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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현직 May 05. 2023

지하철 서재

출퇴근 지하철에서 쓴 나의 첫 책 이야기

“왕복 4시간 출퇴근이요? 그러면 삶이 불행할 것 같아요.”



요즘 회사에서 처음 만나는 분들에게 많이 듣는 말입니다.


2년 전 딸아이의 육아를 위해 서울에서 경기도 일산으로 이사를 했고, 덕분에 왕복 4시간의 출퇴근을 하고 있어요. 서울에서 회사를 다닌 10년 남짓의 시간 동안 ‘출근 30분’은 저의 절대 목표였습니다. 결혼 전에는 혼자 살아 집이 좀 낡았어도, 주위 환경이 좋지 않아도 회사와 얼마나 가까운지를 보고 항상 살 곳을 정해 왔어요. 그래서 아이를 위해 일산으로의 이사를 고민할 때 출퇴근이 가장 걱정된 것이 사실입니다. 스타트업에서 마케팅을 하고 있는 평범한 저는 여전히 일산에서 서울을 가로질러 강남으로, 그리고 성수로 지하철을 타고 출퇴근을 해야 했거든요.


처음 왕복 4시간의 출퇴근을 경험했던 날이 기억나요. 허리와 목이 뻐근할 정도로 오래 앉아 있었는데 아직 절반 정도밖에 오지 않은 지하철 노선도를 보면서 허탈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렇게 2년 가까이 왕복 4시간의 출근을 하다 보니 이제 많이 적응했지만, 그래도 멀리 떠나는 출퇴근은 여전히 힘듭니다. 하지만 다행히도 사람들이 걱정하는 것처럼 삶이 불행해지지는 않았어요. 왕복 4시간의 출퇴근은 저에게 ‘작가’라는 새로운 호칭을 만들어 주었으니까요.


지하철은 참 재미있는 공간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와글와글 모여있지만, 또 각자만의 시간을 바삐 보내는 개인적인 공간이기도 하거든요. 긴 출퇴근을 하면서 지하철에서 사람들이 무엇을 하나 살펴봅니다. 직장인으로 보이는 아저씨는 잠을 청하고, 대학생으로 보이는 학생들은 바삐 스마트폰의 스크롤을 내려요. 흔들리는 지하철에서 흔들림 없이 화장을 하는 분들도 가끔 만납니다. 처음에 저는 지하철에서 책을 읽었어요. 퇴근 후 육아가 곧바로 시작되는 ‘애 아빠'의 삶에 그래도 지하철은 책을 읽을 수 있는 여유를 주었습니다. 왕복 4시간의 출퇴근을 하면서 책을 많이 읽을 수 있어 한편으로 좋기도 했어요.


요즘은 지하철에서 글을 씁니다. 브런치와 링크드인 같은 개인 소셜 미디어에 꾸준히 글을 쓰고 있고, 종종 원고료를 받고 짤막한 글을 기고하거나 온라인 강의도 하고 있어요. 최근에는 지하철에서 올여름에 출간이 예정되어 있는 저의 첫 종이책 <어느 날 팀장이 되었다(가제)>의 원고 작업을 마무리하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4시간의 지하철 출퇴근 시간이 짧다고 느껴질 정도예요.


퇴근길 텅 빈 지하철에서


지하철 의자에 엉덩이를 쑥 넣어 허리를 꼿꼿이 앉아 무릎 위에 두툼한 가방을 올리고 그 위에 노트북을 꺼내 놓으면 지하철에 나만의 서재가 만들어집니다. 아, 시끄러운 소음으로부터 고요함을 줄 무선 이어폰과 잔잔한 음악, 스마트폰으로 인터넷을 연결할 수 있는 핫스팟도 필수예요. 처음에는 주위 사람들의 시선에 부끄러웠는데요. 이제는 아무렇지 않아요.


지금은 제 이름으로 나오는 번듯한 종이책의 원고를 쓰고 있지만, 불과 6개월 전만 하더라도 몇 명 보지도 않는 개인 소셜 미디어에 저만의 ‘오답노트'를 쓰고 있었어요. 멋진 책이 될 것이라고 보기 힘들었던, 마음속의 고됨과, 후회와, 부끄러움을 담고 있는 일기에 가까운 글들이었습니다. 너무 힘들어서 지하철에서 글을 쓰기 시작했거든요.





저는 외국계 기업에서 처음 팀장이 되었어요. 29번째 생일을 두 달 정도 앞두었을 때의 일입니다. 생각해 보니 남들보다 조금 이른 나이었어요. 그때는 그동안의 고생이 인정받는 것 같아 기쁜 마음이 컸는데, 차원이 다른 고생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깨닫는데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습니다. 팀장으로서의 회사 생활은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고되고 힘들었어요. 멋진 팀장이 되고 싶다고 희망하는 날들이 많았지만 대체로 위에서, 그리고 아래에서 치여 멋지지 못한 날들이 훨씬 많았습니다.


이후 호기심을 따라 스타트업으로 이직을 했고, 지금까지 스타트업에서 팀장으로 일하고 있어요. 변화무쌍하고 호흡이 빠른 스타트업에서 팀장으로 일하는 것 또한 쉽지 않았습니다. 힘들어하는 팀원들을 애써 못 본 척 다음 미팅으로 발걸음을 옮겨야 했던 날들도, 벽처럼 단단하게 답이 정해져 있는 사람들을 만나 설득하고 또 설득해야 했던 날들도, 매일 쌓여가는 팀원들의 불만을 듣고 또 들어야 했던 날들도, 회사의 급작스러운 변화가 나의 생각인 것처럼 그럴싸하게 포장해 동료들을 다독여야 했던 날들도, 하나같이 쉽지 않았습니다. 팀장으로 보람차고 즐거운 순간도 많았지만 대체로 힘들고 지치는 하루하루가 더 많았어요.  


그렇게 여느 날과 똑같은 힘든 팀장의 하루를 보내고 있던 22년 여름의 퇴근길 지하철 안에서, 처음으로 글을 썼습니다. 그날 유난히 고되고 슬펐던 것 같아요. 늘 실패하지만, 내일은 좋은 팀장이 되어야지라며 다짐하며 잘한 일보다는 잘못한 일들이 먼저 떠올라 머릿속이 어지러운 퇴근길 지하철에 앉아 음악을 듣다 보니 생각들이 떠올랐어요. 오늘, 그리고 어제 제가 했던 실수와 잘못과 같은 후회들입니다.


그날 퇴근길 지하철에서 스마트폰의 메모장을 열어 엄지 손가락으로 톡톡 머릿속의 생각들을 써내려 갔어요. 집으로 가면 시작되는 육아에 시간이 없을 것 같기도 했고, 그날 따라 퇴근길 지하철이 텅텅 비어 있었거든요. 팀장으로 지내며 깨닫게 된 것들이 참 많은데, 모두 하나같이 팀장이 되기 전에 알았으면 좋았을 ‘오답노트’ 같은 것들이에요. <팀장이 된 후에 알게 된 것들>이라는 제목으로 어설픈 글을 소셜 미디어에 업로드했습니다. 저는 그날 누군가에게 하소연을 하고 싶었나 봐요. 제가 조금 힘든데,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요. 서툴지만 배워 나가고 있고, 금방 더 성장할 것이라는 다짐이었습니다.


그로부터 며칠간 스마트폰의 알람이 참 많이 울려서 놀랐습니다. 글에는 좋아요와 댓글이 적지 않게 달렸고, 연락이 없던 지인들에게서 연락이 왔어요. 나도 지금 힘든데, 글을 읽으니 힘이 된다는 말과 함께요. 예전에 함께 일했던 팀원들에게서도 연락이 왔어요. 저도 지금 팀장이 되었는데, 그때는 팀장이 이렇게 힘든 것인 줄 몰랐다는 말과 함께요. 회사에서 한 번도 대화해 본 적이 없던 동료들이 말을 걸기 시작했어요. 잘 읽었다는 말과 함께요. 참 신기한 경험이었습니다. 회사에서는 진심 어린 ‘고맙다'는 말을 듣기가 그렇게 힘들었는데, 글을 쓰고 나서 그런 말들을 많이 들었습니다.


서점에 가보면 대단히 성공한 사람들의 큰 리더십 이야기들이 많잖아요? 그래서 저같이 여전히 고생하고 있는 평범한 팀장이 쓴 작은 이야기에는 공감하는 사람이 많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어요. 그런데 이제 알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큰 이야기에서 얻는 거창한 배움과 교훈만큼이나, 가까이에 있는 작은 이야기에서도 소소한 위로와 도움을 받는다는 것을요. 그때부터 출퇴근 지하철은 제 마음속 오답노트를 적어 내려가는 나만의 서재의 공간이 되었습니다. 무더운 여름을 지나 날씨가 선선해지는 계절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글을 썼어요.


그렇게 저만의 오답노트를 만들고 여러 사람들과 나누다 보니, 그 오답노트들이 쌓여 <어느 날 팀장이 되었다>는 제목으로 ‘브런치 북'이 만들어졌습니다. 그리고 그 오답노트가 2022년 ‘제10회 브런치북 대상’에서 대상을 받게 되었어요. 쟁쟁한 작가분들이 수상했는데, 그 틈에 제가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어요. 22년 겨울의 이야기입니다. 6월 출간을 목표로 열심히 원고를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다음 달이면 첫 책이 나온다니 여전히 설레고 믿기지 않습니다.


불과 여름에서 겨울로 계절이 바뀌는 동안 스마트폰 메모장으로 후회를 썼던 제가, 종이책 출간을 준비하는 ‘작가’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아직도 저를 ‘작가님'이라고 부르는 연락을 받을 때마다 얼떨떨한 기분이에요. 작디작은 씨앗이 큰 나무가 되는 것처럼, ‘브런치 작가'라는 작은 호칭에 물을 듬뿍 주고 가끔 햇빛도 쬐다 보면 나무 같은 작가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상상하는 날들이 많아졌습니다.


우리 모두 남들보다 먼저 한 실수들이 있어요. 제가 지하철에서 글을 쓰며 깨달은 사실은 그저 누군가보다 먼저 한 실수가 생각보다 많은 사람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꽤 가치가 있다는 입니다. 거창하거나 대단하지 않아도 상관없어요. 작고 소소한 이야기에도 누군가는 공감을 하고, 위로를 얻고, 도움을 얻어 가니까요. 저만 하더라도 그렇습니다. 남들보다 조금 더 빨리 경험 한 팀장으로서의 고생과 시행착오가 많은 사람들에게 위로를 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까요. 모두 왕복 4시간의 출퇴근 지하철이 만들어준 서재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어요. “남들에게 줄 수 있는 도움의 크기가 곧 당신의 가치이다.” 


사람들은 거창한 깨달음도 필요로 하지만, 작고 소소한 도움도 필요로 합니다. 힘든 일이 있을 때 완벽한 해결책을 제시해 주는 멀리 있는 대단한 사람만큼이나, 따뜻한 커피 한잔을 앞에 두고 힘든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가까운 친구들로부터 위로를 받는 사람이 많은 것처럼요. 생각보다 우리 모두의 실수와 시행착오에는 남을 도울 수 있는 가치가 있습니다. 약간의 부지런함과 솔직함만 있다면 나의 실수로 더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도 있고요.


저는 오늘도 출퇴근 지하철 속 나만의 서재에서 글을 쓰고 있어요. 지하철은 생각보다 개인적인 공간이고, 작은 이야기도 누군가에게는 위로와 도움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제는 여전히 실수와, 후회와, 잘못에 대한 것들입니다. 저의 시행착오가 누군가에게는 그 이상의 가치가 있기를 바라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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