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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ZESSTYPE Aug 20. 2015

제스타입 작업일지 #0

일지 기록을 시작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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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과연 어디까지 도달할 수 있을까. 

결국 끝까지 가보지 않으면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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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 디자이너로 3년의 직장 생활을 끝내고 방구석에 틀어박혀 개인 작업을 해온지 5개월이 지났다. 지난 몇 년간 꾸준히 개인 작업을 해왔지만 사실 대단한 의미도. 어떠한 가치도 없다. 그럼에도 나는 이런 작업들을 손에서 놓을 수가 없었다. 다시 월급쟁이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았다. 피 말리는 야근과 야근 수당조차 지급되지 않는 박봉에 지칠 대로 지쳐버렸다. 물론 모든 게 나쁘지는 않았고 모든 회사가 그런 것도 아니지만 나는 자립하고 싶었고 당장에 뭐라도 해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불안해서 견딜 수도 없었을 테니깐. 


내가 할 줄 아는 것은 결국 디자인이다. 이 작은 나라에 대체 디자이너가 왜 이렇게도 많은지. 그리고 단가는 왜 이렇게 낮은지 한편으로는 알면서도 모른 채하며 개인 작업이라는 명분으로 나는 방구석에 숨었다. 늘 내 곁을 지켜주는 훌륭하고 멋진 파트너가 있기에 가능했지만 얼마 되지도 않는 월세는 매월 나를 괴롭혔고 언제까지 도움만 받고 있을 수는 없었다. 이 사회의 시스템은 모든 게 악순환인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이 시스템을 살짝 벗벗어나기로 했다. 직장도. 일도 아닌. 그저 나 자신. 그래픽 디자이너 ZESSTYPE을 알리고 싶었다. 


내가 어떤 작업을 하든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아서야 아무런 소용이 없다. 내가 해온 개인작업은 지극히 취향 위주의 가벼운 결과물들이었고 무언가 다른 것이 필요했다. 보다 사람들의 이목을 끌 수 있고 사람들이 관심을 가질만 한 결과물. 그제야 나는 이제 껏 미뤄두었던 서체 제작을 시작하게 되었다. 활자 디자인은 내 인생의 마지막 정거장이라 오래전부터 생각해왔다.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지만 금전적으로 돌아오지 않는 작업. 은퇴 후 여유를 즐기며 느긋하게 활자 디자인을 하고 싶었지만 지금 당장 내게 여유가 없었다. 몇 달 째 금전적으로 허덕이며 마음을 굳히게 되었다. 한글 서체를 제작하여 무료  배포하는 것. 이게 내 스스로 일어나는 첫 번째 발걸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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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체 제작은 처음 해봐서 어떤 프로그램을 쓰는지. 프로그램은 어떻게 쓰는지. 어떻게 서체로 만들어야 하는지. 아무런 지식이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서체 제작을 전문으로 하는 기업에서 폰트 디자이너 채용공고가 올라왔고 나는 폰트 디자이너로서 제대로 배우는 것이 어떨까 고민하다가 결국 입사지원을 했다. 서른이 넘어버린 나이 때문인지 그저 내 작업들이 엉망이라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나는 서류에서 떨어졌다. 아무런 답변이 없었다. 나는 이 상황에 낙담이 아닌 안도했다. 그리고 이 일은 내가 서체 제작을 하게 된 시발점이 되었다. 


서체 제작이 대단한 것이 아니라고. 그냥 나 혼자 해도 이렇게 할 수 있다고 보여주고 싶은 독기가 생겼다. 서체 제작에 관한 정보는 손글씨를 서체로 만드는 많은 블로거들 덕분에 대충 알 수 있었다. 어렵지 않게 체험판 프로그램도 구할 수 있었지만 나는 프로그램을 사용법을 몰랐다. 그래서 손글씨를 서체로 만드는 방법 즉 한 글자 한 글자를 이미지로 프로그램이 붙여 넣는 방법으로 서체 제작을 시작하게 되었다. 6일 동안 2,350자의 한글을 한 글자 한 글자 그렸고 영문과 숫자 그리고 문장부호와 기호를 디자인했다. 그리고 하루종일 검토와 수정을 진행하고 배포 준비를 끝내 작업을 시작한 지 단 일주일 만에 한글 서체를 무료 배포할 수 있었다. 


이 일은 나 자신도 놀라운 일이었다. 서체 제작이 정말 별거 아니구나. 이렇게 일주일 만에 제작할 수도 있구나. 몸소 느낄 수 있었다. 작업 시간은 하루 18-20시간 정도였다. 하루 3-4시간 정도 자고 눈만 뜨면 작업했다. 정확한 수치는 아니지만 배포를 시작한 첫날 약 30,000명이 폰트를 받았고 많은 사람들이 상업적 이용에 관한 문의 등 호응해주고 응원해주고 고마워했다.


-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서체 제작은 누구든. 엉덩이만 무거우면 할 수 있는 조금 괴로운 작업일 뿐이다. 다만 의미있고 가치가 있는 좋은 서체를 제작하는 것은 전혀 다른 얘기다. 당시 나는 그저 해냈다! 라는 기쁨에 까불었던 것 같다. 일주일 만에 제작한 서체가 얼마나 엉망이었는 지는 지금 작업 파일을 열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당시 나는 뭘 몰라서 뵈는게 없었다. 이 글의 조회수 만큼 부끄럽다. (2017. 09.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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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하게도 미흡한 부분들이 많이 발견되었다. 급한 대로 수정본을 다시 배포했다. 큰 문제없이 쓸 수 있는 야매로 만든 한글 서체. 무료 배포. 이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나는 가능성을 엿볼 수 있었다. 단순히 취향으로 진행하는 개인작업과는 비교도 안 되는 수요였다. 그리고 나는 공급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기성 폰트 회사들이 그러하듯 당장 판매를 통해 금전적으로 내 작업 여건이 유지되는 것은 무리다. 그렇게 해서는 살아남을 수가 없었다. 다크 나이트의 조커가 말했듯이 잘하는 것은 공짜로 해주면 안된다. 하지만 사람들은 무료에 환호한다. 수요는 무료 배포에 있었다. 고민이 깊어졌다. 


다가오는 월세와 모자란 통장 잔고는 그렇게 해서 너는 뭘  먹고살 것이냐 물어왔다. 나는 보다 많은 사람들이 저렴하게 내 폰트를 사용할 수 있기를 바라면서도 어디선가 금전적인 보상을 분명히 필요로 하고 있었다. 상업적 라이선스만을 가지고는 충족될 수 없었다. 나는 당장에 라이선스를 관리할 아무런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그래서 그 모든 것을 준비하고 제작할 수 있도록 클라우드 펀딩을 기획하며 조사해보았다. 개인적으로 한글 디자이너 중 가장 존경하는 이용제 디자이너는 텀블벅에서 24,000,000원에 가까운 금액을 후원받고 일 년에 달하는 작업을 통해 바람체를 완성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는지 도저히 모르겠다. 한글 타이포그래피 학교를 운영하고 교수직을 겸하는 그였기에 가능했을까. 그에 비하면 나는 사람들에게 알려지지도 않았고 가진 것도 없었다. 어떻게 하면 펀딩을 성사시킬 수 있을지 다양한 펀딩들을 들여다보며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바람체의 완성을 보고 눈만 높아진 나는 당당하게 천만 원이라고 외쳤다가 파트너에게 호되게 까였다. 


펀딩을 성사시킬 적정 선은 2,000,000 - 3,000,000원 정도로 보였다. 그 기간 동안 어떤 작업을 진행할지 그리고 후원자들을 위한 리워드는 무엇으로 준비할지도 결정해야 했다. 1ST블랙 서체의 배포와 피드백을 진행하는 그룹에서 이후 진행할 작업으로 지블랙 서체의 자족. 패밀리폰트를 원했다. 나는 의견을 수용하고 다음 진행할 작업을 계획했다. 기존의 1ST블랙 서체를 보완한 지블랙 - 오리지날. 그리고 패밀리 폰트인 스트라잎, 네온사인, 멜트다운. 이 넷을 하나로 묶은 타입페이스를 제작할 것이다. 작업 기간은 4개월. 올해 안에 완성하는 것을 목표로 진행할 생각을 하니 후원금액이 눈에 밟힌다. 삼백만 원. 월급쟁이 시절의 네 달치 월급과는 많이 차이나지만 월세 걱정을 덜 수 있겠구나 싶다. 아무튼 클라우드 펀딩을 착실히 기획하고 있다. 본격적인 작업을 앞두고 작업일지를 기록하여 이후에 소책자로 편집하고자 이렇게 작업일지 기록을 시작했다. 앞 날이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이렇게 홀로 서기를 막 시작하고 있다. 부디 성공적이기를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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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폰트 

#디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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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터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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