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심기: 터전을 옮긴다는 것

시네마 리터러시 02: 리틀 포레스트(2018)

by 강제인

영화 '리틀 포레스트'(임순례 감독, 2018)는 혜원(김태리 분)의 임용고시 낙방으로 시작한다. 생계유지 노동과 고시 공부에 양분을 소진한 혜원은 서울을 떠나 고향을 찾는다. 거기에 이미 재하(류준열 분)가 와 있다. 자신을 지워야 견딜 수 있는 회사를 떠나 돌아온 재하는 지친 혜원과 닮았다. 그런 그가 돌보는 과육들의 내음, 돌보지 않은 땅에서 겨울을 버틴 배추, 봄을 머금은 꽃의 향기, 여름 땡볕을 받고 자란 토마토의 생기 같은 것들이 혜원의 허한 속을 채운다.

그러나 서울에는 아직 혜원의 일부가 남아 있다. 집과 반려견을 재하에게 부탁하고 떠난 혜원은 어떤 선택을 할까. 충만해진 마음으로 다시 서울살이를 시작할까, 아예 정리하고 돌아올까. 언 땅에 양파 묘목을 옮겨 심는 재하가 말한다.

”그냥, 난 왠지 혜원이가 금방 돌아올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소꿉친구 은숙(진기주 분)이 “그래? 왜?”라고 하자 재하는 ”아주심기. 지금 혜원이는 아주심기를 준비하고 있는 건지도 몰라.“한다. 이어지는 독백에서 재하가 설명하는 ‘아주심기’란 다음과 같다.

아주심기를 하고 난 다음 뿌리가 자랄 때까지 보살펴 주면 겨울 서릿발에 뿌리가 들떠 말라 죽을 일도 없을 뿐더러, 겨울을 겪어낸 양파는 봄에 심은 양파보다 몇 배나 달고, 단단하다.

아주심기는 마지막 서리가 내리고 난 후 맑은 날을 골라 묘목을 완전히 옮겨 심는 일이다. 혜원은 작은 숲을 가꾸며 자연히 알았을 것이다. 섣불리 자신을 옮겨 심으면 뿌리가 시들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마음 속 서릿발이 멈춘 후 신중히 움직이는 혜원처럼 잘 할지는 모르지만, 나 역시 아주심기를 준비하고 있다.

첫 발령 받은 학교가 있는 이천에 5년이 넘도록 살고 있다. 학교를 옮기면 거처 역시 옮기는 것이 자연스러운 선택이지만, 겨울이 완전히 물러나지 않은 봄의 초입에서 나는 이 작은 도시를 떠나지 못했다. 왕복 2시간이 넘는 통근이 피곤하지만, 옮겨 간 터전에서 시들까봐 겁이 났다. 괜찮은 집을 찾지 못했다는 건 이사 가지 않은 이유에서 작은 부분만을 차지한다. 나의 가장 다정한 시절이 여기 있다.

곳곳에 추억이 있다. L고 교복을 입은 학생들의 앳된 얼굴을 버스에서 바라볼 때, 함께 깔깔 북적대며 걷던 사거리를 볼 때, 눈을 감고도 찾아갈 L고를 지나갈 때 생생하게 살아나는 기억들이 자꾸만 아쉬웠다. 최선을 다 했다고, 재미있게 잘 보냈다고 생각하는데도 미적대던 이유를 알 수 없어 답답한 채로 올해의 대부분을 보냈다.

여섯 번째 가을이 되어서야 내가 나를 믿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챘다. 선생님인데 모자란 모습을 너무 많이 보인 건 아닌지, 어른답지 못했던 것은 아닌지, 최선을 다 해본 것은 맞는지 계속 되물을수록 믿음은 낮아졌다. 그 믿음의 수위를 사랑하고 존경했던 사람들, 교복을 입고 내 곁에 머물다 간 사람들이 올려주기를 바랐다. 그 바람은 나의 욕심, 그들에게 부담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혜원이 그랬듯 자신에 대한 믿음을 회복하는 데에 올해 남은 시간을 쓰고 싶다. 지금 만나는 학생들은 혜원 곁에서 묵묵히 자기 할 일을 하는 재하를 닮았다. 짧은 가을에 그들과 결실을 맺으려 ‘낮곁글방’ 동아리를 열었다. 첫 글감은 ’책임‘. 이천에서의 기억을 곱씹으며 쓴 나의 글에 글방 동료가 된 4반 형진님은 이렇게 합평해주었다.

그래도 제인님이 끝까지 책임을 지셨기에 형들이 멋진 어른이 될 수 있지 않았을까요?

어른이 된, 이제 내 곁에 없는 사람들을 오늘 좀 더 배웅한다. 그리고 아주심기를 준비한다. 더욱 단단하게 뿌리 내리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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