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부터 읽어보고자 했지만 난해하고 어렵다는 평이 워낙 지배적이라서 꺼려졌던 책이다. 읽어보니 왜 그런 평이 나왔는지 이해가 갔다. 동시에 몇 가지 포인트만 잡는다면 인생을 바꿔줄 수 있는 책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이번 리뷰에서는 그 몇 가지 포인트에 초점을 맞춰서 리뷰를 하고, 읽으면서 더 생각하고 공부해 볼 만한 주제를 남겨보려고 한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그 제목부터 무게감이 상당하다. 무게감이 상당한 주제에 '가벼움'이라는 대립적인 요소가 들어가면서 굉장히 많은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제목이다. 언뜻 봐서는 인간 존재와 삶이 너무나 가볍고, 의미 없는 듯한 느낌을 준다. 하지만 책을 읽다 보면 이와 정반대의 생각이 들 수도 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삶의 무거움과 가벼움의 반복적으로 보여줌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삶이 가벼운지 무거운지 스스로 측정해 보는 데 그 의도가 있다고 생각한다. '존재의 무게감 측정'이야말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독자에게 요구하는 바이다.
우리가 삶을 가볍게 바라보는지, 무겁게 바라보는지에 따라 우리의 선택은 달라진다. 인간의 비극은 자신의 선택이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 모르기 때문 아닐까. 한 번밖에 존재할 수 없는 인간에게 그 결과도 알 수 없는 선택이란 너무나도 어렵다.
하지만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궁극적인 지평은 바로 '존재 자체에 대한 의심'이다. 존재 자체에 대한 의심이야 말로 삶의 무게감을 측정하고 느낄 수 있는 전제가 되기 때문이다.
밀란 쿤데라 자신도 삶에서 존재의 가벼움과 무거움에 대한 혼란을 느꼈기에 이런 글을 쓸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초반부에 존재의 혼란 속에서 밀란 쿤데라는 2가지의 사상을 뒤집어본다. '영원회귀'와 '파르메니데스'이다. 이 두 가지 사상을 어떻게 뒤집는지, 그리고 뒤집어 생각 한 두 가지의 사상을 합치면 어떤 새로운 존재의 무게감을 설정할 수 있을지에 대한 생각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후반부까지 끝까지 이어져야 좀 더 수월하게 이해할 수 있다.
영원회귀는 내가 네이버 블로그에 따로 작성해 둔 글이 있으니 참고해 보면 더 좋을 것 같긴 하다.
영원회귀를 완벽히 이해되도록 설명하기는 어렵다. 영원회귀는 어떠한 개념적 정의가 아니라 니체가 고안해 낸 사고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간단히 정의 내리자면 영원회귀 당신이 지금 살고 있는 삶의 모습은 과거에도 수없이 반복되었고 앞으로도 수 없이 반복될 것이라는 이야기다. 이 내용을 2가지로 나누어보면 두 가지의 극단적인 상황을 설정할 수 있다.
위에서 보듯 영원회귀는 삶에 대한 무조건적인 긍정인 동시에 삶에 대한 허무주의의 극치라는 양 극단의 성격을 지닌다. 밀란 쿤데라는 영원회귀의 이 양면성에 대해 고찰해보고 있는 것이다. 보통의 영원회귀에 대한 해석은 '긍정'의 방향으로 해석한다. 니체의 사상 자체가 '삶에 대한 긍정을 바탕으로 한 자긍심과 생명력'에 대한 사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밀란 쿤데라는 이 일반적인 해석을 뒤집어서 오히려 영원회귀를 허무주의의 극치로 바라보고 있다.
파르메니데스는 그리스의 철학자인데, 사실 그에 대해 아는 것은 없다. 책에 나온 말만 참고해 보면, 가벼운 것과 무거운 것에 대한 평가가 나온다. 그는 가벼움을 긍정적, 좋은 것이라고 말하지만 밀란 쿤데라는 이것을 뒤집어 생각한다.
밀란 쿤데라는 니체의 영원회귀를 존재의 가벼움으로 뒤집어 생각해 보고, 파르메니데스의 가벼움을 무거움으로 뒤집는다. 그리고 이 사이에서 발견할 수 있는 삶의 모순, 특히 존재의 가벼움과 무거움을 흥미롭게 바라보고 있다. 이를 통해 그는 존재가 가벼움과 무거움을 제시하기보다는 우리에게 일반적으로 주어진 삶에 대한 해석들을 주체적으로 되돌아보고 스스로 존재의 무게감을 느껴보는 자신의 의도를 설정한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밀란 쿤데라는 이러한 설정을 깔아 두고 인물과 이야기를 등장시킨다. 인물과 이야기는 삶에서 존재의 무게감을 독자 스스로 판단해 볼 수 있게 하는 하나의 예시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이때 무게감은 단순히 무겁다는 이야기가 아니고 삶이 얼마나 무겁고 가벼운지에 대한 측정감이라고 할 수 있다.
간단히 정리하면 위와 같은 인물 관계도를 가진다. 인물들이 처한 상황을 다소 극단적으로 제시하면서 가벼움과 무거움을 번갈아 보여준다. 토마시와 테라자 그리고 반려견 카레닌은 가벼움->무거움->가벼움의 과정을, 사비나와 프란츠는 가벼움에서 무거움으로 가는 과정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밀란 쿤데라는 이야기를 전개하면서 존재의 가벼움과 무거움을 반복적으로 보여준다. 그 가벼움과 무거움의 예시를 한 가지씩만 이야기해보려 한다.
삶의 모든 모습들이 합리적으로 이해될 수만은 없다. 그리고 모두 연결되는 운명이라고 할 수도 없다. 우리의 모든 순간들은 돌이켜보면 우연의 우연이 겹쳐서 현재의 모습을 지니고 있다. 이런 걸 생각하면 삶은 얼마나 가벼워지는가? 내가 힘써 노력한 것보다는 우연의 결과가 나의 삶이라니...
우리가 살아가는 삶이 모두 우연의 총체라면 인간은 삶을 어떻게 인식해야 할까?
우연의 총체들에 변형에 변형을 거듭하며 우리는 삶을 미적으로 인식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시작, 중간, 끝까지 니체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삶에 대한 미적 인식 또한 니체의 <비극의 탄생>에서 나온 문장이다.
오직 미적 현상으로서만 실존과 세계는 영원히 정당화된다 - <비극의 탄생> 56p
물론 니체가 한 말이 존재의 가벼움과 무거움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은 아니지만 밀란 쿤데라는 이것을 우연이라는 삶의 가벼움과 연결 지어 예술가-창조자로서의 인간 존재를 말하는 듯하다.
우리는 삶에서 모든 것을 마음대로 할 수는 없다. "그래야만 한다"는 명제는 인간에게 중력과도 같은 작용을 한다. 존재가 너무 가벼우면 인간은 허공에 떠다니는데, "그래야만 한다"는 가치, 필연을 가져야만 인간은 비로소 땅 위에서 걸을 수 있다. 이 의무감은 우연에 의한 미적 감각이 아니라 현실의 부분이고 운명의 한 부분이다.
또 다른 "es muss sein"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내적인 소명이다. 우리는 외부뿐만 아니라 내부에서도 의무감을 지닌다.
주인공 토마시는 이러한 무게감에서 벗어나 시골로 향하고, 단순함에 귀의하게 된다.
이 밖에도 여러 가지 상황에서 우연과 필연, 창조와 운명, 가벼움과 무거움의 이미지가 혼동되어 나타나며 우리에게 존재의 무게감을 측정하라는 요구를 한다.
마지막으로 다룰만한 부분은 '키치'에 대한 이야기다. 밀란 쿤데라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키치에 대해 이야기한다.
키치는 어떤 인간이 "Es muss sein"에 너무 깊이 빠져있을 때 발생한다. 자신만의 가치가 너무 확고한 사람은 모든 인간이 자신과 같은 감정과 기준을 가지고 살아가길 원한다.
그렇기에 키치는 전체주의적이고 독재의 성향을 가진다.
우연으로 가득 찬 세계는 곧 가능성으로 가득한 세계이다.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얼마든지 다르게 나타날 가능성도 있었던 것이다. 요즘 생각하면 멀티버스에서 제3의 지구에 있는 27384번째의 나는 현재 나와 다른 삶을 살고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키치'는 본질적으로 그런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대표적인 키치는 '공산주의'이다. 이는 체코 프라하의 봄 사건을 공부하면 그 배경 이해에 도움이 된다.
우리는 본질적으로 '키치'에 대한 거부감을 느낀다. 그러나 꼭 생각해봐야 할 것은 키치에 대항하는 사람들 또한 키치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결국 키치는 인간의 조건 중 하나로서 우리 모두에게 적용된다.
키치는 그것을 따르는 사람들로 하여금 대장정에 참여하도록 한다. 대장정에 참여하는 사람들 중에 실제로 그 키치를 진정성 있게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드물다. 키치가 없는 존재는 너무도 가볍기에 공허하다. 발을 땅에 붙이기 위해 그들은 대장정에 뛰어든다.
키치의 대장정은 합리성과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존재를 어떻게든 살아가게 해 준다. 그렇기에 인간들은 각자의 키치를 가지고 죽일 듯이 싸우고 투쟁하면서 살아가기도 한다.
피비린내 나는 싸움에서도 인류는 공동의 키치를 가진다.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고, 동물을 잡아먹을 수 있다는 것은 모든 인류가 동의하는 키치이다. 하지만 밀란 쿤데라는 모든 오류가 여기에서 발생한다고 생각한다.
인간이 아무런 키치도 없이 자연스럽게 함께할 수 있는 대상은 바로 동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에게 선의를 가지고 우리에게 모든 것을 의존하는 동물들을 사냥하는 것이 인류의 도덕적 키치라면, 우리의 모든 도덕적 키치는 실패이자 오류일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우리 모두는 서로의 키치를 높이며 싸우지만, 결국에는 창세기로부터 '자연의 주인이자 소유자'라는 키치의 대장정에 함께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말의 목을 끌어안고 울던 니체와 죽기 직전의 반려견의 머리를 쓰다듬는 테레자의 모습을 제시하며 이 둘만이 인류의 대장정에서 대열을 이탈했다고 말한다.
독자에게 존재의 무게감을 측정하라는 요구를 했지만 결국 밀란 쿤데라는 존재의 가벼움을 '참을 수 없다'라고 말한다. 키치가 인간의 한 부분임을 인정하는 순간, 그리고 그토록 경멸하던 키치의 반대편과 자신의 키치가 너무나 밀접하다는 걸 인식하는 순간 인간은 존재의 가벼움을 참을 수 없다. 즉, 존재란 무거움을 안고 살아야 한다는 이야기이다. 중세에 신의 품에 안기고, 현대에는 '민주주의'라는 키치에 기대어 살아가는 것처럼 말이다.
하나의 키치를 지니고 있는 인간은 그 키치가 사라지면 존재의 의미를 상실하고, 참을 수 없는 존재 그 자체가 되어 의미가 사라진 세상에서 방황하게 될 것이다. 이때 존재가 취할 수 있는 선택은 두 가지이다. 삶을 그대로 끝내던지, 새로운 키치를 살아내던지.
결국, 인간은 존재의 가벼움을 참을 수 없다, 그렇다면 키치에 빠질 것인가, 대장정에 참여할 것인가, 또는 새로운 가치를 창조해 낼 것인가? 어느 쪽으로든 우리는 허공에 떠있는 가벼운 존재가 되지 않기 위해 무언가를 만들어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존재는 지상에서 떠날 수밖에 없으니까 말이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단순한 연애소설, 인간관계 소설로 인식하고 접하면 이해하기 힘들다. 어느 정도 철학적인 이해가 필요하고, 읽어보면 새로운 삶의 의미를 찾아주는 좋은 책이다. 이번 북 리뷰는 책에서만 최대한 인간 존재의 모순, 삶의 모순을 '느낄 수' 있도록 영원회귀로 시작하여 키치로 마무리하며 끝냈다. 하지만 이 밖에도 반려견 '카레닌'의 의미와 인간의 권태, 이성과 비이성 등에 대해서도 나오면서 생각해 볼 주제를 많이 주는 좋은 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