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번째 편지 - 2025.12.26
안녕, 나의 사랑하는 아펠리.
오늘은 2025년 크리스마스가 지난간 다음날이란다.
오랜만에 작업실에 와 앉아있어.
나는 매번 작업실보단 카페에 가고 싶어해. 그래서 자주 작업실로 향하다 카페로 가기도 한단다.
오늘은 작업실에 있는 컵라면을 먹자고 스스로를 꼬셔서 이리로 왔어. 작업실에 가져다두어야 할 것들이 있기도 했고.
참 무자비하게도 어둡고 길고 추웠던 지난 연말 올해 연초 기간을 보낼때, 난 이런 다짐을 했었어.
올해 연말과 연초만큼은, 바다가 펼쳐진 큰 통창이 있는 곳에서 오롯이 나만의 2주를 보내자 !
그곳에서 밤바다를 보며 따뜻한 차를 내려마시는 상상을 해왔지.
1년 동안 틈틈이 그 때에 들을 음악을 모아 플레이리스트도 만들어 왔어.
가장 처음에 있는 곡은 Jacob Collier의 All at Sea, 캠브리지에서 라이브를 한 버전이란다.
지금 난 그 음악을 듣고 있어.
프랑스에서 크리스마스는 예수의 탄생을 기념하는 ‘하루’라기보다, 2주간의 방학에 가까워. 기독교인이 아닌 나에게 이 날은 사실 큰 의미를 지니진 않지만, 모두가 가족을 만나러 떠나는 이 명절 같은 분위기 속에서 가끔은 외로워지곤 해. 동시에, 아무런 의무도 없이 방해받지 않는 2주가 주어진다는 점은 또 얼마나 좋은지.
다만 이 시간을 무력하게 흘려보내거나, 약해진 채로 가만히 바라보기만 한다면 지독한 외로움에 잠식될 수도 있어. 작년의 내가 그랬거든. 그래서 올해는 기필코 내가 좋아하는 풍경을 내 앞에 가져다 두고, 이 시간을 온전히 나만을 위한 시간으로 만들고 싶었단다.
그 풍경이 어디에 있을지 찾다가, 그리스의 몇몇 섬들이 내가 그리던 장면과 닮아 있다는 걸 알게 되었고, 어느 순간부터 ‘연말은 그리스에서’라는 상상을 자주 해왔어. 그래서 지금 그리스냐구 ?
아쉽게도 여전히 프랑스 스트라스부르그란다. 상상이 일정 앞에서 멈춰버렸어. 3월 말부터 이어질 전시 준비도 해야 했고, 그 사이 한 달은 한국에 다녀와야 했기에 일을 거의 하지 못할 상황이라 크리스마스 연휴에 차라리 일을 몰아서 하자는 쪽을 택했어. 해야 할 일들이 남아 있는 상태에서 잠깐의 상상을 위해 비용을 쓰는 것도 좀 그렇고. 그래도... 갔으면 좋았을까?
이주간의 모든 시간을 작업과 일에 바치겠다는 포부와 달리, 일주일 전부터 지속된 감기 기운으로 사흘을 앓고, 이틀은 그 관성에 무뎌져 여전히 누워서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흘려보냈어. 나는 이런 날들이 가장 싫어. 그런 날들이 싫다기 보단, 그런 날에 느끼는 비생산적인 기분을 느끼는 것이 싫은 것 같아. 강박일지도 모르겠지만.
그 와중에도 며칠 전부터 집을 정리하겠다며 완전히 뒤집어 놓았지 뭐야. 사실 집이 흐트러지기 시작한 건 꽤 오래전부터란다. 침대 위에는 마른 옷과 벗어 던진 옷들이 산처럼 쌓였고, 그 탓에 몇 달 동안 침대에서 잠을 자지 못하고 거실 소파에서 지냈다.
이주간의 방학, 더불어 반 강제적으로 집에서 보내는 나날들에 힘입어 드디어 정리를 시작했단다.
조금 정리하고 눕고, 다시 조금 정리하다 토스트를 구워 딸기잼을 발라 먹고 또 눕고. 그러다 잠시 일어나 사부작거리다 다시 눕는 사이 2~3시간이 금세 지나가고, 결국 잠에 들었어.
분명 하루면 끝낼 수 있는 일인데, 이런 나 자신이 순간순간 혐오스럽기도 했단다. 휴.
감기 기운과, 어쩌면 그것보다 더 강력한 나의 게으름뱅이력이 합쳐져 하루 이틀은 이렇게 흘러갔단다.
어제는 침실에 쌓여 있던 옷더미를 모두 정리했고, 더 이상 입지 않는 옷을 절반 정도 추려냈어. 옷이 어찌나 많은지... 입지도 않는 옷을 왜 이렇게 오래 붙들고 있었을까. 버리기엔 아깝고, 그렇다고 공짜로 주기에도 망설여져서 온라인 중고 판매를 하겠다는 생각을 한 지도 어느덧 9개월쯤 되었단다. 몇몇은 팔리긴 했지만, 생각만큼 수월하지는 않았다. 아직도 산더미 같이 많은 이 옷들을 정말 다 팔게 되는 날이 오긴 할까.
차라리 집에서 작은 벼룩시장이라도 열든, 욕심을 버리고 기부를 하든, 빠른 시일내에 이 모든 옷들을 처분하고 싶은 마음이 가장 커. 뭐든 사는 건 쉽고 정리는 어렵고, 처분은 더더 어렵구나.
이 정리되지 못한 산더미 같은 옷들처럼, 몇개월간 생각보다 잡념의 비중이 더 컸던 것 같아.
무언갈 하지 않고 생각만하다 흘려보낸 것들이 많아.
그것들을 돌이켜보자면 왠지 내가 조금 밉다. 아니 많이 미워.
이런 것들이 자꾸 쌓여서, 무엇을 해보겠다는마음, 결심마저 의심하기 시작해버린 것 같기도 해. 이건 정말 좋지 않은 마음인데. 위험하다 !
그래서 오늘 다시금 다짐해봐.
무엇이든 해보자라고 마음 먹은 것을 끝까지 해보는 것.
원하는 바를 얻어보는 것, 그리고 그 과정에서 제대로 배우는 것.
스스로와의 타협을 멈출 것.
내 스스로를 나약한 존재로 취급하지 말고, 강한 존재로 인식하는 것, 그에 맞게 엄격해져보는 것.
지금의 내 삶이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아서 말이야.
명확한 이유를 알기 어려우면서도 사실 알고 있을 거야.
아펠리, 나는 잘 '사는' 사람이 되고 싶어.
그게 정확히 어떤 모습인지, 어떻게 하는건지는 아직 잘 모르겠어.
체력적으로 건강하게 ?
스스로가 원하는 바를 이루고자 노력하는 정신과 실천이 있는 ?
세상과 그리고 사람들과 잘 지내는 것 ?
이런 정의들은 내가 무엇을 경험하느냐, 어떤 타인들을 보느냐에 따라 매번 바뀌고 뒤흔들려.
가끔, 나도 저렇게 살고 싶다고 느끼게 만드는 사람들을 만나.
대개는 어느 정도 나이가 있으신 분들에게서 그런 영감을 받아.
내가 영감을 받는 인물들의 공통점은,
조용하지만 (소란스럽지 않다고 말하는게 더 정확할 것 같아.) 단단하고,
대화가 깊고 편안해. 작은 말 한마디에서도 배려가 느껴져.
화려하기보다는 깔끔하고 자신에게 잘 맞는 옷차림을 하고,
나이가 지긋이 쌓였음에도 눈에는 여전히 총기가 보여.
마치 아직도 100년은 더 살 것처럼, 하고자 하는 일에 열정적이고 끊임없이 공부를 하셔.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지만, 그 정신과 성품, 말에서는 짙은 향기가 나.
그런 인물들과의 만남은 기억에 맴돌아.
나는 그런 사람들을 존경하고, 나도 그렇게 살고 싶어. 그래서 그동안의 나태함을 더 많이 반성하게 되곤 해. 그런 반성을 가능하게 해주는 맑은 거울 같은 사람들을 만날 때, 부끄럽지만 동시에 참 기쁘단다.
가장 최근에는 파리에서 열린 원자력 전시회에서 한국 기업의 통역을 하며 스치듯 뵌 세아SA 회장님의 모습이 그런 영감을 주었어. 내가 맡은 기업이 아니었어서 사실 그분과 직접 대화를 나눈 적은 없고, 나의 지인이 해당 기업의 통역을 맡아 전시 기간 동안 대표님이 어떻게 움직이고, 어떤 태도로 일에 임하며, 어떤 말을 하는지 전해 들은 것이 거의 대부분이고, 바로 옆에 각자의 기업 상담 창구가 있었어서, 틈틈히 그 분을 옅본 게 전부야. 그래서 어쩌면 그에 관해 내가 가지게 된 인상은 환상에 가까울지도 모르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의 삶에서 내가 엿본 단편들만으로도 배울 점은 충분했어.
그 모습을 보며 문득 이런 상상까지 하게 되었거든.
'언젠가 나도 60~70대가 되었을 때, 쌓아온 지혜와 노하우를 바탕으로 여전히 내 일을 열정적으로 확장해 나가는 노년의 여성 기업인이 되고 싶다. 그 존재만으로 누군가에게 다시 삶을 살아갈 의지를 건네는, 조용하지만 분명한 영감을 주는 사람으로. 그리고 나이가 들어도 늘 스스로의 외형과 내면을 잘 관리한게 느껴지는 고운 할머니. 늘 단정하고 센스있는 차림. 사람들 기분좋게 맞이해줄 수 있는 여유 ...'
나는 그 분의 모습을 보고 영감을 받았지만, 내가 원하는 건 그런 모습을 흉내내는 것이 아니야.
정말 그런 삶을 사는 에너지를 가진 사람이 되고 싶어.
어떤 몰입의 강도가 높은 삶을 나는 늘 동경해.
자신이 열정을 쏟는 것을 실현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움직이고, 미쳐있는 그런 사람들에겐 형용할 수 없는 빛과 에너지가 느껴진단다.
물론, 뭔가에 미쳐있다고 다 그런건 아니지만, 상당수가 그렇다고 느껴져.
이 글을 쓰다보니 한가지는 분명해졌어.
예전엔 오랫동안 예술을 하는 사람들을 동경했는데,하지만 이제는 자신의 삶을, 자신이 가진 비전과 열정으로 스스로 직조해 나가는 사람들을 동경하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지금의 나에게는, 그 힘이 필요하다는 것을. 그 힘을 내가 원한다는 것을.
사실 내 삶에서 나는 아직 무엇에 열정을 쏟고 싶은지 모르겠어. 그런 대상이 희미하게도 보이지
않아. 이 또한 너무 잡념이 많아서 그런걸까?
그걸 당장 찾기 힘들다면,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것들, 내가 조금이라도 행동하면서 기쁜 것들을 최대한 열심히 해보아야 할 것 같아.
얼마 전 두바이에 갔을 때, 일로 만나게 된 분께서 나의 사주를 봐주며 ‘부동산이 잘 맞고, 나중에는 호텔 운영 같은 일도 잘 어울린다’고 말해주셨어.
사주는 늘 재미로만 받아들이는 편인데, 이상하게도 그날 들은 호텔이라는 단어가 내 상상력을 강하게 자극했단다.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아름다운 풍경 속에서, 누군가에게 진짜 휴식이 될 수 있는 호텔을 운영한다면 참 행복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단다. 그곳에는 내가 오랫동안 사랑해 온 향들이 곳곳에 은은하게 스며 있고, 몸과 건강을 되살려 주는 맛있는 음식이 있으며, 나만의 감각으로 완성된 공간들이 있어.
무엇보다도, 그곳에 머물렀던 시간이 투숙객에게 삶 속에서 가장 평온하고 아름다운 기억 중 하나로 남는다면. 그런 공간을 만들어 내는 일이라면,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상상이, 언젠가는 정말 현실이 될 수 있을까.
아펠리, 오늘은 글이 매우 장황해서 네가 길을 잃었대도 할 말이 없단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기 전에 말했지만, 나는 아직 자신 있는 시간보다 부끄러운 시간이 더 많단다. 내가 나를 부끄러워하는 것도 견디기 쉽지 않지만, 여전히 부족한 모습으로 노력하지 않으면서 네 앞에 서야 한다면 그건 더 큰 수치일 것 같아. 너를 조금 더 편안하고 기쁜 마음으로 만나기 위해, 이제는 매일 노력할게.
지금 플레이리스트에서는 Tom Misch의 For Carol이 흐르고 있단다. 언젠가는 너와도 이 음악을 함께 듣게 되겠지. 어딘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