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스 패딩의 부활

게오르그 짐멜 「유행의 심리학 (On Fashion, 1895)」

by 이지수

지난 겨울, 길거리의 젊은 사람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뉘었다. 얼죽코파와 패딩파. 혹한의 추위에도 멋을 위해 '얼어 죽어도 코트'를 택한 사람과 살기 위해 패딩을 택한 사람들. 여기서 패딩파는 다시 롱패딩파와 숏패딩파로 나뉘었는데, 아무래도 요즘 대세는 크롭이다 보니 20대에서는 전반적으로 숏패딩이 조금 더 우위를 점했던 것만 같다.

노스패딩 계급도. 구글에서 검색

그중에서도 재밌었던 건 '노스 패딩의 부활'이었다. 10여 년 전쯤이었을까. 중학생이었을 무렵, 모두가 노스페이스 패딩을 입고 교실에 앉아 있었던 기억이 떠오른다. 빨주노초파남보 형형색색의 패딩들. 지금에 와서야 우스갯소리로 이야기하지만 그때는 노스 패딩이 10대들의 휘장이었다. 같은 노스페이스 제품이라 해도 종류에 따라 나름의 계급도가 있을 정도였으니 말 그대로 노스 천하통일 시대였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전성기를 구가하던 노스 패딩의 유행은 얼마 지나지 않아 잠잠해졌다.

그리고 2023년 겨울쯤부터 다시 노스 패딩이 부활하기 시작했다. 이번엔 눕시 패딩이 대표 주자였다. 히말라야 산맥의 산봉우리 '눕시(Nuptse)'에서 따온 이름이라고 한다. 10년 전과 달리 요즘 유행에 걸맞은 크롭한 기장감이 20대의 관심을 사로잡은 것으로 보인다. 내가 봐도 눕시의 디자인은 흠잡을 데가 없는 듯하다. 깔끔하고 예쁘다. 그렇지만 나는 10년 전에도 이번에도 노스페이스 사의 패딩을 구매하지 않았다.

홍대병 말기 환자인 나는 너무 유행하는 제품에는 손이 잘 가지 않는다. 패션 역시도 자신을 드러내는 하나의 수단이라고 생각하는 편이라서 그렇다. 내가 입고 싶은 게 곧 정답이지 않겠는가 하며 이런저런 옷들을 시도해 보는 편이다. 어쩌면 누구보다 남의 시선을 많이 신경 쓰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겠다. 남들과는 다른 나에 취해 있다는 점에서 말이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유행을 따라가는 것과 일부러 유행을 따라가지 않는 것 모두 남의 시선을 고려하는 행위가 아닐까 싶긴 하다. 트렌드를 따라가려는 '나'와 저항하는 나 모두 궁극적으로는 타인의 시선을 반영한 사회적 '나'라는 점에서다. 만약 전 세계에 나 혼자만 살고 있다면 과연 나는 옷을 멋들어지게 입고 다닐는지 모르겠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상태로 돌아다닐 수도 있겠다.


그래서일까. 패션은 나를 드러내는 행동 양식이서도 나만을 위한 행위라고 보긴 어려운 듯싶다. 우리는 옷을 입을 때 상대방을 만나는 시간, 장소, 상황(TPO)을 모두 고려하기 마련이다. 결혼식장에서 튀는 색의 옷을 입 않는 것도, 장례식장에서 검은색 옷을 주로 입는 것도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쓰기 때문일 테다.

게오르그 짐멜 역시 패션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남기기도 했다. 짐멜은 <유행의 심리학(On fashion)(1895)>에서 패션은 개성과 모방이 공존하는 이중적 행위라고 표현한다. 자신만의 스타일로 다름을 표현하려는 개성적 행위이면서도, 유행에 따라감으로써 특정 집단에 속하고자 하는 모방의 행위라는 것이다. 이에 패션은 개인성과 집단성의 긴장 속에서 발현되는 사회적 상호작용 행위라고 보았다.


"유행(fashion)이란 사회적 균등화 현상과 개인적 차별화 경향 사이에 타협을 이루려고 시도하는 삶의 형식들 중에서 특별한 것이다."

그러나 패션은 정체돼 있지 않다. 끝없는 새로움이 패션의 동력이며 유행은 빠르게 교체된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우리는 패션에서조차 계층성을 확인할 수 있다. 짐멜은 한 패션의 유행은 중하위 계층이 상류층의 유행을 따라오기 전까지만 유효한 것이라며 말한다. 상류층이 주도하여 패션의 유행을 이끄는데, 중하류층이 이를 모방하게 될 때 유행은 몰락하며 상류층은 다시 새로운 유행을 선도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패션은 모방 가치가 있다고 여겨질 때 비로소 유행하며, 그 유행은 계층 간 경계가 흐릿해질 때 사그라고 교체된다.

"절정의 순간이 몰락의 순간이다."

그래서 패션은 일시적이고 유동적이다. 션 업계는 행을 선도하는 트렌드세터를 위해 끊임없이 새로운 제품을 생산하고 선보인다. 의류를 비롯하여 액세서리, 심지어 화장품까지도 새로운 상품을 계속 찍어낸다. 이 제품을 사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은근한 압박을 하며 말이다. 인간의 소비 욕구를 너무도 잘 파악하고 있는 듯하다. 나 역시도 '한정판'이 쓰인 상품에는 알면서도 늘 속는다.

유행의 일시성과 '구별 짓기'는 패션의 영역에서만 일어나는 일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많은 것을 소비하고 소유함에 있어서 남들과 같으면서도 다름을 추구하고자 한다. 그리고 그 경향성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특히 '상류층의 소비문화'에 대한 동경으로 드러나는 듯하다. 중하위층은 상류층의 소비를 모방하며 열심히 뒤쫓아갈 뿐이다.

물론 모든 영역을 계층 간 대립구도 또는 모방과 개성화로 설명할 수는 없다. 분명 개인의 기호와 취향 역시도 고려사항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누가 뭐라든 간에 단지 내 마음에 들어서 입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프랑스 사회학자 장 보드리야르가 말했듯이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사물이 가진 실제 의미나 유용성보다는 상품의 상징과 이미지인 기호 가치가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개인의 기호와 취향 역시도 온전히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선택이 아닌 사회적 맥락 속에서 형성된다는 점에서 모방과 개성화의 단면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입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내가 입고 있는 건 어쩌면 동경과 모방을 벗어나려는 헛된 몸부림일지도 모른다. '나'의 패션이 나만의 것이 아님은 이제 자명해진 듯하다. 나의 취향이 오롯이 내 것이 아님을 느끼는 요즘, 무엇이 나의 정체성을 형성한다고 말할 수 있을지를 생각해 봐야 할 듯싶다.


[추신]

엄마와 종종 음악방송을 함께 보는 편이다. 요즘 유행하는 노래도 듣고 패션도 살펴볼 겸 겸사겸사 말이다. 방송을 볼 때면 엄마께서는 '저 옷 내가 예전에 입은 건데!' 라며 괜스레 반가워하신다.

통이 큰 펄럭이는 바지, 청자켓, 짧은 기장의 상의 등 엄마가 20대 때 입었던 옷들과 현재 20대인 나의 옷장이 비슷한 것만 같다는 생각이다.


글에는 패션이 모방이니 개성이니 했지만 아무렴 어떤가. 패션에 정답은 없다. 션은 돌고 또 돈다.


(여담이지만 요즘은 경량패딩이 대세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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