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사 동기 B가 죽었다
작년 9월, 반가운 입사 동기 B에게 연락이 왔다. 문자 내용을 읽어보니 그건 B가 보낸 것이 아니었다. B의 부모님이 보낸 부고 알림이었다. 부고 내용 중 [항상 본인보다 주변 사람들을 위해 헌신하며 살아온]라는 말이 계속 눈에 밟혀 다음 문장을 읽을 수가 없었다. B는 정말로 그랬다. 입사 동기 모임이 있으면 B는 항상 빠지지 않고 참석했고, 다른 입사 동기들이 더 많은 말을 할 수 있도록 친절한 질문을 던져주고, 분위기가 어색해지면 본인이 가지고 있는 소중한 이야기를 풀어주었다. B는 공식적인 모임이 아니더라도 입사 동기들에게 개인적으로 연락해 안부를 자주 물었다. 나는 그런 B에게 너무 고마웠다. 반대로 나는 B에게 연락을 자주 하지 못해서 미안했다. 연락이 오면 반갑게 받아서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내가 먼저 연락을 한 적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나는 동기들의 대표로 B의 장례식장에 갔다. 장례식장에서 B를 만나서 마지막 인사를 하는데, 마음 깊숙이 숨겨둔 미안한 감정이 눈물로 터져 나왔다. B가 나에게 안부를 물었던 것처럼, 나도 B에게 안부를 묻지 못했던 것이 너무 후회됐다. 행복하게 웃고 있는 B의 사진을 보고 있는데 마음이 아니라 가슴이 아팠다. 그렇게 아픈 가슴을 부여잡고 한참을 서 있었다. 미안하다는 말은 입 밖으로 꺼낼 용기가 나지 않아서, 속으로만 미안하다고 수십 번 고백하고 나서야 장례식장을 떠날 수 있었다. 일상으로 돌아오고 나서도 B가 종종 꿈에 나타났다. 매번 꿈속에서 나에게 장례시장에 와줘서 고맙다고 인사를 했으며, 자신은 이제 너무 편안하다고 말하며 나를 안심시키려고 노력했다. 그렇게 B는 꿈속에서도 헌신적인 사람이었다.
내게도 죽음이 찾아왔다
내가 친구들 사이에서 1번으로 코로나에 감염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뉴스에서 매일 확진자가 늘어나고 있다고는 했지만 실감이 나지는 않았다. 그런데 내가 코로나에 감염되고 나니 코로나가 심각하게 확산되고 있다는 사실이 느껴졌다. 코로나를 감기처럼 가볍게 앓고 지나가는 사람도 있지만, 나는 아쉽게도 그렇지 못했다. 병원에 입원을 해서 피검사와 X-RAY를 찍었다. 검사 결과를 기다리는데 얼마나 불안했는지 모른다. 그렇게 꼬박 하루를 잠도 못 자고 기다리니 침대 뒤편에 있는 전화가 울렸다. 의사 선생님은 내가 일반인에 비해 염증 수치가 25배로 높고, 폐렴이라는 병에 걸렸다는 말을 무덤덤하게 전했다. 나는 다급히 도대체 내가 얼마나 위험한 상황인지 물었다. 내 다급한 태도에도 의사의 무덤덤한 태도는 바뀌지 않았다. 오히려 더 차분한 목소리로 나는 나이가 젊으니 스테로이드 치료만 잘 받으면 괜찮아질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스테로이드 치료가 시작되고 3일이 지나도 증상이 나아지질 않았다. 해열제를 투여해도 39도까지 올라간 열은 좀처럼 내리질 않았고, 들끓는 가래와 잦은 기침으로 인해 숨 쉬는 것조차 편하지 못했다. 정말로 내가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러니 밤에 잠도 제대로 잘 수가 없었다. 눈을 감고 누워있다가 잠이 들 때면 몸에서 경련을 일으켜 나를 깨웠다. 평소에 수면제로 보던 만화를 봐도 잠에 들 수 없었고, 유튜브에서 유명한 수면 영상을 보아도 잠에 들질 않았다. 이대로 잠들면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무의식이 자꾸만 나를 잠들지 못하게 했다. 나의 상태는 점점 나빠졌다. 열은 이제 39도에서 40도까지 올라갔고, 덩달아 혈압도 150까지 올라갔다. 이 정도로 아프게 되니 이제는 포기하면 편해질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대로 죽고 싶진 않았다. 폐쇄 병원에서 가족들도 보지 못하고, 혼자 쓸쓸하게 죽는 것은 내 인생 시나리오에 없던 일이다. 죽더라도 이 병원에서는 나가서 죽고 싶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잠을 잘 수 있을지 정말 치열하게 고민했다. 단순히 수면제를 먹는 것이 좋은 해결책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수면제도 약물이기 때문에 지금 먹고 있는 스테로이드와 부작용을 나타낼 수도 있고, 한번 약물에 의존하면 나중에 일상으로 돌아갔을 때 돌이킬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최종 해결책으로 선택한 것이 바로 '차'다. 차는 약물에 대한 부작용을 걱정할 일도 없으며, 물과 함께 마시니 면역력을 높여줄 것이라고 판단했다. 인터넷에 찾아보니 자스민 차가 특히 불면증 환자에게 좋다고 했다. 자스민 차에 들어있는 성분들은 마음을 차분히 진정시키고, 잠에 편히 들 수 있도록 도움을 준다고 했다. 그래서 간호사에게 부탁을 해서 어렵게 자스민 차를 받았다. 덕분에 병원에 입원하지 5일 차가 되는 날에 처음으로 잠을 잘 수 있게 되었다.
잠을 자고 일어나니 몸이 한결 가벼웠다. 열도 37도로 많이 내렸고, 혈압은 다시 정상으로 돌아갔다. 피검사를 다시 해보니, 염증 수치가 일반인의 15배로 많이 줄었다고 했다. 드디어 회복이 되기 시작한 것이다. 많이 좋아졌다는 검사 결과를 듣고 나니 이 병원에서 살아나갈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그래서 밥도 더 잘 먹었고, 물도 더 자주 마셨고, 간간히 몸을 움직이며 운동도 했다. 열심히 회복하려고 노력하니 매일 조금씩 좋은 변화가 생겼다. 숨을 쉬어도 기침이 나오지 않았고, 기침을 해도 가래가 나오지 않았다. 나중에는 열도 완전히 내려 정상 체온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렇게 병원에 입원한 지 25일 차가 되고 나서야 전화로 의사 선생님에게 일상으로 돌아가도 좋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그날은 의사 선생님의 목소리에 무덤덤함이 아니라 환희가 묻어 있었다. 퇴원을 하고 집으로 바로 돌아가지 않고, 근처 공원을 산책했다. 공원에서 가장 나무가 많은 곳으로 가 마스크를 벗고 심호흡을 했다. 자연 속 순수한 공기가 폐로 들어오는데, 그 공기에서 짜릿한 맛이 났다. 그 순간 이제는 행복한 삶이 시작될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집이 공사판으로 바뀌었다
확신은 나만의 착각이었다. 안 좋은 일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한 달 동안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집으로 돌아오니, 우리 집 바로 앞, 옆, 뒤에 있는 모텔들이 철거되고 있었다. 우리 집을 기준으로 5m 떨어진 3면에서 공사를 하니 공사 소음이 심각했다. 보통 공사 소음은 70db만 넘으면 신고를 할 수 있는데, 우리 집에서 소음을 측정해보니 120db이 나왔다. 120db은 전투기의 이착륙 소리와 같은 크기의 소음으로, 우리 집이 공항 착륙장이 되었다고 보면 된다. 그러니 당연히 집에서는 일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직무 특성상 화상회의가 많은 편인데, 도저히 이 공사판에서 마이크를 켜고 이야기를 전달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회의가 잡히면 집에서 멀리 떨어진 카페로 달려가 회의를 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오면 귀마개를 끼고 일을 했다.
어릴 때 잠시 있었던 이명이 다시 재발이 될 것만 같았다.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구청에 신고를 했다. 구청에서는 조만간 현장에 나가서 신고 사실을 확인하겠다고 말했다. 역시나 일주일이 지나도 나아진 것이 없었다. 오히려 공사가 진행될수록 소음은 더욱 커졌다. 심지어 공사시간이 앞 당겨졌는지 새벽 6시부터 공사 소리가 났다. 다시 구청에 전화를 했다. 마침 오늘 현장에 나가는 날이니 조금만 기다려달라고 했다. 나는 일단 공사 소음을 처리하는 것이 중요하니, 머리끝까지 난 화를 꾹꾹 참고 기다렸다. 다음날 구청에서 전화가 왔는데 황당한 답변을 들었다. "공사 소음으로 인한 보상을 받고 싶다면 환경분쟁조정위원회로 문의하세요." 공사 소음이 심한 것은 맞지만, 구청에서 해줄 수 있는 것은 건설사에 범칙금을 부과하는 것 밖에 없다고 했다. 아니, 진작에 말을 해주던가요.
어쩔 수 없이 환경분쟁조정위원회에 연락을 했다. 내 상황을 척하고 이야기하니, 떡 하고 알아 들었다. 꽤나 많은 사람들이 공사 소음으로 신고를 하고 있는 듯했다. 그런데, 황당한 답변을 하는 건 환경분쟁조정위원회도 마찬가지였다. 공사 소음으로 건설업체를 신고하면 중간에서 분쟁조정을 해줄 것이고, 분쟁에서 내가 승리한다면 12만 원 정도를 보상받을 수 있다는 말이다. 앞으로 공사가 3개월에서 길게는 6개월까지 진행되는데 내가 보상받을 수 있는 금액이 12만 원 밖에 안된다는 게 솔직히 믿기지 않았다. 그런데 환경분쟁조정위원회 사이트에 있는 과거 내역들을 보니 보상 금액이 정말로 10만 원~30만 원 사이였다. 보상금을 한 명이 아니고 그 건물의 모든 세입자에게 줘야 하다 보니, 보상 금액이 높을 수가 없다는 것이 담당자의 설명이었다.
전세사기 피해자가 되었다.
차라리 내가 이사를 나가는 게 빠르겠다 싶어서 집을 보러 다녔다. 내가 제일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조용한 입지다. 지하철, 버스 정류장에서 멀어도 괜찮으니 공사장이 없는 조용한 동네에서 살고 싶었다. 그런데 전세 매물 자체가 많지 않아서 집을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일주일을 매일 돌아봐도 동네도 마음에 들고, 보증금도 맞는 전셋집이 없었다. 그러다가 조용한 암사동에 위치한 투룸을 보게 되었다. 5층에 있는데 엘리베이터가 없어서 오르락내리락 하기는 힘들지만, 고층이라 해도 잘 들고 전망도 좋았다. 무엇보다 동네가 조용해서 창문을 열어두어도 고요한 것이 참 좋았다. 이 집이라면 집에서 일도 하고, 책도 읽고, 글도 쓰고, 친구도 초대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침 보증금도 내가 마련할 수 있는 금액과 딱 맞았다. 중개사는 나에게 이 집이 융자도 없고, 매매가가 전세가보다 훨씬 높다고 말했다. 나는 중개사의 말을 철석같이 믿고 가계약금 100만 원을 집주인에게 넣고, 주말에 계약을 진행하기로 했다. 그리고 계약을 하는 날 중개사에게 전화가 왔다. 목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계약을 진행하기 전에 자기가 고백할 것이 있다고 했다. 만나서 이야기를 나눠보니 이 집은 매매가가 전세가보다 낮게 팔릴 예정이라고 했다. 그렇게 되면 나는 차액에 대해서 보상을 받지 못하게 될 수 있는 것이다. 최악의 경우 내가 사고 싶지 않은 이 집을 사게 될 수도 있었다. 나는 이 말을 듣고 도저히 전세 계약을 진행할 수 없고, 가계약금을 돌려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집주인은 내가 단순변심에 의해 계약을 파기한 것이라 가계약금을 돌려줄 수 없다고 말했다. 중개사에게 이게 말이 되냐고 물으니, 갑자기 차가운 목소리로 자신이 더 이상 해줄 수 있는 것은 없다고 말했다. 그리고 더 큰돈을 잃지 않게 되어서 다행인 줄 알라며 충고를 해줬다.
나는 그동안 중개사와 대화를 나눴던 모든 녹취본을 들고 경찰서로 갔다. 경찰서에 가서 조서를 쓰고 자료를 넘겼다. 그러나 경찰서에서는 조사를 해서 문제가 있다면 중개사를 처벌하겠지만, 나에게 보상을 해줄 수는 없다고 했다. 내가 보상을 받고자 한다면 민사로 소송을 해야 하고, 최소 200만 원 정도의 돈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100만 원을 돌려받기 위해 200만 원을 쓰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나는 결국 가계약금 100만 원은 포기하기로 결정했다. 그렇게 허무하게 집으로 돌아와 소파에 털썩 앉았다. 창문 밖을 보니 십자가가 걸린 교회가 보였다. 나는 처음으로 이 교회를 보면서 하나님이 원망스럽다고 말했다. 안 좋은 일이 있어도 항상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매일 나약해지지 않으려고 단단한 척 버티고 었었는데. 나를 이렇게 불행하게 몰아붙이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이냐고 울부짖었다. 처음으로 죽지 않고 살아있는 게 더 힘든 새벽을 보냈다.
좋은 일은 새로운 집에서 시작됐다
전세 사기를 당하고 엄마와 상의를 했다. 마지막으로 집을 하나만 더 보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본가로 들어와서 살기로 했다. 마지막으로 보러 간 집은 송파동에 있는 옥탑이었다. 인터넷으로 보았을 때는 넓어 보이던 집이 실제로 보니 많이 작았다. 내가 가지고 있는 가구들이 도저히 들어갈 수 없는 크기였다. 그렇게 발걸음을 돌리려는데 중개사님이 전셋집 하나를 더 보겠냐고 물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보러 갔다. 이 집은 보자마자 너무 마음에 들었다. 안방은 요시고 사진전에서나 볼 수 있는 햇살과 그림자로 가득했다. 작은방은 창문이 통창으로 되어 있었고, 창문 너머로는 롯데타워가 보였다. 전체적인 집의 색감이 그레이 톤으로 내가 가지고 있는 원목 가구들과도 잘 어울릴 것 같았다. 당장이라도 이사를 오고 싶었지만, 문제가 있었다.
보증금이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내가 마련할 수 있는 보증금보다 2천만 원이 더 비싼 집이었다. 집은 마음에 드는데 돈이 없으니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엄마에게 돈을 빌려야 하나, 신용대출을 받아야 하나, 너무 무리하는 것 같은데 본가로 들어가야 하나. 고민을 하고 있는데 중개사님이 집주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집주인에게 나를 좋은 사람이라고 포장해서 말하며, 보증금을 2천만 원만 깎아줄 수 없냐고 물어봤다. 나는 눈은 동그랗게 뜨고, 손은 가지런히 합장하고, 중개사님만 바라보면서 집주인의 답변을 기다렸다. "중개사님이 그렇게까지 말하면 깎아줘야죠."라는 답변이 들렸다. 순간 코가 찡해지면서 눈물이 찔끔 났다. 중개사님, 집주인에게 고맙기도 했지만 드디어 긴 불행의 터널에서 빠져나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뛸 순 없어도 걸을 순 있다.
병원을 퇴원하고 나서는 조금만 걸어도 힘이 들었다. 집 근처를 산책하고 돌아오면 호흡이 가빠지고, 열이 났다. 심하면 심박수도 높아져서 숨 쉬는 게 불편해지곤 했다. 그래서 한동안은 집에서 쉬기만 했는데 의사 선생님에게 단단히 혼이 났다. 의사 선생님은 나한테 쫄지 말라고 당부했다. 건강하고 싶다면 밖으로 나가서 열심히 산책을 하라고 했다. 오히려 집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건강에 독이라고 했다. 그래서 이제는 아주 느리게 그리고 오랫동안 걷는다. 한 달 정도 걸어보니 걷기는 좋은 점도 있고 나쁜 점도 있다.
좋은 점은 내가 어디에 있는지를 명확히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달리면 스쳐 지나가는 풍경들이, 걸으면 아주 느리게 지나간다. 그래서 그 풍경 속에 있는 자연, 사람, 건물, 동물, 소리들을 온전히 느낄 수 있다. 덕분에 내가 얼마나 아름다운 곳에 있는지를 알아차리면서 행복해할 수 있다. 반대로 나쁜 점은 뛰는 사람들의 뒤통수를 봐야 한다는 것이다. 코로나 이전에는 5km를 30분 정도면 뛰었는데, 이제는 60분이 넘게 걸린다. 그래서 나를 앞지르고 뛰어가는 사람들의 뒤통수를 보면 왠지 모를 분한 감정이 생긴다. 그래도 마음을 급하게 먹지는 않으려고 한다. 걷고 나서 열이 나지 않는 것만으로도 큰 행복이고, 나도 천천히 걷고 걷고 또 걷다 보면 다시 뛸 수 있을 테니까.
회사에서 잘했다고 인정을 받았다
나는 지금 IT 회사에 다니고 있다. 우리 회사에선 1년에 한 번씩 '해커톤'이라는 행사를 개최한다. 해커톤이란 해킹과 마라톤의 합성어로, 24시간이라는 한정된 시간 동안 비즈니스 모델을 동작하는 개발 결과물로 만들어내는 행사를 말한다. 친하게 지내고 있던 개발자 A가 해커톤에 같이 나가자는 제안을 했다. 나는 이 제안을 거절했다. 아직 체력이 완전히 회복된 것이 아니라 팀원들에게 민폐가 될 것 같았다. 그런데 해커톤이 시작되기 전날, A에게 한 번 더 연락이 왔다. A가 만든 팀에는 내가 필요하다고 했다. 다른 기획자가 아니라 나라는 기획자랑 같이 하고 싶다는 말이 크게 와닿았다. 나는 무리를 해서라도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코로나 때문에 한참을 쉬고 왔는데도 나를 찾아주고, 나의 능력을 믿어주는 A가 너무 고마웠다.
A 말고 다른 팀원들도 대화가 참 잘 통했다. 우리는 아이디어가 너무 많은 게 골칫거리였다. 우리는 지금의 비즈니스가 가진 문제를 잘 알고 있었고,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효율적이고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많이 가지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비즈니스의 가치가 가장 직관적으로 표현되는 아이디어를 최종적으로 선택해서 개발을 시작했다. 개발자가 4명이었지만 개발 결과물을 단기간에 만드는 일은 쉽지 않아 보였다. 나는 최대한 개발자들이 편하게 개발할 수 있도록 꼼꼼하게 정책을 만들었다. 그리고 우리의 아이디어를 초등학생이 봐도 이해할 수 있도록 쉽게 풀어서 쓴 소개서를 만들었다. 모든 작업이 끝나니 다음날 아침 7시가 되었다. 결과물을 제출하고 회사에서 아침으로 제공한 맥모닝을 먹으면서 서로가 서로에게 최고라고 격려를 했다. 이렇게 동료들과 의기투합해서 열정적으로 일을 한 것은 정말로 오랜만이었다.
결과 발표는 온라인으로 진행되었다. 회사의 구성원들 임원들이 30개가 넘는 팀들이 만든 결과물을 심사했다. 다른 팀들의 결과물을 보니 솔직히 자신감이 떨어졌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하셨지? 와, 너무 좋은데? 감탄을 자아내는 아이디어들이 많았다. 그래서 겸허히 결과 발표를 듣고 있었는데, 2등 발표에서 우리 팀 이름이 나왔다. "<팀명 은미정> 팀 2등 축하드려요." 우리는 팀이름 고민하는 시간도 아껴서 비즈니스 아이디어를 고민하는데 쓰느라 팀명을 미정으로 지었는데. 그런 대충 지은 이름이 불리니 어안이 벙벙하기도 했고, 팀원들과 열심히 고민하고 만들어낸 결과물을 인정받아서 기쁘기도 했다. 어쩌면 이 회사에 입사하고 처음으로 칭찬을 받은 것 같다. 다른 동료들 앞에서 공식적으로 인정받는 기분은 생각보다 더 섹시하고, 중독되는 느낌이었다. 덕분에 회사에서 일을 하는 게 다시 설레기 시작했다. 잃어버렸던 열정을 조금은 되찾은 것 같다.
가로등이 하나도 없는 캄캄한 터널을 걸어간다고 상상해보자.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도, 어디로 가는지도, 그리고 언제 끝이 나는지도 알 수 없다. 그런 상황에서 나는 얼마나 불안하고 위태로울까. 내게 안 좋은 일들이 끊기지 않고 일어나던 시절엔 매 순간을 캄캄한 터널을 지나는 것처럼 살았다. 내 인생에서 더 이상 좋은 일은 없을 것만 같고, 나는 이제 평생을 불행하게 살게 될 것 같았다. 그래서 차라리 죽고 싶다는 생각도 했다. 그런데 캄캄한 터널을 나와서 돌아보니 아무리 긴 터널도 끝은 있겠구나 싶다. 앞으로 나에게, 그리고 친구에게, 그리고 가족에게, 안 좋은 일이 생기면 존나게 버티라고 말해주고 싶다. 안 좋은 일 다음에 또 안 좋은 일이 일어날 수 있는데, 실없는 희망을 주고 싶지는 않다. 안 좋은 일도 언젠가는 끝이 난다는 것은 확실히 알고 있으니까. 그냥 열심히 버텨보라고, 내가 옆에서 손을 꼭 잡아 주겠노라고 말해주고 싶다. 그러니 우리 내일도 존나게 버텨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