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ina Bausch에게 춤이란 무엇인가
말을 못하는 어린아이도 기분이 좋으면 몸을 들썩거린다. 춤은 가장 원초적인 표현수단이며, 모든 예술의 원형이다. 노동이 필수적이었던 원시사회에서 살고자 하는 육체의 몸짓은 춤으로 발전하였고, 단순한 육체적 몸놀림 속에 숨어있는 감정들은 춤을 통해 주술적인 성격까지 가지게 되었다. 어떤 행위를 하는 것은 생각을 일으키고 생각은 다시 행위로 이어진다. 춤은 궁극적으로 자기실현 의지의 표현이었으며, 어원대로 ‘생명의 욕구’였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춤은 표피와 형식, 사조와 기교에 갇혀 인간의 감정과 욕구의 반영 수단에서 멀어지게 되었다. 현대인들에게 춤은 현실이 아닌 특수한 상황이며 그마저도 이미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동작의 반복일 뿐이다.
피나 바우쉬는 춤의 본질을 찾고자 한다. 그녀는 어떻게 움직이냐보다는 무엇이 인간을 움직이게 하는가에 집중한다고 한다. 춤은 곧 행동이자 살아가는 것이다. 그녀는 삶의 원동력,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인간의 내면에 관심을 둔다. 그녀는 언제나 사랑, 두려움, 고독, 외로움, 기억 등의 실존적인 문제를 몸을 통해 탐구했다. ‘카페 뮐레’에서 피나는 눈을 감고 춤을 춤으로써 내면을 마주하고 자신이 처음 춤을 추었을 때의 감정을 상기한다. 그녀 역시 시각의 차단은 그를 제외한 모든 감각을 극대화시켜 강력한 감정의 경험을 겪게 해준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처음에는 어색해하던 무용수들도 차츰 그들의 내면의 감정을 몸으로 전달하게 되었다. 인터뷰를 보면 무용수들은 러시아어를 쓰기도 하고, 독일어를 쓰기도 한다. 피나와 무용수들은 말의 언어가 아닌 몸의 언어로 서로의 의견을 조율하며 춤을 완성시켜 나간다. 하지만, 맞춰진 짜임이 없듯 무용수들의 몸의 언어 역시 말의 언어만큼 개성 넘치고 다양하다.
피나의 춤은 무대가 없는 것이 또 하나의 특징이다. 그녀는 자연 그 자체를 무대로 삼기도 하고 공연장 위에 낯선 장치를 가져다 놓음으로써 무대를 낯설게 하기도 한다. 무대를 뒤집는 피나의 행동은 그녀의 춤이 삶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은 쳇바퀴 위에서만 굴러가지 않는다. 그녀는 공연장에서 벗어나 삶 속에 녹아 든 춤을 보여준다. 달리는 열차 안에서 인형에게 화를 내는 여자의 모습, 절벽 위를 뛰어올라 광란의 춤을 추는 모습, 언덕 위를 줄이어서 걸으며 춤을 추는 모습 등은 인간의 삶 그 자체가 춤이라는 것을 직관하게 한다.
오늘날, 피나 바우쉬는 탄츠테이터(dance theater)의 시초로 평가된다. 하지만, 그녀는 단순히 춤을 연극으로 끌어들인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삶이 춤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녀의 춤은 원시의 그것처럼 꾸밈이 없고 격정적이다. 그만큼 그 시대에서 춤이 가지고 있던 춤의 본질을 회복시킨다. 그녀의 춤은 어떤 소품도 활용 가능하며, 어떤 상황에서든 어떤 감정이든 모두 다 나타낼 수 있다. 그녀의 춤은 원초적인 동시에 자기 주체성의 회복이자 절절한 생의 의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