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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니쌤 Nov 17. 2020

[북 리뷰]  무라카미 하루키,<노르웨이의 숲>

자아가 상실된 시대

사진 출처: 예스 24



노르웨이의 숲의 원래 제목은 '상실의 시대'이다.

아니, 원래 제목은 ノルウェイの森, 노르웨이의 숲인데 우리나라 처음 소개될 때 '상실의 시대'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다. 어떤 책들은 번역한 제목이 정말 안 좋은 경우도 있지만, 나는 '상실의 시대'라는 말이 더 마음에 든다.


출처: 네이버 국어사전

 상실을 국어사전에서 찾으면 이런 뜻이 나온다. 사람과의 관계가 끊어진다. 존재가 사라진다.


 책의 작가는 어떤 것을 잃어버린 것일까?

 우리는 무엇을 상실해 버린 걸까? 우리에겐 무엇이 사라진 걸까?


이 책에는 '죽음'을 매개로 한 여러 가지 인간관계의 상실이 나온다. 죽음을 통한 상실은 물리적인 상실이다.

그러나 나는 또 다른 상실에 주목하고자 한다.

죽음에 의한 상실, 그 뒤에 숨어있는 인간 존재의 상실을 포착해보려 한다.



노르웨이의 숲 - 초 간단 줄거리

이야기는 37살의 와타나베가 20살 때를 회상하며 진행된다.

소설의 주요 등장인물은 주인공 와타나베.

기즈키는 와타나베의 유일한 친구이다.

나오코는 기즈키의 여자친구이자 와타나베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

레이는 나오코의 곁을 지키며 위로해 주는 여자.

미도리는 와타나베의 일상에서 함께하고 마지막에 와타나베가 찾아가는 여자다.


 대강의 줄거리는 이렇다. 주인공 와타나베는 기즈키라는 어린 시절 정말 순수한 우정을 나누었던 친구를 잃었다. 기즈키는 자살했다. 기즈키의 죽음을 곁에서 본 주인공은 죽음이 우리 삶에 아주 밀접하게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주인공이 마주한 첫 번째 관계 상실이다.


 타지에 있는 대학에 입학한 후 와타나베는 우연히 나오코를 만났고, 얼마 뒤 둘은 사랑을 나누었다. 그런데 그 일이 있은 후 나오코는 산속에 있는 요양소로 들어가 버렸고, 와타나베는 도쿄에 홀로 남겨졌다. 간혹 편지로 살아있음을 알리긴 하지만 나오코를 만날 수는 없었다.


 도쿄의 일상 속에서 와타나베는 미도리라는 여자와 데이트를 했다. 하지만 나오코가 있기 때문에 미도리를 진심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와타나베는 나오코를 찾아 요양소로 떠났다. 결국 요양소에서 나오코와 그녀를 도와주던 레이코라는 여자를 만났다. 와타나베는 도시를 떠나 요양소에 얼마간 머물렀다. 그동안 한 번 더 나오코와 사랑을 나누려 하지만 실패한다.


 그 뒤 레이코로부터 나오코는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는다. 주인공이 마주한 두 번째 관계 상실이다. 나오코가 죽은 뒤 방황하던 와타나베는 미도리에게도 돌아갈 수 없다. 얼마 후 레이코와 관계를 가지게 되고, 레이코도 떠난다. 와타나베가 마주한 세 번째 관계 상실이다. 그 후 와타나베는 혼란을 정리한다. 와타나베는 미도리에게 전화를 걸어서 미도리를 찾는다. 수화기 너머로 미도리는 질문한다.


너 지금 어디야?

 

그러나 와타나베는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


개츠비와 한스



 줄거리를 살펴보면 단순한 연애 소설도 아니고 그렇다고 주인공의 성장 소설이라기에도 망설여진다. 소설의 전문가는 아니기 때문에 연애소설과 성장소설의 특징과 정의는 모르겠다. 그래도 이 소설이 어떤 말을 하는 것인지 알고 싶다. 관계 상실 뒤에서 우리는 어떤 의미를 발견할 수 있을까?


 위에 말한 줄거리만 살펴보면 연애소설이다. 내가 요약해서 그렇지 굉장히 외설적이고 야한 장면도 많이 묘사된다. 소설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단순한 연애소설은 아니다.


 이 소설을 이해하려면 [위대한 개츠비]와 [수레바퀴 아래서]라는 책을 참고하면 좋을 것 같다.


 '위대한 개츠비'의 주인공 개츠비는 당대 사회의 풍조와는 다르게 한 여자만을 향한 지고지순한 사랑을 원한다. 개츠비의 순수한 사랑은 근대 미국의 자본주의, 계급 의식과 사회적 인식을 넘어서지 못하고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한다.


  '수레바퀴 아래서'는 낚시를 좋아하던 명랑하고 착한 한스라는 소년에 대한 이야기이다. 주인공 한스는 어린 시절 꿈과 희망을 키워가며 공부했지만 사회의 교육제도와 다른 사람들의 시선, 그리고 사회적 생활 방식에 짓눌려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한다.


 두 소설의 공통점은 주인공이 사회의 제도와 굴레에서 살아남지 못했다는 것이다. 두 소설의 주인공은 순수함을 간직하고 있다. 그러나 그 사회는 그렇지가 못했다. 개인은 자유롭고 순수함을 지키고 싶어 했지만 거스를 수 없는 사회적 풍조와 보이지 않는 질서 속에서 개인은 처참히 무너져갔다. 개인과 사회, 순수와 타협의 대립 속에서 두 주인공은 결국 목숨을 잃었다. 마치 수레바퀴 아래에서 열심히 기어가던 개미가 밑에 깔려죽듯이.




 순수성의 상실


소설 '노르웨이의 숲' 은 언뜻 보면 연애소설이지만, 위의 관점에서 본다면 순수성을 가진 개인 순수성을 상실한 현실의 대립으로 볼 수 있다.


 모든 사람의 내면 속에는 순수성을 지키려는 자아가 있다. 순수성은 우리에게 삶의 목표를 주고, 내 삶을 한 단계 고양시켜준다. 하지만 순수성을 지켜나가는 것들은 매우 많은 절제와 인내, 자기 극복이 필요하다.

 현실을 살아가다 보면 수많은 이유 때문에 순수성과 경건함을 지켜내기 힘들다. 현실은 끊임없이 우리를 끌어내리려 하고, 안주하게 한다. 편안함과 안락함, 익숙함은 현실이 가장 즐겨 쓰는 유혹 방법이다.


 곧바로 현실의 안락함에 취해버리는 사람이라면 이러한 대립과 그로 인한 혼란은 없다.  개인과 사회의 대립은 개츠비나 한스처럼 자기 안의 순수성을 가지고 있을 때만 성립한다.

와타나베는 순수성을 지니고 있지만, 현실에서 완전히 해방되지는 못한다.

 순수성과 현실의 대립이 일어나면 사람은 혼란을 느끼게 된다. 어떻게든 '내면의 고유함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과 '그래도 나는 현실에 살아야 한다'라는 생각 사이의 괴리에서 느껴지는 괴로움. 그러나 와타나베가 살던 시대의 사람들은 순수함을 망각하고 살아간다.

 양 극단의 가운데서 오는 괴로움을 견디지 못하면, 사람들은 내면과 현실의 투쟁에서 어느 한 군데 몸을 던져버린다. 그리고 대부분은 현실에 몸을 던진다. '다 이렇게 살아.', '나만 그런 거 아니야.', '이것도 행복하잖아?'라고 합리화하며 고귀함과 순수함 그리고 자아를 상실해버린다.



주인공의 자아 상실


이러한 관점에서 나는 소설을 읽고



기즈키와 나오코 그리고 미도리가 모두  와타나베가 성장하고 사화에 적응하는 동안 상상한 자신의 자아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사람들의 해석은 다를 수도 있다. 하지만 나의 경우에는 이렇게 해석이 된다. 기즈키, 나오코, 미도리,레이코가 모두 와타나베 한 사람의 자아이다. 이 중 기즈키와 나오코는 어린 시절의 순수함을 간직하고 있는 자아이며, 현실을 살아가며 타협해내고 살아낸 자아가 미도리라고.

삶의 과정에서 주인공의 성장과 방향성, 순수를 잃고 현실이 방향이 되어버림

그림을 보면 알 수 있듯, 기즈키와 나오코, 레이코와 미도리 주인공이 성장과정에서 내면적 순수성을 간직하고, 삶에 적응하면서 그것을 어떻게 잃어버리는지를 보여준다.


 기즈키와 나오코는 주인공의 순수성과 이상을 간직한 자아이다. 와타나베가 가진 순수한 감정이자 와타나베만의 개성, 내면의 이상과 양심이다.


기즈키와 나오코가 죽기 전, 와타나베는 현실에서 별 탈 없이 지내던 학생이었다. 기즈키와의 우정을 나누면서, 그리고 나오코와 사랑에 빠지면서 와타나베는 삶의 방향을 얻었고 그로 인해 사회와의 대립이 시작된다. 즉, 학창시절 와타나베가 자아를 형성하고, 자신이 속한 사회와 그 자아의 괴리를 느낀 것이다. 그 과정에서 와타나베는 현실적 상황을 극복해내지 못하고, 이상과 순수성을 잃는다. 기즈키와 나오코의 죽음은 와타나베의 순수성 상실을 의미한다.


 기즈키와 나오코는 왜 죽었는지 나오지 않는다. 갑자기 죽는다. 즉 와타나베 내면의 자아가 1차적으로 몰락한다. 우리의 순수성도 마찬가지이다. 순수성과 내면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면, 어느 순간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는 순수성과 이상을 잃고 현실에 적응한다. 그 적응의 목적은 흘러가대로의 삶이요, '표류'라고 할 수 있다.  


 어느정도 성장한 후 와타나베는 나오코를 떠올린다. 다시 자신의 내면에 귀기울이고 순수성을 찾으려는 와타나베의 노력이다. 하지만 나오코는 이미 산 속 요양소에 들어가있다. 그녀, 즉 우리의 순수성은 도시의 삶을 버티지 못한다. 우리가 가진 이상과 순수성은 이처럼 연약하다. 도시의 복잡함과 삶의 단순함을 견딜 수 없다. 그 결과, 와타나베의 순수성을 상징하는 나오코는 모습을 감춰버린다. 한 번씩 답장을 보낼 뿐이다. 나오코처럼 한 번 모습을 감춘 우리의 순수성은 그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는다. 내면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 버린다.


 순수성이 사라졌다고 우리의 인생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와타나베는 미도리라는 여자를 만났다. 미도리는 순수한 사랑은 아니지만, 현실에서 그냥저냥 재미있게 지낼만한 여자다. 즉, 와타나베가 현실과 타협한 자아이다.


 하지만 그녀에게서는 나오코에게 느끼는 감정을 느낄 수 없다. 미도리와 만나면서도 와타나베는 나오코만을 그리워하고 결국 나오코를 찾아 떠난다. 우리는 현실 속에 살면서도 무언가 방향을 잃은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마치 나오코를 잃은 와타나베처럼. 그러나 와타나베와 우리의 차이점도 있다. 와타나베는 그가 생각한 순수함을 찾아 떠났다. 그것도 아주 깊은 심연으로. 이 장면은 현실 속에 어느 정도 만족하며 살고는 있지만 자신의 이상을 그리워하고, 순수성을 그리워하는 사람의 모습이 아닐까?


 그 심연은 나오코가 있던 공간처럼 아주 깊숙한 산속에 있으며, 주변의 접근을 웬만해선 허락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순수성 주변에서 레이코가 순수성을 지켜준다. 레이코는 참 좋은 사람이다. 그녀 덕에 나오코와 분위기도 좋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와타나베는 며칠 동안 나오코와 함께 지낸다. 그러나 와타나베는 다시 산 아래로 내려와야 했다. 그는 현실에 살아야 하니까.


 요양소에서 떠나온 이후에도 레이코를 통해서 나오코 이야기를 듣는다. 레이코는 순수성과 현실의 중간 매개체이다. 하나도 때묻지 않은 순수성만을 가지고 현실을 살기는 어렵다. 그러나 순수성과 내면을 버려둔 채 현실 속에서만 살기도 어렵다. 레이코는 이상과 현실 그 중간에서 현실과 내면을 연결해 주는 와타나베의 자아라고 할 수 있다. 


 나오코가 죽었다는 소식도 레이코에게 듣는다. 나오코는, 나의 순수함은 '현실'이라는 굴레 속에 결국 죽어버렸고 그 소식은 중간 매개자로부터 듣는다. 죽는다는 소식도, 예고도 없이 죽었던 기즈키처럼 와타나베는 또 한 번 방향을 잃는다. 방향과 순수성을 상실한 와타나베는 자신에 대한 경멸을 한다. 자기 자신을 더럽혀진 존재라고 생각한다.

 

와타나베도 미도리를 그리워한다. 미도리라도 없으면 도저히 살 수가 없을 것 같다. 그러나 와타나베는 미도리도 만날 수 없었다. 정처 없이 걸었고, 되는 대로 살았다.  그는 현실에 살아야 하는 사람이니까. 그래서 미도리와 딱 한 번 통화한다. 미도리는 언제 도쿄로, 자신의 곁으로 올 거냐고 묻고 와타나베는 이렇게 말한다.


  이 말을 들은 미도리는 아무 말 없이 전화를 끊어버린다. 이처럼 현실 세계는 순수성을 잃고 방황하는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는다. 현실은 순수성을 인정하지 않고, 타협하지 않는다. 개츠비와 한스라면 이 지점에서 죽었다. 삶의 순수성을 잃었는데 무엇이 존재를 지탱할 것인가? 

 그러나 작가는 와타나베를 죽이지 않는다. 와타나베는 어떻게 순수성을 떠나 현실에 적응하고 살아갈까?


 답은 레이코이다. 그러나 레이코의 역할은 영원히 옆에 있어주는 것이 아니다. 바로 와타나베를 순수함에서 현실로 이어주는 역할이었다. 미도리와 통화 후 레이코는 와타나베를 찾아온다. 순수와 현실을 이어주는 그 역할을 충실히 하는 것이다. 와타나베는 레이코와 수차례 사랑을 나누고, 레이코마저 와타나베 곁을 떠난다. 


 레이코가 떠난 뒤 와타나베는 바로 미도리에게 전화를 건다. 미도리에게 가려고. 그러나 막상 그녀에게 가려고 하자 그녀는 괘씸한 질문을 던진다.


 우리의 현실도 마찬가지이다. 순수성과 꿈을 포기하고 취직, 육아, 승진 등 현실적인 것들에 몸을 던진다. 그러나 결국 그 현실이 우리에게 묻는 것은 '너 지금 어디 있니?'라는 것이다. 매몰차게 전화를 끊으며 자신에게 끌어당길 때는 언제고, 막상 현실로 가려고 하면 나의 순수성을 묻는다. 순수함을 죽여놓고는 내 방향을 물어보고 있다.

 와타나베는 대답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자신이 가지고 있던 순수함과 방향성도 모두 죽었고, 그것을 이어주던 매개체인 레이코마저 와타나베를 떠났다. 현실은 우리의 순수함을 죽여놓고서는 위치와 방향성을 묻는다.

 마치 학창 시절에 시험공부만 죽어라 했더니, 나중에 와서는 '너 자신을 찾아라!'라고 말하는 우리 현실과 너무 비슷하지 않은가? 시키는 대로 다 했더니, '너는 너무 줏대가 없어'라고 말하는 상사가 떠오르지 않는가?


와타나베는 어디로 갈까?

그리고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걸까?

와타나베는 어떻게 될까?

미도리를 만날 수 있을까?

자신의 위치와 방향을 알 수 있을까?


 와타나베가 자아를 창조할 능력을 잃었다는 게 더 큰 문제다. 기즈키가 죽었을 때 와타나베는 나오코라는 이상향을 발견해냈다. 그런데 이미 두 차례나 순수성의 상실을 경험했고, 레이코가 떠남으로써 자신의 위치와 방향을 찾아낼 힘도, 자신의 내면이 어떻게 되어가는지도 모른다. 그는 창조할 수 없는 사람이 되어버렸고, 현실의 노예가 되어버린 것이다. 왜냐하면 와타나베는 현실에 귀의함으로써 그 내면의 혼돈을 정리해버렸기 때문이다.


 와타나베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현실에 적응한다는 이유로 순수성으로 돌아갈 모든 것을 정리해버리지는 않았을까? 우리 안의 혼돈을 견딜 수가 없어서 '행복'과 '안정'이라는 현실에 우리 자신을 내던져버린 것은 아닐까? 그 끝에서 현실이 물어보는 것은 무엇인가.


 '너 지금 어디야?' 우리는 이 물음에 답할 수 있을까?


와타나베도, 우리도 현실에 몸을 던지면서 혼돈이란 모두 사라져버린 것은 아닐까?

그로인해 우리는 창조자가 아닌 노예로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현실에 살면서도 순수성을 지키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레이코 찾아내기


 순수성을 지키자니 현실은 나를 재촉한다. 현실에 몸을 던지고 나니 현실은 나에게 지금 어디에 있는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아느냐고 묻는다. 대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건가? 방향을 강조하면서 순수성만을 고집하면 현실에서 죽어버린다. 현실만을 강조하면 자신이 어디로 갈지도 모른 채 휩쓸려 다니며 그저 그런 인간이 된다.  순수함을 지키려는 사람들은 현실에 적응한 사람들을 속물이라고 비난한다. 현실에 적응한 사람들은 순수함을 지키려는 사람들에게 고지식하며 융통성이 없다고 뭐라고 한다. 내가 보기에 두 종류의 사람들 모두 간과한 것은 두 극단에 있으면 언제나 좋은 결과가 나오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자아 과잉이나 자아 상실은 개인과 사회의 사이의 괴리에서 오는 괴로움을 견디지 못한 채 한 쪽에 몸을 던져버리는 행위이다.


  우리는 또 다른 레이코를 찾아야 한다. 순수한 우리 내면과 현실을 이어줄 수 있는 매개체를 찾아내야만 한다. 이를 바탕으로 우리 안의 고귀함을 바탕으로 현실을 살아가야 한다.

 예를 들어, 나는 가르치는 것, 본질까지 파고 들어가는 것을 좋아한다. 무언가를 형식적으로 하거나, 알면서도 모르는 척 넘어가는 게 체질상 굉장히 힘들다. 학교에서 일을 할 때면 거의 대부분의 것들이 형식상 이루어진다. 또한 가르치는 것 이외의 잡다한 업무들이 교사들에게 주어진다. 그렇다고 지금 당장 교사라는 직업을 그만 둘 수도 없다. 왜냐하면 어쨌든 사회적 지위와 돈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에. 그럼 나는 결국 현실에 몸을 내맡긴채 살아야 할까?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나만의 레이코는 무엇일까? 바로 사색과 글쓰기이다. 현실에서 직업은 직업대로 가지고 있지만, 그 직업에서 오는 여러가지 상황은 나의 자아를 파괴하려고 한다. 글쓰기는 그것을 막아준다. 현재 내 삶은 공무원과 교사의 투쟁을 글쓰기가 매개해 주고 있는 삶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투쟁의 구성 요소는 언제든 변할 수 있다. 현실의 직업이 바뀔 수도 있고, 나의 순수성과 자아가 변할 수도 있으며, 그것을 매개해 주는 매개체가 변할 수도 있다. 안정적이고 영원하면서도 내 자아를 살려준다면 가장 좋겠지만 대부분은 그렇지 않다.


 자신에게 필요한 가치를 끊임없이 성찰하고 창조해나가는 삶의 태도가 중요하다. '나의 자아는 무엇인가, 난 무엇을 위해 살지?', '현재 나의 현실은 어떤가?',  '순수성을 잃지 않고도 현실에서 살아가려면 어떤 매개체가 필요한 것인가?' 끊임없이 고민해야 한다.


마치며


 당신은 지금 어디에 있나요?

 당신의 나오코(이상, 순수성, 개성)는 무엇인가요?

 당신의 미도리(현실, 직업, 처한 상황)은 무엇인가요?

 당신의 레이코(이상과 현실의 매개체)는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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