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으로 연결되는 세상

하이데거의 '손안에 있음' 그리고 '세계-내-존재'

by 이지수

며칠 전, 책에서 이런 문장을 읽었다. 대한 예술은 우리가 그 작품의 위대함을 모두 알기 때문에 위대한 게 아니라, 그 작품을 다시 찾게 하는 데 있다는 것. 정말 와닿았던 문장이었다. 생각해 보면 내가 좋아하고 아끼는 책, 영화, 그림들은 한 번 보는 걸로는 부족했다. 거듭해 볼 때마다 미처 보지 못했던 부분이 내게 다가왔다.



올해 본 전시 중 유독 시금 떠오르는 기획전이 하나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비엔나 1900, 꿈꾸는 예술가들>이다. 이번 전시는 구스타프 클림트와 에곤 실레가 동했던 비엔나 분리파의 이야기로 꾸려졌다. 에곤 실레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차마 지나칠 수 없는 작품전이었다. 실레의 그 유명한 <꽈리 열매가 있는 자화상>을 원화로 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입장료가 아깝지 않았다.

에곤 실레 / 클림트 작

전시회는 역시나 기대 이상이었다. 1900년대 초 비엔나 분리파의 전반적인 작품을 조망할 수 있어 인상적이었다. 특히 실레의 외로움을 그려낸 자화상들은 너무도 고독해 여운이 오래 남았다.

<손> 이반 메스튜로비치

그렇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은 실레의 것도, 클림트의 것도 아니었다. 이반 메스튜로비치의 청동 조각 작품 <손>이었다. 작품의 아래에는 다음과 같은 설명이 쓰여 있었다.


'예술가에게 손은 창작활동에 꼭 필요한 요소다. 손은 예술가의 정체성을 드러내며, 화가의 감정을 전하는 중요한 소재이다.'


이전까지 나는 손에 대해 깊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너무도 당연하게 여기고만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생각해 보면 꽤 많은 일은 손에서 시작된다.


일상부터 인류사까지 손으로 일구어져 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순간조차 손의 움직임으로 발된다. 나는 비록 브런치라는 작디작은 공간에 나만의 이야기를 써 내려가고 있을 따름이지만, 인류의 역사 또한 만들기, 쓰기 등 손의 활동으로 어져 내려왔다.

호모 파베르(Homo Faber)라는 말답게 우리는 도구를 사용하고 만듦으로써 진화해 왔고 여전히 손으로 세상을 만들어 나간다. 그리고 그 흔적은 누군가의 그림과 글로 축적되어 왔다. 예술가는 작품을 만들었고 학자는 세상을 써 내려갔다.


한편 누군가에게 손은 언어기도 하다. 시각장애인은 손으로 점자를 읽고 쓰며, 농인은 수어로 세상과 소통한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는 하이데거의 말처럼 언어는 존재(인간)를 드러내고 인간은 언어를 통해 세계를 이해한다는 점에서, 언어는 타자와 나를 매개(연결)하는 일종의 도구다. 이처럼 누군가는 손으로 '나의 존재함'을 드러다.


특히 마르틴 하이데거 ''에 주목한 철학자다. 그에게 손은 세계를 만들어내는 출발점이다. 활세계에 맞닿아 있는 손의 세계(손안에 있음) -그러니까 일상의 세계-사유로 구상된 눈앞의 세계(눈앞에 있음)보다 어쩌면 앞서 있다고 말한다. 이는 근대 주체중심의 철학을 뒤집은 사유이기도 하다.


주체철학으로 불리는 데카르트, 칸트 등의 사유체계는 주체와 객체를 분리함으로써 시작되었다. 내가 세계를 봄으로써 세계가 생겨난다고 믿었던 것이다. 대표적인 명제가 데카르트의 제일명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이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세계는 이미 존재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내가 세계를 인식해서가 아니라 세계는 이미 선존재하며 현존재인 인간과 관계를 맺을 뿐이라며 주장한다. 기존의 인식론적 접근이 아닌 존재론적인 접근을 시도한 것이다.


하이데거는 존재론적 세계관을 표현하기 위해 '세계-내-존재(世界 內 存在)'라는 개념을 든다. 그는 여기서 하이픈(-)으로 세계와 현존재를 연결함으로써 세계와 주체가 서로 불가분적인 관계에 있음을 드러내고자 했다. 세계(대상)와 현존재인 인간은 서로가 서로를 지탱하고 규정함으로써 형성되는 것이지 분리하여 논할 수 없다는 의미다. 쉽게 말해 세계-내-존재(In-der-Welt-Sein)라는 개념은 인간이 세계와 얽혀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드러내고자 한 시도다.


여기서 세계는 앞서 말한 손안에 있음(Zuhandenheit)으로 인해 러난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우리는 무언가를 관념적으로 떠올리기(표상)에 앞서 '손'을 통해 대상을 움켜쥐고 대상과 관계를 맺는다.


하이데거는 손안에 있음이란 개념 망치을 예로 들어 설명한다. 망치는 못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망치질은 인간에 의해 이루어진다. 그리고 그 결과물은 인간을 위해 만들어진다. 다시 말해 망치라는 도구를 사용하는 건 단지 망치질에 그치는 일이 아니라, 못-판자-망치-인간-가구의 모든 세계가 함께 영향을 주고받으며 발생하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이를 '존재론적 지시연관'이 발생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도구의 전체성, 즉 지시연관은 개개의 도구보다 앞서 있다. 여기서의 앞서 있음은 시간적인 의미가 아니라 도구의 사용은 궁극적으로 도구의 용도 그리고 궁극목적(Worumwillen)을 위해, 다시 말해 현존재인 인간을 위해 사용된다는 사실을 인식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러한 지시연관에 따른 인간을 위한 궁극목적이 세계의 본질(세계성)에 해당한다고 보았다.


앞서 사용한 하이데거의 현존재, 손안에 있음, 세계 내 존재와 같은 개념은 한번 들었을 때 잘 와닿지 않는 게 사실이다. 그의 철학이 까다로운 이유이기도 한데, 하이데거는 단어를 조어(새롭게 만들고 규정)함으로써 기존의 논의를 해체하고 의미를 재구성한다. 특히 <존재와 시간>에서는 인간의 본래성(실존의 의미)과 시간성을 중심으로, 그리고 후기 저작에서는 예술을 통한 삶의 의미를 중심으로 논한다.


나 역시도 하이데거의 철학을 이해했다고 말하긴 어렵다. 해설서를 보며 겨우 따라가고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하이데거의 이론이 인상 깊었던 이유는, 그가 인간을 정의하는 방식 때문이었다. 그는 인간인 현존재(Dasein)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현존재는 이해로서 자신의 존재를 가능성들에로 기획투사한다. 이러한 이해하면서 가능성들에로 향한 존재는, (중략) 그 자체가 하나의 존재가능인 것이다. 이해의 기획투사는 스스로를 형성할 수 있는 고유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존재와 시간> 제32절 이해와 해석 중에서

복잡하게 쓰여 있지만, 요약하자면 인간은 자신의 삶을 직접 저마다의 '손'으로 개척해 나가는 가능성을 지닌 존재들이라는 것이다. 광활한 우주 아래 인간 개개인은 먼지에 불과할지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모두 자신만의 고유한 꿈, 가능성을 지니고 있으며 이러한 가능성을 향해 다가서려고 할 때 비로소 일상인(das Man)을 넘어선 '현존재'가 될 수 있다 의미다.


하이데거가 지향하는 인간관은 아무래도 잠재된 가능성을 향해 달려가는 현존재일 테다. 그렇지만 나는 여전히 일상 속에 묶여 발버둥 치는 일상인에 가깝다. 가능성보단 현실의 벽 앞에 스스로를 가두고 있는 것만 같다. 그리고 그 현실의 세계마저도 여전히 영글어지지 않았다. 아직까지 나는 나만의 세계에 내던져 상태일 뿐이다.


내가 아는 세계는 너무도 작다. 알고 있다고 말하기도 어려울 만큼 협소하고 그마저도 나의 편견으로 가득 차 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작디작은 나의 세계는 또 누군가와의 세계와 조우하며 확장된다. 그게 난 하이데거가 말하는 인간다움, 그리고 현존재의 존재 의미라고 생각한다.


하이데거는 '세계-내-존재'라는 개념을 통해 타자와 함께 더불어 살아갈 수밖에 없음(Mitsein)을 말하고자 했다. 즉 우리는 본래적으로 혼자가 아니라, 타자와 함께-존재하는 방식으로 드러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건 누군가(사물이든 사람이든)에게 손을 건넴으로써 시작되는 것일 테다.


생각해 보면 꽤 많은 일은 손을 건넴으로써 시작된다. 첫 만남에서 악수로 인사를 건네는 것도, 연애의 속삭임을 알리는 것도, 아이가 엄마를 처음 만나게 되는 것도 모두 '손'에서 출발한다.


직접 무언가를 마주하고 손으로 대상의 질감과 온도를 느끼며 또 다른 세계인 타자와 함께 살아가는 것. 그것이 인간다움, 그리고 내가 생각하는 세계-내-존재들의 원대한 사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