거진 인터뷰에 따르면, 다이아몬드는 뉴기니에 도착하기 전

현지인들이 '원시적'일 것이라는 편견을 갖고 있었으나

실제로 만난 그들은 돌도구를 사용할 뿐

지적으로는 서구인과 다를 바 없이 영리하고 정교했다.

(*UCLA Newsroom, "The Landscape of Destiny" 참조)


다이아몬드는 책에서 이렇게 썼다.

"뉴기니인들은 평균적으로 산업화된 민족보다

아마 더 지적일 것이다."

그렇다면 왜 한쪽은 강철을 만들고 한쪽은 돌을 쓰는가.

이 의문이 얄리의 질문과 만나 하나로 수렴한다.


흔히 "얄리의 질문이 다이아몬드의 인생을 바꿨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건 절반만 맞는 이야기다.


1985년, 맥아더 펠로우십을 받은 뒤

그는 심각한 우울증에 빠졌다.

"나는 담낭에 인생을 낭비하고 있었다."

1987년, 쌍둥이 아들이 태어났을 때 깨달았다.

아이들의 미래는 담낭의 이온 수송이 아니라

환경과 역사에 달려 있다는 것을.


질문 하나가 인생을 바꾼 게 아니라

25년간 축적된 관심이 한 질문을 만났을 때 폭발한 것 아닐까?


얄리의 질문은 원인이 아니라 촉매였다.

다이아몬드는 담낭 연구자에서 지리학자로,

생리학 교수에서 문명사 저술가로 변신했다.

1997년, 그 결과물이 세상에 나왔다.

《총, 균, 쇠: 무기·병균·금속은 인류의 운명을 어떻게 바꿨는가》.

이듬해 퓰리처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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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균, 쇠> — 모두가 아는 답


다시 카하마르카로 돌아가자.


168명의 스페인 병사가 잉카 제국의 심장을 관통할 수 있었던

직접적 이유는 누구나 이해할 수 있다.

총(화기와 대포), 균(전염병), 쇠(강철 무기와 갑옷).


그런데 팩트를 정밀하게 들여다보면

이 제목은 약간의 과장을 품고 있다.


다이아몬드는 스페인군이 소수의 화기와 소형 대포를 보유하고 있었다고 서술한다.

*군사사 연구에 따르면 실제 화승총(아르케부스)은 3정으로 추정되며,

2차 연구에 따라 2~4정으로도 추정된다.

2~3분에 한 발 장전하는 이 무기는 실전에서 결정적 역할을 하기 어려웠다.

대포 역시 심리적 효과 이상의 전술적 기여는 제한적이었다.


그날 진짜 결정적이었던 것은

강철 검과 갑옷, 기병의 기동력,

그리고 무엇보다 기습이라는 전술 자체였다.

아타우알파의 광장 수행단 대부분은 비무장 상태였다.

이것은 전투가 아니라 기습이었다.


균의 역할도 다시 봐야 한다.

천연두가 한 일은 카하마르카 광장에서 벌어진 게 아니다.

그보다 약 5~7년 전, 천연두가 잉카 황제 우아이나 카팍을 죽였고,

그 죽음이 제국을 둘로 쪼개는 내전을 촉발했다.

아타우알파가 카하마르카에 있었던 것 자체가

내전 승리 직후의 상황이었다.

균은 전투의 무기가 아니라 제국을 약화시킨 보이지 않는 전제 조건이었다.


이 구분이 중요한 이유가 있다.

다이아몬드 자신이 책에서 가장 강조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기 때문이다.

총, 균, 쇠는 정복의 직접적이고 표면적인 도구이자 원인이다.

유럽이 아메리카를 정복한 직접적 수단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다이아몬드가 정말로 답하려 한 질문은 다른 것이다.

왜 유럽인만 총과 강철을 만들었고,

왜 유라시아 대륙에서만 가축으로부터 전염병 면역이 생겼는가.

표면적으로 설득력있는 원인말고 근본적인 핵심 원인을 밝히는 것.

이것이 이 책의 진짜 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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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적 선물 — 가로축이라는 가속기


다이아몬드의 답은 하나의 단어로 수렴한다.

지리.


논증의 사슬은 이렇다.


유라시아 대륙에는 가축화·작물화가 가능한 동식물 종이

다른 어떤 대륙보다 압도적으로 많았다.

비옥한 초승달 지대에서 밀, 보리, 완두콩이 작물화되었고,

소, 양, 돼지, 말이 가축화되었다.

이것은 인간의 능력 차이가 아니라 생물지리학적 우연이다.

어떤 대륙에 어떤 종이 살고 있었느냐는

순전히 지질학적·기후적 사고(事故)였다.


농업은 에이커당 식량 생산을 수렵·채집의 수십 배로 끌어올렸다.

잉여 식량이 생기면 모든 사람이 먹을 것을 찾아 헤맬 필요가 없어진다.

인구가 밀집하고, 분업이 시작된다.

장인, 관료, 군인, 학자가 탄생한다.

야금술이 발전하고, 문자가 생기고, 중앙집권적 정부가 만들어진다.

가축과 함께 사는 삶은 인수공통감염병에 대한 면역도 선물했다.


이 연쇄 반응의 종착점이 총, 균, 쇠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반론이 가능하다.

아메리카에도 농업은 있었다.

옥수수, 감자, 호박.

아프리카에도 수수와 참깨가 있었다.

농업 자체는 유라시아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다이아몬드는 이 반론에 대한 답으로

대륙의 축 방향이라는 가설을 제시한다.


유라시아는 동서로 길다.

같은 위도대가 이베리아 반도에서 한반도까지 이어진다.

같은 위도는 같은 일조량, 같은 계절 패턴, 비슷한 기후를 의미한다.

메소포타미아에서 작물화된 밀이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유럽에서도, 인도에서도, 중국에서도 자랄 수 있었다.

작물과 가축과 기술이 동서로 빠르게 확산되었다.


반면 아메리카와 아프리카는 남북으로 길다.

위도가 바뀔 때마다 기후가 달라진다.

열대에서 온대로, 온대에서 한대로.

메소아메리카에서 작물화된 옥수수가 북아메리카로 전파되는 데

수천 년이 걸렸다.

사하라 사막은 아프리카를 남북으로 갈랐다.


동서축은 확산의 고속도로였고,

남북축은 확산의 병목이었다.


이 가설은 결론 자체가 아니다.

"왜 유라시아만 농업이 빠르게 확산되었는가?"에 대한 답이며,

전체 논증의 핵심 경첩이다.

가축화 가능한 종의 다양성이 출발점이라면,

축 방향은 그 출발의 이점을 문명적 격차로 변환시킨 가속기였다.


하나의 변수로 문명의 속도 차이를 설명하는 방식,

이것이 이 책이 30년 가까이 읽히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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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의 자격, 그리고 균열


《총, 균, 쇠》는 1997년 출간 이후 퓰리처상을 수상했고,

30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되었으며,

인류 문명을 다루는 교양서의 대명사가 되었다.


이 책이 고전의 반열에 오른 이유는 분명하다.

인종적 우열이라는 위험한 대답 대신

환경적·지리적 변수라는 과학적 프레임을 제시했다.

"왜?"라는 질문을 회피하지 않으면서도

인종주의에 기대지 않는 답을 구축했다는 것,

이것만으로도 이 책의 존재 가치는 충분하다.


그러나 고전이라고 해서 완전한 것은 아니다.


가장 강력한 비판은 환경 결정론이라는 지적이다.

지리가 모든 것을 결정했다면,

같은 유라시아 안에서 왜 유럽과 중국의 운명이 갈렸는가.

두 지역 모두 동서축의 혜택을 받았고,

비슷한 시기에 농업 혁명을 경험했다.

그런데 산업혁명은 유럽에서 일어났다.

다이아몬드의 프레임만으로는 이 차이를 설명할 수 없다.


2024년 케임브리지 대학 연구팀은

"Geography is not destiny"라는 제목의 논문에서

다이아몬드의 축 가설을 정량적으로 검증했다.

결론은 축 방향만으로는 농업 확산의 속도 차이를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제도, 문화, 정치 구조 같은 변수들이

지리만큼이나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인류학자들의 비판도 날카롭다.

다이아몬드가 비유럽 문명의 복잡성을 과소평가했다는 것,

유럽 중심의 시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

"총, 균, 쇠"라는 프레이밍 자체가

정복을 필연적인 것으로 만든다는 것.


이 비판들은 타당하다.

그리고 동시에, 이 비판들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이 책의 영향력을 증명한다.


다이아몬드가 옳은지 아닌지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

"왜 불평등한가?"라는 질문의 답을 인종이 아닌 환경으로 돌린 것,

그리고 그것이 표면적 이유가 아닌 근본적인 원인을 찾아 설득력있게 제시한 점,

그 전환 자체가 이 책을 고전으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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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의 무게


교사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으로서

이 책을 읽으며 계속 돌아온 생각이 있다.


다이아몬드의 결론이 맞다면,

문명의 격차는 능력의 차이가 아니라

출발선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다.

어떤 대륙에 태어났느냐가

어떤 기술을 가질 수 있느냐를 결정했다.


이것은 불편한 결론이다.

노력이나 의지와 상관없이

지리적 우연이 운명을 갈랐다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더 불편한 질문이 남는다.

그 지리적 운명을 인식한 뒤에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다이아몬드는 답을 주지 않는다.

그의 책은 "왜?"에 답할 뿐, "그래서 어떻게?"는 말하지 않는다.


나는 이 빈자리가 교육의 자리라고 생각한다.


"출발선이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을 불편해하지 않고 인정하는 것.

그 다름이 능력의 차이가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

그리고 그 인식 위에서 무언가를 시작하는 것.


얄리의 질문에 다이아몬드는 25년을 들여 답했다.

그 답이 완전한지는 아직 논쟁 중이다.

<총, 균, 쇠>가 던진 해답이 정답이 아니라고해서 이 책은 고전이 아닌가?

절대 아니다.


<총, 균, 쇠>가 고전으로 인정받은 이유는

질문을 회피하지 않았던 점,

쉬운 답 대신 어렵지만 근본적인 답을 위한 끈기와 집중을 작가가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특히, 그가 보여준 시간(역사)와 공간(지리)의 통합적인 사고는 현대의 석학이라 인정받는

유발 하라리에게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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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카하마르카 전투 및 무기 구성 --

1. Britannica, <Battle of Cajamarca (1532)>

https://www.britannica.com/event/Battle-of-Cajamarca-1532

2. War History Online, <Spanish Mercenaries Outnumbered 500-1>

https://www.warhistoryonline.com/instant-articles/the-battle-of-cajamarca-1532.html

3. World History Encyclopedia, <Weapons of the Conquistadors>

https://www.worldhistory.org/article/2042/weapons-of-the-conquistadors/


-- 다이아몬드 커리어 및 인터뷰 --

4. Asahi Glass Foundation, <Jared Diamond — Blue Planet Prize 2019>

https://www.af-info.or.jp/better_future/html/2017-2021/2019/Prof_diamond/2019b_diamond1.html

5. UCLA Newsroom, <The Landscape of Destiny — Jared Diamond>

https://newsroom.ucla.edu/magazine/landscape-of-destiny-jared-diamond

*뉴기니 첫 방문 시 편견 및 인식 변화 관련 참조


-- 학술적 비판 및 반론 --

6. Living Anthropologically, <Guns, Germs and Steel Distorts History>

https://www.livinganthropologically.com/archaeology/guns-germs-and-steel-jared-diamond/

7. Cambridge University Press, <Geography is not destiny>, 2024

*축 방향 가설의 정량적 검증 및 한계 지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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