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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주선 Mar 01. 2023

반세기 전 몰락한 日‘총평’과 민노총

문화일보 오피니언 포럼(2023.2.9)

제2차 세계대전 후 일본 노동운동은 좌파 ‘일본노동조합총평의회’(총평)가 지배했다. 총평은 1950년 출범, 1970년대 제1차 석유파동까지 ‘총평불패’ 신화를 썼다. 총평은 직장투쟁을 통한 현장 통제, ‘연소용공’(聯蘇容共·소련과 연합, 공산당 용인)의 반전·반핵 평화투쟁, 사회당 집권을 위한 ‘보혁역전’(保革逆轉) 전략을 추구했다.


1955년 6차 총평대회에서 출범한 ‘오타(太田)-이와이(岩井) 라인’이 이 좌파 노선을 정립했다. 이들이 등장하면서 유명한 ‘춘투’(春鬪)가 시작됐다. 이들은 ‘현장 관리·감독자를 두려워하지 않는 직장’을 목표로, 강력한 현장 조직 구축과 직장 투쟁을 통한 노조의 현장 통제를 ‘조직강령’으로 제시했다. 이미 현장 장악은 미쓰이미이케(三井三池)광업소노조와 닛폰(日本)철도노조 등에 있었는데, 총평은 전국적인 확대를 도모했다. 이듬해 총평은 기업을 노조와 자본가의 조합원 쟁탈 경쟁으로 규정, 기업을 직장투쟁으로 사회주의 하부 구조화한다는 목표를 조직 강령화했다. 미이케노조는 그 전위대가 됐다.


이 총평 신화의 추락은 놀랍게도 1960년 ‘미이케 쟁의’로부터 시작됐다. 1955년에 시작된 고도성장에 따른 급격한 에너지 수요 증가로 일본 에너지 정책은 ‘주탄종유’(석탄 우선)에서 ‘주유종탄’(석유 우선)으로 바뀌었다. 전국 광산의 대규모 구조조정이 불가피했다. 미쓰이도 1959년 4580명 희망퇴직, 1280명 지명해고를 했다. 이에 미이케노조는 1960년 1월 무기한 파업을 시작, 11월까지 계속했다. 총평은 다른 사업장 37만 명의 지원 투쟁과 20억 엔 투쟁자금 모금으로 총력 지원했다. 그러나 이 쟁의는 다수의 노동자가 제2노조를 결성해 이탈하고, 총평이 이 쟁의를 반미 안보투쟁과 연계하면서 순수성을 의심받아 몰락의 신호탄이 됐다.


총평은 1974년 1차 석유파동 때에도 330만 명을 동원해 ‘국민춘투’로 임금을 33% 인상시켰다. 그런데 노동자들은 20% 이상 초인플레이션과 취업 기회 격감으로 더 어려워졌고, 국민은 ‘일본열도 침몰론’ 등으로 장래를 불안해했다. 기업들은 세계 시장에서 치열한 경쟁으로 절박한 생존 위험에 처해 있었다. 총평의 계급투쟁론과 파업 지상주의 강성 노동운동은 국민은 물론 노동자들에게도 정당성을 인정받지 못했다.


결국 1975년, 주도권이 우파 노조인 ‘일본금속노조’(IMF-JC)로 넘어갔다. IMF-JC는 사용자 협력과 정부 정책 협의로 노동자 권익을 향상시키는 ‘국민경제 정합론’에 바탕을 뒀다. 이는 1977년 이후 노사정 정책연합인 ‘정노사(政勞使)간담회’로 정착, 노사 관계 안정의 보루가 됐다.


지난 7일 민노총은 반윤석열 투쟁 전면화, 5월 총궐기와 7월 총파업, 한·미 군사훈련과 한·미·일 동맹 반대, 사드 철거 투쟁, 총선 투쟁을 올해 핵심 어젠다로 제시했다. 조폭 같은 불법파업으로 국민의 눈에 난 화물연대, 건설노조 등을 표창했다. 일부 핵심 간부는 북한 간첩단 연루 혐의로 당국의 수사를 받고 있다. 또, MZ세대 노조가 민노총에 대항, 이념·정치 투쟁이 아니라 노동자 권익 보호를 표방했고, 교사노조연맹은 노조원 수가 전교조보다 많아졌다.


과연 민노총은 일본 총평의 전철을 밟지 않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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