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살아갈 가치가 있는가?
오늘날 우리는 불확실성과 불안으로 가득 찬 시대를 살고 있다. 수많은 가치들이 여기저기서 극단적으로 충돌하고 급변하는 사회 속에서, 개인은 삶의 의미와 가치에 혼란을 느낀다. 또한 자본주의 사회는 우리를 거대한 시스템의 부속품으로 만들고 있다. 그리고 익명의 여론과 SNS의 시선들에 휩싸여 우리는 자신만의 고유한 가치를 를 잃어가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현대인의 삶에서 주체성과 존재 이유에 대한 깊은 질문은 자연스럽게 나타나지만, 이에 대한 해답을 찾기는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존재에 대한 진지한 질문을 마주한 인간은 필연적으로 '허무주의'를 거쳐갈 수 밖에 없다. 이러한 시대 속에서 알베르 카뮈의 철학 에세이 『시시포스 신화』는 우리에게 삶의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답을 제시할 수 있다.
시시포스 신화는 "인생은 살 가치가 있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성찰의 기회를 제공한다. 그럼 만약 살아갈 가치가 없는 인생을 자살로 마치면 될까? 카뮈는 이 물음에 '안된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는 단순히 "살아야 한다"고 하지 않는다. 대신 부조리한 우리의 삶에 반항이라는 길을 제시하며 묵묵히 그리고 성실히 살아갈 것을 제안한다.
카뮈는 삶의 무의미함을 직시한다. 하지만 절망에 굴복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부조리 속에서 삶의 가치를 찾아내는 방식을 제시한다. 그의 사상은 현대인이 겪는 실존적 불안과 허무감에 용기와 지침이 되어줄 수 있다.
"나는 삶의 의미가 수많은 질문들 가운데서도 가장 절박한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알베르 카뮈 -『시시포스 신화』 18쪽
알베르 카뮈는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이자 20세기 프랑스 문학 및 철학의 중요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는 초기에는 실존주의자로 분류되기도 했지만『이방인』과 『페스트』 등 여러 대표작을 통해 자신만의 '부조리 철학'을 펼쳐 보였다.
그리스 신화 속 시시포스는 신들을 기만한 죄로 영원한 형벌을 받는다. 그는 커다란 바위를 산꼭대기로 밀어 올리지만, 바위는 정상에 닿는 순간 다시 아래로 굴러떨어져 이 작업을 영원히 반복해야 한다. 무용하고 허무한 노동의 영원한 반복은 신들이 생각한 가장 가혹한 형벌이었다.
카뮈는 그의 철학 에세이 『시시포스 신화』에서 이 시시포스의 운명을 '부조리한 세계에 던져진 인간의 삶'에 비유한다. 이를 통해 인간이 겪는 근본적인 고통과 모순인 부조리를 이야기하며 시시포스를 부조리한 영웅의 전형으로 제시한다.
현대에 사는 우리도 시시포스처럼 무용하고 허무한 노동의 반복에 지쳐가는 것은 아닐까? 또 근본적으로, 우리가 하는 일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 왜 우리는 '행복한 시시포스'가 되어야 하며,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을까?
카뮈는 '부조리란 무엇인가'에 대해 철학적으로 정의내리지 않는다. 카뮈에게 부조리란 '의미를 찾으려는 인간의 욕구'와 '침묵하는 세계의 비합리성과 외면' 사이의 화해할 수 없는 대립에서 비롯되는 감정이다. 우리는 삶에서 명확한 의미와 정의를 갈망한다. 하지만 세계는 그에 대한 어떤 답도 주지 않는다.
부조리의 감정은 여기에서 솟아난다.
카뮈가 말한 대로, 삶은 비합리적이다. 오히려 악은 처벌받지 않고, 선행은 보상받지 못한다. 좋은 사람들에게 불행이 닥치고 나쁜 사람들에게 좋은 일이 일어나는 비합리적인 현실을 마주한다. 삶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던 부분이 낯설게 느껴지기도 하고, 절대적이라 믿었던 가치가 한 순간에 부정되기도 한다.
이러한 부조리는 일상적인 반복 속에서 문득 '왜?'라는 의문이 솟아오르고, 익숙했던 세상이 갑자기 낯설게 느껴질 때 인식되기 시작한다. 카뮈에게 이런 부조리의 경험은 인간으로 하여금 세계의 본질을 경험하게 하는 '존재론적 사건'이다. 부조리의 인식을 통해 개인은 지식과 문화, 도덕이 허구적임을 꺠닫고 지금까지 믿어왔던 세계 해석이 왜곡되었음을 느끼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전통적인 형이상학적 철학이나 종교는 부조리로부터의 도피나 초월을 추구한다. 카뮈는 이를 '철학적 자살'에 해당한다고 비판한다. 그는 희망 또한 삶 그 자체를 위한 것이 아니라, 삶을 초월하고 승화시키는 거창한 관념을 위한 '속임수'라고 보았다. 카뮈는 부조리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삶의 부조리에 대한 도피가 아니라, 부조리를 있는 그대로 직시하는 데 있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매일 반복되는 업무에서 무의미함을 느낄 때 "언젠가는 더 의미 있는 일을 하게 될 거야" 또는 "내가 하는 일에는 이런 의미가 있어"라는 미래의 희망이나 거창한 의미 부여로 도피하지 않고, 그 무의미함을 인정하면서도 자신만의 방식으로 묵묵히 일에 임하는 것이다.
"참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 바로 자살이다." 라는 삶의 문제에서 카뮈의 답은 ‘반항'이다.
부조리한 삶 앞에서 카뮈는 세 가지 선택지를 제시한다. 자살, 희망(철학적 자살), 그리고 반항이다. 그는 자살이 부조리에 대한 '수긍'이자 삶의 가치가 없음을 인정하는 행위라고 본다. 희망 또한 부조리를 회피하고 미래나 신에게 구원을 기대하는 '비약'이라고 보며 모두 거부한다.
"숱한 철학적 입장들 중에서도
유일하게 일관된 철학적 입장이라면 곧 반항이겠다."
알베르 카뮈 -『시시포스 신화』 96쪽
카뮈가 제시하는 유일하게 일관성 있는 해답은 바로 '반항'이다. 여기서 반항은 삶에 대한 소극적인 거부가 아니다. 인간에게 전제된 부조리를 똑바로 직시하고 그 속에서 삶을 적극적으로 이어 나가는 주체적인 태도를 의미한다. 우리가 부조리를 인식하지 못한다면 우리 삶은 주어진대로 흘러가겠지만, 부조리를 인식하고 인정하며 반항하는 순간 주체적인 삶, 진정한 자유가 시작된다.
이처럼 반항은 삶에 가치를 부여하고 인간 존재의 위대함을 회복시킨다. 부조리한 인간은 세계와 개인의 긴장을 포기하지 않고 유지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이다. 이는 단순한 체념이나 세상에 대한 굴복이 아니다. 무의미한 세상에서 삶을 포기하거나 거짓된 의미와 희망을 통해 도피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반항'하는 삶은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일까? 카뮈는 『시시포스 신화』에서 그 답을 위해 여러 '부조리한 인간'의 초상을 제시한다.
그렇다면 부조리를 끌어안고 '반항'하며 살아가는 삶은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일까? 카뮈는 『시시포스 신화』에서 그 답을 위해 여러 '부조리한 인간'의 초상을 제시한다. 이들은 각자의 영역에서, 저마다의 방식으로 희망이나 도피 없이 오직 주어진 삶을 최대한의 양(量)으로 살아내는 인물들이다.
첫째는 돈 후안이다. 그는 영원하거나 유일한 사랑이라는 숭고한 가치를 믿지 않는다. 그런 질적인 의미를 추구하는 대신, 그는 수많은 여인과의 만남을 통해 삶의 양적인 측면을 극대화한다. 그의 반항은 "의미 있는 단 하나의 사랑은 없다. 그러므로 나는 모든 사랑을 경험하겠다"는 태도에 있다. 미래나 구원을 위해 현재를 희생하지 않고, 매 순간의 감각과 경험에 모든 것을 쏟아붓는 것. 이것이 바로 돈 후안이 의식의 영역에서 부조리한 자유를 실현하는 방식이다.
"자신의 삶, 자신의 반항, 그리고 자신의 자유를 느끼는 것,
그것도 최대한으로 많이 느끼는 것,
이것이야말로 사는 것,
그것도 최대한 많이 사는 것이라 하겠다."
『시시포스 신화』 109쪽
둘째는 배우다. 그는 무대라는 한계 속에서 수많은 타인의 삶을 살아낸다. 배우에게 영광이란 현재의 명성일 뿐, 영원히 기억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그는 누구보다 잘 안다. 그는 지성의 영역에서 삶의 다양성을 체험하며, 무수한 죽음과 재생을 반복한다. 이를 통해 삶의 연극적인 본질을 꿰뚫어 보고, 유한한 삶 속에서도 다양한 존재를 경험하며 부조리에 반항한다.
셋째는 정복자다. 그는 영원한 가치나 사후 세계보다 지금 여기의 투쟁을 선택한다. 그의 반항은 신이나 역사의 섭리에 맞서 인간적인 것을 지키려는 정신의 영역에서 일어난다. 그는 패배할 것을 알면서도 항거하며, 자신만의 신념을 통해 인간 존재의 의미를 스스로 창조한다. 죽음의 필연성을 인정하면서도 모순과 정면으로 대결하는 그의 모습에서 카뮈는 인간 존재의 위대함을 발견한다.
넷째는 창조자, 즉 예술가다. 그는 가장 부조리속에서 사는 인간이다. 어차피 사라질 유한한 작품에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붓기 때문이다. 그는 시공간의 한계를 알면서도 부질없는 창조를 실천하며 공허를 자신의 색채로 물들인다. 작품의 유한성을 인정하면서도 창조를 멈추지 않는 행위, 그 자체가 바로 부조리를 궁극적으로 실현하는 길이며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내는 반항이다.
마지막으로, 이 모든 부조리한 인간상을 완성하는 가장 완벽한 영웅이 바로 시시포스다. 그는 끝없이 반복되는 무의미한 형벌이라는 부조리의 조건 그 자체에 놓여있다. 돈 후안의 열정, 배우의 지성, 정복자의 정신, 창조자의 실천이 시시포스 안에서 하나로 통합된다.
그는 자신의 비참한 조건을 완전히 '의식'하면서도, "내일은 바위가 꼭대기에서 멈추겠지?" 같은 헛된 희망을 품지 않는다. 그저 묵묵히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에 '반항'하며 돌을 밀어 올린다.
"운명이란 오직 의식하게 되는 그 흔치 않은 순간들에 있어서만 비극적이다."
『시시포스 신화』 204~205쪽
바로 그 '의식'과 '반항'을 통해 그는 자신의 운명보다 우월해지고 신들보다 강해지는 것이다. 카뮈가 "산정을 향한 투쟁 그 자체가 한 인간의 마음을 가득 채우기에 충분하다."라고 말했듯이, 시시포스의 행복은 외부적인 목적이나 구원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주어진 부조리를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삶 그 자체에서 기쁨을 찾아내는 내면의 태도에서 비롯된다.
"그것 (시시포스가 돌을 산꼭대기로 올려야 하는 형벌)은 바로 이 땅에 대한 열정들 때문에 그가 치러야 하는 대가였던 셈이다."
『시시포스 신화』 203쪽
시시포스가 아내에게 광장에 자신의 시체를 버리라고 한 것은 다시 살기위해서 낸 꾀이다. 살고자 하는 의지, 그것 자체가 가장 극단적인 부조리이다. 인간 삶의 끝에 주어진 절대적인 부조리이자 극한의 부조리인 죽음을 피하려고 하는 시시포스의 꾀는 부조리에 대한 저항 죽음으로의 초대를 삶의 법칙으로 바꾸어놓는 진정한 '자유'와 '열정'이다.
카뮈의 『시지프 신화』를 읽으면서 나는 계속해서 니체의 철학이 떠올랐다.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니체와 카뮈의 사상이 차별화되는 미묘한 지점을 잘 이해하지 못했고 지금도 완벽하지는 않다. 두 사상가가 마주한 문제의식이 놀라울 정도로 닮아있기 때문이다. 절대적 진리나 의미가 사라진 세상에 홀로 선 인간의 모습을 그리는 것, 그 절망적인 조건에서 어떻게든 삶의 가치를 구해내려는 의지에서는 공통적인 시각을 보인다.
물론 카뮈의 부조리 철학과 니체의 허무주의는 서로 다른 철학이다. 하지만 두 철학자는 삶의 허무에서 시작하여 서로 다른 진단을 거쳐, 각자의 처방에 이르게 된다.
니체는 절대적 가치가 사라진 상태를 '허무주의'라고 불렀다. 그는 모든 것이 헛되다고 느끼며 무기력에 빠지는 '수동적 허무주의'를 거부하고 극복해야할 대상으로 보았다. 대신 낡은 가치를 스스로 파괴하며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능동적 허무주의' - 가치창조 - 를 추구한다. 니체는 우리가 능동적으로 낡은 가치를 부수고 그 폐허 위에서 자신만의 새로운 가치를 창조해야 한다고 말한다. 허무주의는 존재의 황량한 벌판이나 끝이 아니라, 자신만의 가치를 새롭게 창조할 수 있는 시작점이자 극복의 대상이다.
예를 들어, 니체적 교사는 단순히 교과서를 전달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는다. 같은 수업이라도 자신만의 방식과 교육철학에 따라 의미를 부여하고, 학생들에게 어떤 가치를 전해줄 것인지 스스로 정한다. 남들이 정해놓은 '성공한 교사'의 기준보다는, 자신이 생각하는 진정한 교육의 의미를 추구한다. 매 수업마다 자신만의 교육적 가치를 실현해 나가는 것이 그의 삶이다.
카뮈는 '부조리', 즉 의미를 찾으려는 인간과 침묵하는 세계 사이의 모순을 인간의 조건으로 보았다. 그리고 실존주의 자체도 하나의 '도피'라고 말했다. 카뮈가 니체를 직접적으로 비판한 점은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내가 생각했던 미묘한 차이는 바로 '가치 창조'이다.
"그런데 실존철학만 보더라도,
나는 이런 종류의 철학들이 모두 하나 같이 내게 도피를 권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알베르 카뮈 - 『시시포스 신화』 62쪽"
카뮈의 부조리 관점에서 보면 삶은 아무런 대답도 없고 아무런 합리성, 의미도 없다. 그런데 니체는 새로운 가치를 창조해내고 삶에서 의미를 발견해나가라고 말한다. '반항'의 삶에서는 애초에 아무 의미도 없는 삶에서 새로운 의미와 가치를 창조하는 것은, 부조리를 덮고 외면하고 도피하려는 시도라고 볼 수 있다. 의미와 가치를 창조하는 것도 어떻게 보면 구원에 대한 희망이기 때문이다.
카뮈적 교사는 교육 시스템의 모순과 한계를 누구보다 잘 안다. 자신의 노력이 절대적으로 옳지도 않고, 완벽하게 합리적이 않음도 알고 있다. 또한 자신의 열정에 세상이 반응해주지 않는 것도 인식하고 있다. 그럼에도 매일 수업을 준비하고, 교실에 들어가 학생들과 마주한다. 그 일상의 반복 자체가 부조리한 현실에 맞서는 그만의 조용한 반항이다.
이렇게 보니 두 사상은 겉으로는 비슷하지만 미묘하게 다른 길을 걷고 있음이 조금은 이해된다. 니체가 허무라는 병을 진단하고 '가치 창조'라는 약을 처방했다면, 카뮈는 부조리가 병이 아닌 인간의 조건이라 말하며 약을 거부한다. 약을 먹고 낫는 대신, 그 조건을 온전히 의식하며 살아내는 것 자체가 인간의 위대함이라고 본 것이다. 두 사상은 이렇게 다른 길을 걷고 있지만, 스스로의 힘으로 삶의 어려움 속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잃지 않으려 한다는 점에서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준다. 이들의 철학은 혼란스러운 오늘날, 우리 삶의 나침반이 되어줄 수 있다.
누군가는 카뮈의 부조리와 반항이, 희망이 삶에 주는 에너지와 긍정적인 부분들을 무시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그렇다면 인간은 뭘 바라며 살아가느냐"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일단 부조리를 직시하고 헛된 희망을 가지지 않는다고 해서 삶에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카뮈의 마지막 문장, "우리는 시시포스가 행복하다고 상상해야 한다"는 이 책의 가장 빛나는 정점이다. 카뮈는 시시포스가 행복한 이유가, 돌을 정상에 올려놨기 때문이 아니라고 말한다. 시시포스는 이미 부조리를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그가 돌을 밀어올리는 그 모든 과정 자체가 행복할 것이라고 말한다.
행복하고 싶은가?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각자의 돌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묵묵히 밀어올려야 한다.
나는 과거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노르웨이의 숲》에 대한 서평에서, 순수한 이상과 살아내야 할 현실 사이에서 방황하는 주인공에게 필요한 것은 둘을 이어줄 자신만의 매개체라고 이야기한 바 있다. 이는 비단 소설 속 주인공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 모두는 각자의 이상과 현실의 간극 속에서 고뇌한다. 카뮈가 말하는 '시시포스의 돌'은 바로 이 부조리한 현실과 그 안에서 의미를 찾으려는 나 자신을 이어주는, 우리가 찾아야 할 각자의 '삶의 방식' 그 자체이다.
삶을 살아내기 위해서 우리는 얼마나 많고 무거운 돌들을 얼마나 높은 꼭대기까지 올려놓았다가 떨어지는 것을 지켜보아야 할까?
그렇다. 시시포스의 돌은 이미 우리 앞에 놓여 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삶 그 자체이다. 매일 아침 일어나 향하는 직장이나 학교, 끝없이 반복되는 것처럼 보이는 가사 노동, 결코 완벽하게 끝낼 수 없는 공부나 자기 계발, 때로는 허무하게 느껴지는 인간관계의 유지. 이 모든 것이 바로 우리 각자의 돌이다.
나의 돌이 사회적으로 얼마나 가치 있는지, 혹은 도덕적으로 절대적인 선에 부합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나를 둘러싼 모든 세상과 일상들을 피할 수 없는 나의 현실로 받아들이고 묵묵히 밀어 올리는 삶의 행위 자체에 가치가 있다. 내 삶의 돌이 나의 '반항'과 '창조'의 대상이 되는 순간, 그 돌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된다.
"행복과 부조리는 같은 땅이 낳은 두 아들이다. 이들은 떼려야 뗄 수 없다." 『시시포스 신화』
행복한 삶을 위해서는 카뮈가 말하는 것 처럼 이 돌을 버리거나, 언젠가 돌이 사라질 것이라는 헛된 희망을 품는 것이 아니다. 일상이 사라지거나, 갑자기 내 일상의 모든 문제가 해결되리라는 막연한 희망은 우리를 더 지치고 힘들게 할 수 있다. 오히려 현재 나를 둘러싼 세상의 조건들이 나의 돌임을 명확히 인식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돌 아래에 어깨를 밀어 넣어 정상으로 돌을 굴려보자.
“무수한 산정들을 향한 투쟁, 그것만으로도 인간의 마음을 가득 채우기에 충분하다.“는 카뮈의 말처럼
부조리를 인식하고 받아들인 시시포스의 삶은 '현재'와 '충만함'으로 가득한 '자유로운 삶'이 되었다. 미래 또는 사후에 올 행복한 구원을 꿈꾸는 것도 아니고 과거에 대한 후회도 없이 오직 현재 눈 앞의 바위와 언덕, 자신의 숨결과 육체만이 살아 숨쉬는 삶이다.
결국, 각자의 돌을 회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하면, 허무하고 무용해 보이는 반복 속에서 비로소 웃으며 돌을 굴리는 현대의 시시포스가 될 수 있다.
우리는 "행복한 시시포스를 상상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