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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리뷰] - 한강, <희랍어 시간>

"중간태적 삶의 발견"

by 근쌤


한강-_-희랍어시간-001.png 작가 사진 출처: 매일 경제


수업 시간에 만난 남자와 여자. 이보다 더 좋은 로맨스 소설의 장치가 있을까. 하지만 한강의 < 희랍어 시간>은 이 설정을 단순한 사랑 이야기의 배경으로 삼지 않는다. 이 책은 읽는 과정에서 작가와의 치열한 소통이 필요하다. 작가가 던지는 문제의식과 근원적인 물음에 응답하지 않으면, 이 소설은 그저 무미건조하고 지루한 이야기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그 질문을 붙들고 함께 사유할 때, 비로소 이 소설은 우리에게 깊은 희열과 존재로서 새로운 가능성을 선사한다. 나는 이런면에서 한강 작가의 노벨상 수상 이유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고, 현대에 읽어볼 “고전”의 반열에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소설은 상실의 한가운데 선 두 인물을 통해 이 질문을 파고든다. 말을 잃어버린 여자와 빛을 잃어가는 남자. 그들의 이야기는 결핍을 넘어, 상실을 통해 역설적으로 열리는 새로운 감각과 관계의 가능성에 대한 탐구다. 그리고 그 소통의 열쇠는 바로 '희랍어'와 그 안에 잠들어 있던 고대의 문법, '중간태'에 있다.

나는 이 소설이 전하는 핵심 메시지가 "고통스러운 삶을 그 자체로 온몸으로 '살아내는' 것"이라고 느꼈다. 능동도 수동도 아닌 채로, 극복하려 애쓰지도 체념하지도 않으면서, 매 순간을 온전히 겪어내며 존재하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 모두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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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지 정보 및 가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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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간단 줄거리”

한강의 <희랍어 시간>에는 두 주인공이 나온다. 여자 주인공은 어려서부터 존재의 부정을 경험하고 한 번 말을 잃었다가 프랑스어를 통해 우연하게 다시 말을 되찾았다. 그 후 어머니의 죽음, 이혼과 양육권 상실 등을 겪으면서 다시 한 번 말을 잃었고, 이전의 경험을 살려 현실에서 사용하지 않는 희랍어를 배움으로써 다시 말을 찾고자 한다.

남자주인공은 중학생 때 독일로 이민을 가면서 차별과 주목을 경험한다. 이 때 희랍어라는 고대의 언어는 독일 학생들과 겨루고 동등해질 수 있는 통로였다. 그는 유전병으로 점점 시력을 잃어간다. 그는 시력을 완전히 잃기 전에 한국에 들어와서 희랍어를 가르치며 살아가고 있다.

두 주인공은 우연한 기회에 서로의 상황을 알게되고, 공감하며 가까워진다. 그 후 마지막에 여자주인공이 말을 되찾으면서 소설은 끝난다.


"무엇이 문제일까" - 작가의 문제의식


한강은 다양한 작품에서 체제, 사회, 언어로부터 트라우마를 얻은 주인공과 그들의 '살아냄'을 그려왔다. 나는 한강 작품의 공통적인 문제의식을 "이 삶에서 내가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가"라고 생각한다.

이번 작품의 두 주인공 역시 극단적 상실을 겪는다. 여자는 어머니의 죽음, 이혼과 양육권 박탈, 자살 시도라는 연쇄적 트라우마 끝에 언어를 잃었다. 남자는 유전적 시각 장애로 점차 빛을 잃어가며, 15살에 독일로 이민 간 후 이중적 소외를 경험했다. 이들의 상실은 단순한 불행이 아니라, 존재의 정당성 자체를 의심하게 만드는 근원적 상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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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삶은 당연한 게 아니었다. 우리는 우리 삶의 존재를 "당연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작가는 애초에 우리의 삶이 당연한지에 대해 묻는다. 삶의 당연성을 부정하는 순간 우리 삶은 송두리째 흔들린다.

“나의 존재는 당연한가?”

이것이 작가가 우리에게 묻는 첫번째 질문이자, 우리에게 던지는 근본적인 시사점이다. 이것을 시작으로 소설이 진행되면서 과연 "나는 왜 존재하는가?" 나아가 "고통스럽고 더러우며 상실이 가득한 세상이 살만한 가치가 있는가?"라는 물음과 "우리가 선택하지도 않은 삶을 어떻게 살아내야 하는가?"라는 문제의식이 깔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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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이 '투쟁'이라는 단어를 피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무기력하게 지내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매일매일을 그저 '살아내는' 조용하고도 치열한 투쟁이다. 숨을 쉬고, 밥을 먹고, 잠을 자는 일상의 모든 순간이 존재를 증명하는 행위가 되는 것이다. 주인공 두 명이 희랍어를 배우고, 가르치는 것 또한 삶에대한 조용한 투쟁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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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작가는 삶에 대한 사유를 자연스럽게 풀어가기 위해 상실과 고통에서 삶에 대해 살아갈 수밖에 없는 주인공을 설정했다.


"왜 이런 구조를 가졌을까?" - '살아냄'을 담아내는 형식


한강의 『희랍어 시간』은 독특한 서술 구조를 통해 각 인물의 '살아냄'을 질적으로 다르게 형상화한다. 여자 주인공과 남자 주인공에게 차별적 서사 시점을 적용하는데, 이는 단순한 기법적 실험이 아니라 각자의 '살아냄'의 방식을 효과적으로 드러내는 핵심 장치다.

3인칭으로 서술되는 여자 주인공의 이야기는 그녀의 절망적 상황을 객관적 거리감을 두고 조명한다. 어머니의 죽음, 이혼과 양육권 박탈, 자살 시도 등 연속된 비극적 사건들뿐 아니라 그녀가 걸어가는 더럽고 비참한 거리에 대한 묘사 등이 감정적 과잉 없이 절제된 문체로 제시된다. 이러한 담담한 서술은 역설적으로 그녀가 얼마나 치열하게 '살아내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말을 잃은 인물의 내면을 1인칭으로 서술하는 것은 태생적으로 모순적이기에, 3인칭 서술은 침묵 속에서도 계속되는 그녀의 '살아냄'을 효과적으로 포착한다.

반면 1인칭으로 서술되는 남자 주인공의 이야기는 시력 상실이라는 운명을 직접적이고 체험적으로 전달한다. 편지체 형식은 점점 악화되는 시력 때문에 현실과의 소통이 어려워진 그가 과거의 기억을 회상하고 돌이켜보며 내면으로 침잠하는, 현재를 '살아내는' 방식을 보여준다. 1인칭 서술임에도 과도한 감정적 토로가 아닌 담담한 회상이 이루어지는 것은, 시력 상실이라는 절망적 상황을 그 자체로 받아들이며 '살아내려는' 의지의 표현이다.

두 시점의 교차는 각자의 방식으로, 각자의 속도로, 그저 오늘을 견디며 내일로 나아가는 것을 보여준다. 그것이 바로 '살아냄'이다.


"왜 희랍어인가?" - '살아냄'의 수단


작가가 희랍어를 선택한 이유는 이 언어가 두 주인공에게 '살아냄'의 새로운 공간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희랍어는 세 가지 중요한 특징을 지닌다.

첫째, 죽은 언어다. 현재 일상생활에서는 사용되지 않으며, 오직 학문적 목적으로만 존재한다.

둘째, 낯선 문자 체계를 가진다. 알파벳과는 다른 고유한 문자는 시각적으로도 청각적으로도 완전히 새로운 세계를 연다.

셋째, 감정적 중립성을 지닌다. 모국어로부터 오는 일상의 상처나 트라우마와 무관한 순수한 학습 대상으로만 존재한다.

넷째, 그 정밀함과 복잡성이다. 희랍어는 현대 유럽 언어의 모태라고도 할 수 있다. 현재에 이르러는 그 복잡성 때문에 사용되진 않는다. 그러나 희랍어가 가진 복잡성이 우리 인간 삶의 입체성과 복잡성을 더 부각시키기에 적당하다. 이러한 희랍어의 특성들은 두 주인공의 '살아냄'과 절묘하게 맞물린다.

여자에게 희랍어는 모국어의 상처로부터 벗어나 다시 '살아낼' 수 있는 안전한 공간이다. 그녀는 이미 프랑스어를 통해 언어를 회복한 경험이 있다. 모국어와 전혀 관련이 없는 낯선 언어가 주는 치유력을 알고 있는 것이다. 희랍어는 그런 그녀에게 또 다른 '살아냄'의 가능성을 연다.

남자에게 희랍어는 시각을 잃어가면서도 계속 '살아낼' 수 있게 하는 생명줄이다. 독일 이민자로서 겪은 소외감 속에서, 희랍어는 독일 학생들과 동등한 출발선을 제공하는 유일한 영역이었다. 시력을 잃어가는 지금도 희랍어 강의는 그가 세상과 연결되고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는 방식이다.

죽은 언어의 역설적 생명력은 여기에 있다. 일상의 폭력과 상처가 스며들지 않은 순수한 언어 공간에서, 그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살아냄'을 지속한다. 희랍어 수업은 단순한 언어 학습이 아니라, 상실과 고통을 견디며 '살아내는' 주인공들의 매개체가 된다.


"그럼 우리는 삶을 어떻게 '살아내야' 할까" - 중간태



이 소설의 핵심 문제의식인 "삶을 살아내기"의 핵심은 '중간태'라는 낯선 문법이다. 수많은 희랍어의 특징 중에서 작가는 왜 하필 중간태에 주목했을까? 이는 중간태가 "삶은 살아가는 것인가(완전한 능동), 살아지는 것(완전한 수동)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제3의 답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흔히 쓰는 '능동태'는 "내가 밥을 먹는다"처럼 주어가 행위를 하는 것이다. '수동태'는 "내가 맞았다"처럼 주어가 행위를 당하는 것이다. 그런데 중간태는 다르다. 예를 들어 "선택한다"를 중간태로 표현하면, 내가 선택을 하되 그 선택이 다시 나를 변화시키고 나의 정체성을 만들어간다는 의미가 된다. "상처받는다"를 중간태로 표현하면, 내가 상처를 당하되 그 상처를 겪어내는 과정이 나를 이전과 다른 사람으로 성장시킨다는 의미가 된다. 행위가 능동적이든 수동적이든, 그 결과가 주어에게 다시 돌아와 주어 자신에 영향을 준다.

중간태의 이런 특징이 바로 우리가 삶을 '살아내는' 방식과 놀랍도록 닮아있다. 우리는 삶을 무조건적으로 능동적으로 '살아가는' 것도 아니다. 심지어 탄생조차 우리는 능동적으로 선택하지 못했다. 기본적으로 삶은 누군가에 의해 주어진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삶은 무조건 수동적으로 누군가에 의해 '살아지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삶을 '살아낸다'. 태어나고, 사랑하고, 아파하고, 죽는 것. 이 모든 과정은 내가 무조건 주도하거나 당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행하는 모든 것들이 다시 나에게 되돌아와 나의 삶을 만들어가는 중간태적 성격을 가진다.

소설 속 두 주인공의 삶이 바로 이 중간태적 '살아냄'을 보여준다. 그들이 살아가는 삶은 플라톤이 말하는 완벽한 이데아가 아니다. 하지만 자신의 고통을 스스로 선택한 것도 아니고, 완전히 무력하게 압도당하지도 않는다. 두 주인공은 실어와 실명이라는 고통과 상실의 삶을 온몸으로 겪어내며 중간태적 삶을 '살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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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이든 환이든, 우리의 삶은 생명이 있고, 피가 흐르고 눈물은 솟는다. 그것이 '살아냄'이다. 중간태는 이런 우리의 실존을 가장 정확하게 포착하는 문법이다. 극복하려 애쓰지도, 체념하지도 않으면서, 그저 매 순간을 온전히 겪어내는 것.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살아냄'의 방식이다.


"혼자 설 것인가, 함께 기댈 것인가" - '살아냄'의 방법

그렇다면 이 지독한 '살아냄'을 어떻게 견뎌내야 하는가. 인류는 오래전부터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왔다.

먼저 니체가 제시한 길이 있다. 그는 평생 질병의 고통 속에서도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라고('아모르 파티') 외쳤다. 스스로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초인'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 이는 개인주의적 극복, 고독 속에서 자기 의지로 운명을 긍정하며 '살아내는' 방식이다. 니체에게 고통은 극복해야 할 대상이었고, 그 극복의 과정에서 인간은 더 강해진다.

헤세의 싯다르타는 다른 길을 보여준다. 그는 <싯다르타>에서 깨달음의 순간, 모든 존재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음을 본다. 돌멩이도, 강물도, 죄인도 모두 동일한 존재의 다른 모습일 뿐이다. 이 '동일성'의 깨달음은 구분과 판단을 넘어선 우주적 사랑으로 이어진다. 싯다르타에게 고통은 극복의 대상이 아니라 삶의 일부이며, 모든 것이 영원한 흐름 속에서 하나다.

그런데 『희랍어 시간』은 비슷한듯 다른 제3의 길을 조용히 제시한다. 그것은 '함께 기대어 살아내기'다. 니체처럼 홀로 우뚝 서지도, 싯다르타처럼 혼자서 우주와 합일하는 깨달음을 필요로하지도 않는다. 그저 상처 입은 존재들이 서로의 연약함에 기대어 비틀거리며 걸어가는 지극히 현실적이고 실천적인 삶이다.

두 주인공은 서로의 가장 연약하고 부서지기 쉬운 부분이자 상실의 핵심, 즉 여자의 침묵과 남자의 어둠을 통해 연결된다. 남자가 여자의 손바닥에 희미한 희랍어 단어를 써주는 장면은 이것을 극적으로 상징한다. 촉각을 통한 소통은 니체적 극복도, 싯다르타적 초월도 아니다. 그저 상처 입은 채로 서로의 '살아냄'을 목격하고, 인정하고, 함께하는 새로운 소통이다.

이들의 '살아냄'은 형이상학적이지 않고 지극히 육체적이다. 손바닥에 써지는 글씨의 촉감, 흐릿한 눈으로 감지하는 빛의 잔상, 침묵 속에서 전해지는 체온. 이런 구체적이고 감각적인 연결을 통해 그들은 '함께 살아낸다'.

니체가 고통을 의지로 극복하려 했고, 싯다르타가 고통마저 사랑으로 포용했다면, 한강의 인물들은 고통을 고통 그대로 '살아낸다'. 다만 상실과 아픔을 가진 존재끼리 조금 더 견딜 만하게, 살아낼 수 있게 만들 뿐이다.

‘살아냄'의 길은 영웅적 극복이나 신비적 깨달음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서로의 연약함에 기꺼이 손 내밀어주는 일상적 연대 속에서도 우리는 조금 더 견딜 수 있음을 말한다. 함께 '살아내는' 것, 그것도 하나의 용기다.


학생들의 “살아냄” - 교육의 중간태

한강이 제시한 '살아냄'이라는 실존적 조건은 교육 현장에서도 생생하게 드러난다. 교실의 아이들 역시 각자의 방식으로 '살아내고' 있다. 학생들의 모든 말과 행동들은은 모든 모습이 그들 나름의 '살아냄'의 표현이다.

그러나 초등학생들의 '살아냄'은 성인의 그것과는 다르다. 그들은 고독한 자기 성찰을 통해서가 아니라, 상호 관계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고 성장한다. 학교 안에서 학생들은 무조건적으로로 삶을 주도하지도, 지시나 운명에 따르기만 하지도 않는 그 중간 지점에있다. 즉, 아이들은 '살아낸다'. 이것이 바로 한강이 말한 중간태적 삶의 교육적 실천이다

상호 존중 - 모든 '살아냄'의 동등함

'살아냄'의 관점에서 모든 아이는 동등하다. 성적이 좋은 아이도, 그렇지 않은 아이도, 활발한 아이도, 조용한 아이도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학교라는 공간에서 '살아내고' 있다. 교사의 첫 번째 역할은 이 다양한 '살아냄'을 인식하고, ‘살아냄’의 방식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이다.

"너는 왜 그러니?"가 아니라 "너는 지금 어떻게 살아내고 있니?"라는 시선의 전환. 이것이 중간태적 교육의 출발점이다.

상호 작용 - 경쟁과 협력을 통한 성장

아이들은 서로의 '살아냄'을 보고 배운다. 친구와의 경쟁에서 자신의 한계를 발견하고, 협력에서 함께 '살아내는' 기쁨을 경험한다. 이는 니체적인 고독한 극복도, 완전한 의존도 아닌 중간태적 성장이다.

교사는 이러한 상호작용의 장을 마련하고, 아이들이 서로의 '살아냄'을 거울삼아 자신을 돌아볼 수 있도록 돕는다.

가르침 - 능동과 수동 사이의 지도

많은 교육 담론이 학생의 학습과 삶에서 주도성과 능동성을 강조한다. 능동적인 삶 또한 중요하지만 초등학생의 발달 단계를 고려할 때, 완전한 자기주도는 오히려 부담이 될 수 있다. 또한 능동성만을 강조하면 그렇다고 일방적인 주입식 교육도 답이 아니다.

중간태적 교육은 교사의 지도와 학생의 수용이 상호작용하는 지점에서 일어난다. 교사가 방향을 제시하되 강요하지 않고, 학생이 받아들이되 맹목적이지 않은 그 중간 지대. 이것이 바로 초등 교육에서의 '살아냄'이다.

이런 면에서 생각해보면 교실은 바로 이 '함께 살아냄'을 배우는 공간이다. 교사와 학생, 학생과 학생이 서로의 '살아냄'을 목격하고, 인정하고, 때로는 부딪치며 성장하는 중간태적 공간이다.교육의 목표는 이 '살아냄'을 더 잘하도록 돕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살아냄'이 존중받고 함께 어우러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결론 - 중간태적 태도로 살아내기

한강의 『희랍어 시간』은 우리에게 근본적인 물음을 제시한다. "나는 왜 존재하는가?" 그리고 “고통과 상실의 연속인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그리고 이에 대한 나름의 답을 “중간태적 삶”으로 제시한다. 살아가는 것 (완전한 능동적 삶)과 살아지는 삶(완전한 수동적인 삶)의 중간에 바로이 중간태적 삶이 존재한다. 말을 잃은 여자와 빛을 잃어가는 남자가 스스로의, 그리고 서로의 상처를 받아들이며 발견한 중간태적 삶은, 능동과 수동의 이분법을 넘어 매 순간을 있는 그대로 견디며 존재하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다. 결국 '살아냄' 자체가 우리 존재의 증명이며, 그 '살아냄'을 함께 목격하고 지지할 때 우리는 삶을 “살아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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