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펠리에게

세번째 편지 - 2025.12.28

by Didi

안녕, 나의 사랑하는 아펠리.


지금은 일요일 오후 한 시를 조금 넘긴 시간이란다.

지금 3일째 작업실 출근이란다. 어제는 카페로 새고 싶은 마음을 얼마나 어렵게 붙잡았는지...


요즘 들어 시간의 흐름이 유난히 빠르다고 느껴져.
그 흐름에 내가 휩쓸리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감각도 들고.
어쩌면 이제는 이 빠름을 거스르려 하기보다,
있는 그대로의 리듬 위에서 나만의 춤을 출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할 시기인지도 모르겠어.


나는 매번 이 질문들 앞에서 아주 작아져.

‘나는 무엇을 원하는 걸까?’, ‘이번 생에서 나는 도대체 무엇을 하고 싶은 걸까?’

'그에 대한 분명한 답을 내가 쥐고 태풍 같은 흐름 앞에서도 단 한톨의 흔들림도 없었으면...' 이런 현재로선 허망한 생각에도 기대어본단다.


난 사실 노는게 제일 좋단다.

좋아하는 영화보기,

새로운 앨범들을 들어보기,

새로운 감각을 전해주는 공연보기,

좋아하는 작가의 작업을 찾아보기,

혹은 실제로 그 작업들을 미술관에서 보기,

책 읽기,

호텔 조식먹기,

감각적인 장소에서 시간을 보내기,

아름다운 형태들을 감상하기,

여행하기,

...


그리고 난 내가 좋아하는 것들, 경험들에 대해 글 혹은 말로 정리해서

누군가에게 전달하는 그런 일에 흥미가 강해. 이런 일은 시간가는 줄 모르고 하는 것 같아.

어떤 관점에서 전달해주어야 할까. 어떤 방식으로 설명해볼 수 있을까. 이런 각색, 재편집을 좋아하는 걸까?


오늘 작업실에 오는 길에 문득 이런 생각도 들었어.

사실 정기적으로 들어왔다 바람처럼 빠져나가는 생각이란다.


유럽에서 좋은 공연과 문화 행사, 책들을 보고 공부하며 큐레이션하고,

그것들을 한국으로 연결해주는 역할을

대기업에서 빵빵하게 지원받으며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


그리고 곧이어 이런 생각도 들었지.

그런 연락이 갑자기 나에게 올 리는 없잖아? 그렇다면 내가 먼저, 가능한 범위 안에서 시작해보자고.


얼마전에 이런 글귀를 본적이 있어.

I am a Museum of everything what i have ever loved.


아펠리,

나는 나의 삶의 뮤제를 잘 가꾸고, 기획하고, 그 곳에 나의 문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초대하고 싶어.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도 모른 채 쌓여 있는 창고 같은 공간이 아니라,

곳곳에서 나를 감각적으로 구현해주는 다양한 향들을 느낄 수 있고,

내가 사랑하는 문화자산들이 감각적으로 재구성되어 있는,

흉내 낼 수 없는 고유한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그런 정신적 공간 말이야.


아펠리, 난 네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스스로의 마음에 대해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길 바래.

네가 어떤 공간을 사랑하는지,

어떤 책의 어떤 구절이 너를 울리는지,

어떤 추억이 너에게 보물이 되었는지,

어떤 향기가 너를 기분 좋게 하는지,

어떤 도시나 장소에서 가장 너 답다고 느끼는지, 혹은 새로운 너가 될 수 있도록 하는지...

그 모든 ‘네가 사랑하는 것들’을 기쁘게 찾아가는 사람으로 자라나길 바래.


외부의 시선이나 명분 때문이 아니라,

이유 없이도 네 감정과 연결되어

한참을 바라보게 되고, 맡게 되고, 듣게 되는 것들, 머물게 되고 다시 찾게 되는 것들.


나의 경우에는, 무언가가 좋다고 느끼다가도

‘이게 정말 내가 원하는 게 맞을까?’ 하고 스스로에게 지독하게 묻곤 해.

어떤 것들은 내가 욕심내는 이미지가 원하는 것이고, 어떤 것들은 분명 내가 좋아하는 것인데도 의심이 길어지다 결국 놓쳐버리기도 해.


이 책은 이런 이유로 읽어야 하고, 저 영화는 사람들이 좋다니까 봐야 하고,

이 목적을 위해 지금은 싫어도 이 공부를 해야 하고.


그런 선택들이 나에게 많은 지식과 문화를 안겨주기도 했지만, 오랜 시간 명분에 의해 선택해오다 보니 정작 내 안에서 나온 기준은 흐릿해진 채로 살아온 것 같아. 어릴땐 꽤 좋고 싫음이 뚜렸했었는데 말이야.


그 흐릿한 기준에 기대던 시간 동안 나는 내가 성장할 수 있는 크기를 줄이거나, 부풀리거나,
이 명분에 맞게, 저 명분에 맞게 내 형태를 바꿔야 했어.
그리고 나 자신을 지켜야만 했던 공격적인 상황들과 사람들을 지나며, 나는 내 내면의 힘이 생각보다 많이 약하다는 사실을 마주할 수밖에 없었어. 인정해야했단다.


그 경험들은 이전의 나를 완전히 부수었고, 아주 무서웠어.
하지만 동시에 나를 새롭게 성장시키는 계기가 되었지.


그 이후로 나는 내 안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조금씩 신뢰하기 시작했어.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이 불편한지,
지금의 나로서 받아들일 수 있는 것과
아쉽지만 거절해야 하는 것에 대해
나만의 현재적인 기준을 믿기 시작했고 (그게 시간이 지나 변한다할지라도),
그것을 삶 속에서 아주 천천히, 그러나 점점 더 구체적으로 실천하게 되었어.


아펠리, 내게도 또 다시 힘든 순간들이 찾아 올거란다. 그리고 네게도 분명 힘든 순간들이 찾아올 거야.
그때에도 기억해. 그 어두운 터널을 통과할 힘은 이미 온전히 네 안에 있다는 것을.
시간은 조금 걸린단다. 그래도 우리는 삶을 끝까지 살아내야 해.

그 터널을 지나는 동안 네가 사랑하는 것들이 끝까지 너를 지켜줘.
힘든 순간일수록 사랑하는 것들을 자주 찾아가고, 그 곁에서 잠시 쉬어가도 된다는 걸 잊지 마.
그리고 그 옆에는 언제나 내가 있을게.


이제 한 시간 쯤 뒤에 G와 산책을 나가기 전까지 조금 서둘러 일을 해야겠어. 밀려있는 일들이 꽤 많단다.

누굴 탓하겠니, 옘병...


그럼 안녕, 나의 사랑하는 아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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