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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저리호저리 Dec 26. 2020

영업왕 유니세프걸

난 피하지 못했다

 


출근은 저녁 7시.

이자카야에서 일하려면 저녁 출근은 당연하다. 평소처럼 롱 패딩을 입은 채 자전거를 타고 항상 세우던 곳에 세운다. 요 며칠 자전거 세우는 곳 앞에서 유니세프를 홍보하는 학생인 듯 아닌듯한 분들이 잔뜩 진을 치고 있다. 최대한 멀리 주머니에 손을 꽂고 고개를 숙이고 도망간다. 좋은 일 하시는 거겠지. 그래도 길거리에서 붙잡힌다는 건 언제나 불편하기에 언제나 도망간다. 바쁘지 않아도 바쁜 사람이 된다.


 짠!


 이게 뭘까. 25살 정도로 보이는 여성이 내 앞으로 점프를 하며 '짠!’을 외쳤다. 그러면서 내민 손가락에는 별 모양 스티커가 붙어있다. 투표해달라는 거겠지. 그러면서 유니세프 가입을 독려하겠지. 사실 유니세프에 후원한 적은 있다. 군대에서 행군할 때 '물은 생명이다’라는 식상한 문구가 나에게 현실로 다가오는 갈증이었다. 제3세계에서 물이 없는 아이들은 항상 이런다고? 전역하면 무조건 유니세프 가입해야지. 전역한 후 길거리 유니세프 천막에 스스로 찾아갔다.


  가입할게요.


 월 3만 원씩 수개월을 냈다. 그 후에는 돈이 부족하다는 핑계로 3만 원 조차 후원하지 못하는 어른이 되었었다. 가난하고 기구한 삶이었다.

 

 짠!이라고 외친 그녀는 너무나 해맑았다. 고수다.


 네 짠…

 시민님 잠시 시간 되세요?

 아니요, 저 지금 출근 늦어서 어서 가봐야 해요.

 2분만 시간 내주셔서 투표해주시면 안 될까요?

 

 낯선 사람에게 거짓말과 거절을 잘 못 하는 성격에 20살에는 대순진리회에 잡혔었다. 대순진리회는 간단히 말해 ‘도를 아십니까’다. 그분들에게 반 강제로 끌려가서 한 달간 수업을 들은 적도, 돈을 낸 적도 있다. 물론 출퇴근 식이 었다. 못 간다는 말을 하기엔 미안하고, 갑자기 연락을 끊고 안 가기엔 내가 너무 불편했다. 결국 한 달 뒤 더 이상 오기 힘들다는 말로 도망쳐 나왔다.

 

 네... 잠깐이면 할게요.

 

 역시 이번에도 걸려들었다. 그래도 대순진리회에서 유니세프면 더 글로벌하고 뜻깊은 발전 아닌가.


 여기 4개의 사진이 있어요. 밥을 못 먹는 아이, 부모를 전쟁으로 잃은 아이, 오물을 마시는 아이, 교육을 못 받는 아이. 이 중 어떤 아이가 가장 도움이 절실할까요? 투표해주세요.

 어떻게 하나면 골라요. 다들 불쌍한데. 다 할게요.

 안돼요~ 딱 하나만 해주세요.


 하나의 사진에 투표하고 해맑은 고수에게 영업을 당하고 있었다.

 

 이 아이들은 하루 700원이면 밥을 먹을 수 있대요.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요?


 이미 돈을 낼 생각은 있다. 언젠간 해야지 해야지가 오늘이 될 줄은 몰랐지만 말이다. 준비된 서류에 이름과 주민등록번호 이메일 등등 기재를 하고 있었다.

 

 와~ 김주호 회원님 너무 감사드려요. 그런데 제 이름은 뭔지 아세요?

 

 목에 걸린 명찰을 가리면서 장난스럽게 물어본다.

 

 음~ 아니요 몰라요.

 아아 너무해요.

 

 뭐가 너무하다는 건가. 난 셜록홈즈처럼 한순간에 사람을 파악해서 당신이 오늘 점심에 무엇을 먹었고 어제저녁에 잠을 자지 않아 눈이 충혈됐고 남자 친구와 왜 다퉜는지를 파악할 수 없다.

 

 에이 뭐 그럴 수도 있죠. 월 3만 원씩 후원할게요. 우진 씨.

 

 그녀의 명찰을 돌려 이름을 보면서 말했다.

 

 오 너무 감사합니다. 시간 없으시면 출근하시는 길로 가면서 더 설명해 드릴게요. 그리고 너무 감사드리니까 포옹!


 그녀는 팔을 잔뜩 벌리면서 웃고 있다. 아니라고 거절하기도 민망할 것 같아 추운 날씨에 주머니에서 손을 빼지 않고 몸만 그녀에게 안긴다.

 

 이게 뭐예요~

 에이 남녀 칠 세 부동석이죠.

 

 걸어서 1분이 채 안 걸리는 곳에 나의 일터가 있다. 둘은 나란히 서서 걸어간다.

 

 시민님 제가 예뻐서 후원해주시는 거죠?

 에이 아니에요~ 장난치지 마세요~

 너무해요! 장난하지 마요~

 장난 아니에요~ 영업 너무 잘하셔서 한 거예요. 저희 가게에서 일하실래요?

 너무해요...

 

 이렇게 넉살이 좋다면 우리 가게에 스카우트를 해도 좋다고 생각했다.

 

 저 저기서 일해요. 이자카야. 자주 놀러 오세요.

 놀러 가면 서비스 줘요? 그런데 저 서울 살아요.

 언제든 놀러 와요 우진 씨. 부천도 사람 사는 곳이니까 놀러 오면 되죠.

 저 기억 못 하실 거잖아요.

 유니세프 조끼 입고 오면 무조건 기억할게요.

 알겠어요. 그런데 회원님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아세요?

 우진 씨랑 나랑 처음 만난 날?

 아이 그것도 맞고요. 오늘은 시민님이 50명의 아이를 구해준 날이에요.

 

 그 후로 좋은 이야기를 잠깐 더 하다가 나는 가게로, 그녀는 있던 곳으로 돌아갔다. 해맑은 영업왕을 만나 색다른 지출을 했다. 그래도 출근 전 즐거운 에너지가 생기고, 언젠가로 미뤄뒀던 후원도 하게 되어 나름 뿌듯한 출근길이었다.


내가 이자카야를 1년 정도 더 다니다 그만 둘 동안 그녀는 단 한 번도 오지 않았다. 우진 씨는 제3세계 어린이들만 좋아하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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