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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현직 May 26. 2023

가오갤의 빌런은 회사에도 있다

따뜻한 아이스아메리카노와 차가운 핫초코를 찾는 사람들

얼마 전 개봉한 마블의 영화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3>를 재미있게 보고와서 글을 씁니다. 아주 약한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으니 참고 해 주세요 :) 





<가오갤3>에는 하이 에볼루셔너리(이하 ‘하이볼’)라는 새로운 빌런이 등장합니다. 이전 마블 시리즈에서 큰 인기를 얻었던 빌런 타노스가 ‘우주의 인구 감소’를 중요한 비전으로 생각했다면, 하이볼은 ‘완벽한 생명체 만들기’를 목표로 삼고 있어요. 스스로를 창조자라고 생각하는 이 빌런은, 기존의 생명체를 가혹할 정도로 분해하고 개조하여 완벽한 생명체를 만들어 내는 것에 집착합니다. 완벽한 생명체들로만 이루어진 완벽한 세상을 창조하고 싶다고 말하면서요.


하이볼의 광적이고 잔인한 모습은 빌런으로서 인상적이지만, 막상 그의 행보를 보면 답답합니다. 기존 생명체의 무엇을, 그리고 어떻게 바꾸어야 완벽한 생명체가 될지 깊게 생각해 본 적이 없어 보이거든요. 생명체들이 가진 문제는 무엇이고, 내가 원하는 이상적인 생명체는 어떤 모습인지에 대한 진지한 고찰이 시청자들에게 전혀 전해지지 않습니다. 멋진 그림을 그리고 싶지만 막상 반 도화지에 무엇을 그려야 할지 몰라 이리저리 낙서만 하고 있는 어린 아이처럼요.



그래서 하이볼이 만들어 내는 개조된 생명체들은 단순한 상상력조차 벗어나지 못한, 그저 '괴생명체'로 보일 뿐입니다. 동물의 일부를 로봇으로 개조하거나, 인간 모습의 동물을 만들거나, 먹지 않아도 살 수 있는 로봇같은 인간을 만들어 내는 것이 전부에요. 스스로를 ‘창조자’라고 칭하는 존재가 수십년 동안 집착하여 만들어 낸 생명체들이 고작 이정도라니 참 답답합니다. 스스로가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르는 '실험광' 빌런에 의해 실험이라는 끝없는 고문을 당하는 생명체들을 보며 우리는 슬픔과 안타까움을 느낍니다. 그래서 그의 지향점은 그저 '잔인함'으로 보여요. 명확한 이유와 목표, 그리고 구체적인 실행 계획을 가졌던 전작의 빌런 타노스와는 전혀 다른 모습입니다.


<가오갤3>의 주인공인 ‘로켓’도 이 실험의 피해자입니다. 로켓은 고문과 같은 실험을 통해 높은 지능과 말하는 능력을 얻었지만 상처투성이에요. 지구의 동물들의 무엇을, 어떻게 바꾸겠다는 진지한 생각이 없던 하이볼은 평범한 너구리였던 로켓에게도 잔인한 실험을 가했고 그 과정에서 로켓은 소중한 친구들을 모두 잃고 간신히 도망칩니다. 


영화의 결말에 다다라서는 도망친 로켓이 다시 빌런 하이볼을 대면하게 돼요. 하이볼은 실험의 유일한 성공작인 로켓을 오랫동안 찾아다녔고, 로켓은 더 이상 과거의 트라우마로부터 도망치지 않기로 결심 했거든요. 이때 하이볼은 또 다시 완벽한 생명체에 대한 본인의만의 허접한 비전을 거창하게 설명합니다. 그 말에 로켓은 이렇게 답했고, 저는 이 대사가 영화의 주제라고 생각해요.


“넌 생명체의 완벽함을 원했던 것이 아니라 그냥 현재의 생명체들이 싫었을 뿐이다”


이 대사를 듣고 많은 생각이 들었어요. 구체적이지 않은 열망에서 비롯된 집착은 상대방에게 그저 고통이구나.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이런 사람들은 회사에서도 꽤 많이 만날 수 있습니다.




첫 직장에서 마케터로 일하며 마케팅 대행사와 협업할 기회가 많았습니다. 대행사 동료들에게 도움 받는 일이 많았지만 항상 마음 한편이 불편했어요. 아무래도 광고주는 대행사의 제안을 이런 저런 이유로 거절하는 경우가 많거든요. 같이 일하며 친분이 생긴 대행사 직원들에게 어떤 광고주가 최악이냐고 물어본 적이 있어요. 제가 혹시 그런 광고주가 아닐지 걱정이 되었거든요. 그 질문에 이런 대답을 들었습니다. 


“자기 머리 속에도 없는 것을 남의 머리에서 찾으려고 하는 광고주가 가장 힘들어요”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회사에 모여 일을 하다보면 단번에 모두의 마음에 드는 결과물을 만들기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서로의 생각을 잘 설명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결정과 거절을 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면 누군가의 제안 내용에서 어떤 부분이 왜 싫은지 잘 설명해야 합니다. 거절을 통해 결국 더 좋은 결과를 만들고자 하는 것이니까요.


누군가의 제안에 우려되는 부분이 있을 수도 있고, 구체적으로 바꾸고 싶은 더 좋은 아이디어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이 때 무엇이 문제이고, 어떻게 바뀌는 것을 기대하고, 그리고 최종 결과물에 만족할 수 있는 기준이 무엇인지 정확히 말해주지 않는다면 함께 일하는 모두가 힘들어 질 수 있습니다. 그런 의견을 정확히 말해주지 않는 광고주들은 대부분 ‘뜨거운 아이스아메리카노’나 ‘시원한 핫초코’를 즐겨 찾는다고 해요. 대행사 직원들에게 그 말을 듣고 저도 반성을 참 많이 했습니다.


완벽한 대안이 있을 때만 의견을 말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에요. 대안은 같이 일하는 동료들과 힘을 모아 얼마든지 찾아나갈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여럿이 일 하는 우리가 그러기 위해서는 서로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는 ‘문제 의식’과 이상적인 결과물이라 합의할 수 있는 ‘기준’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한마디로 서로가 원하는 것이 명확하고, 또 그것을 서로가 잘 이해해야 합니다. ‘자원 문제의 해결을 위해 우주의 인구를 절반으로 줄여 지속가능한 우주를 만들겠다’는 명확한 문제와 기준을 제시하는 타노스처럼요.


그래서 막연히 “흠... 무슨 말인지는 알겠는데 확신은 안드는데요”가 아니라 “도움이 되는 해결책이겠지만 고객이 가진 OO한 문제를 구체적으로 해결해 주는 방향을 원해요”라고 말해야 듣는 사람이 무엇을 고쳐야 할지 잘 생각할 수 있습니다. “흠... 새롭긴 한데 뭔가 약해보이는데요”가 아니라 "자사에서는 처음 시도해보는 해결책이지만 경쟁사들은 비슷한 방식을 취하고 있으니 우리의 고객이 다르게 느낄 수 있도록 표현 방식을 바꾸면 좋겠어요“라고 말하는게 더 건설적입니다. "흠... 생명체들이 마음에 안드는데 어떻게든 좀 바꿔볼까?”라고 생각한 하이볼처럼 되지 않기 위해서 입니다.


무언가가 마음에 들지 않는데 구체적인 문제나 기준이 잘 떠오르지 않는다면 스스로 다시 한번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내가 원하는 ‘뜨거운 아이스아메리카노’나 ‘시원한 핫초코’라는 완벽함이 애초에 존재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요. 그저 지금의 아메리카노와 핫초코가 싫어 둘러대는 말일 수도 있어요. 대행사 동료들의 말을 빌리자면 '나의 머리속에도 없다면 높은 확률로 남의 머리속에도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르는 흐릿한 상상속의 ‘완벽한 생명체’라는 것에 끝없이 집착했던 가오갤3의 빌런, 하이볼처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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