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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정말 막힘 없이 흐르는구나.
민족대명절. 추석을 맞아 제주도로 내려가 한 주 동안 푹 쉴 수 있었다. 8월부터 준비하던 더파이스 엔터테인먼트도 무사히 오픈하여 지금은 사무실도 정리되었고 차근차근 일을 시작하고 있었다. 9월이 되면서 회사 일도 이것저것 신경 써야 할 게 많아지고. 무엇보다 비옴타입 폰트 제작을 시작하게 되면서. 뭔가 일에 이리저리 치이며 붕 떠버린 느낌. 제주도에 내려가서야 겨우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진행하던 외주 일들은 모두 마무리 지었다. 그런데 이 붕 뜬 느낌이 도무지 가라앉지 않는다. 뭐가 문제일까.
고민이 깊어진다. 생각이 많아진다. 정리는 안되고. 다 뒤죽박죽 골치가 아파서. 머리 속에서 외면하다 보니. 마치 제때에 내다 버리지 못해 쌓인 쓰레기 더미가 원룸 한편을 가득 채우고 그 부피와 악취로 존재감을 과시하는 듯한 느런 느낌이다. 외면하고 싶은데. 피할 수 없는 존재감. 시간이 지날수록 짙어지는 악취. 싱크대에 쌓여 방치된 설거지 거리들. 크. 그런 느낌이다. 분리수거하듯 생각들을 정리해서 딱 딱 처리하고 싶지만. 분리수거도 종량제 봉투. 음식물쓰레기봉투가 있어야 하고 재활용 쓰레기도 다 따로 처리해야 되는데. 이 복잡한 근심 걱정 고민 등 골치 아픈 생각들은 정리가 쉽지가 않다. 결국 내 선에서 해결될 문제들도 아닌 것을. 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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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새로 시작하게 된 더파이스 엔터테인먼트. 정확히는 시작하며 합류하게 된. 연예기획사 일.
사실 당장은 맞지 않는 옷이다. 로고 디자인을 맡게 되어 일을 진행했지만. 결국 내가 디자인한 로고가 쓰이지는 않았다. 내가 내었던 시안을 토대로 대표님 친구 분이 수정한 안이 최종적으로 선택되었다. 내 취향과는 거리가 멀지만. 업계에 종사하는 분들이 마음에 들어하니 그게 맞는 것인가. 싶다. 역시 로고 디자인은 쉽지 않다. 하하.. 애초에 클라이언트를 설득하고자 하는 노력보다는 그저 입맛에 맡게 디자인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것이 아쉽거나 안타깝지는 않다. 아무튼. 그렇게 나는 이 일에 발을 들이게 되었다. 새로운 일. 새로운 영역. 새로운 사람들. 내게도 나쁠 것은 없었다. 사회 초년생. 시각디자인을 전공하고서 그래픽 디자이너랍시고 제품 디자인 스튜디오에 들어가 첫 단추를 잘못 꿰어 이력이 애매해진 내가 방황을 멈출 수 있었던 것이 바로 영역 확장이었으니깐. 일 년 전 폰트 디자인이 그러하고. 지금은 이 엔터테인먼트 일이 그렇다.
그러다 문득 어떤 글을 읽었다.
우리는 그 일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위해 그 일을 하는 것이라고. 당연한 얘기지만 일을 하다 보면 잊어버리게 되는 이 얘기는. 현실적인 문제들로 인해 부정당할 수는 있겠지만. 옳은 소리다. 어떠한 일이 내 삶을 피폐하게 한다면 나는 가차 없이 그 일을 관둘 것이다. 물론 일은 삶에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다. 돈. 그리고 돈. 그리고 더 많은 돈. 목적의식? 꿈? 입사 초에 당차게 거론한 그런 것들은 일 년이 지나고 이년이 지나면 잔뜩 구겨지고 바래진 채 어딘가 알 수도 없는 곳을 나뒹굴고 있을 것이다. 우리가 일하는 이유는 돈을 벌기 위해서다. 일이 아닌 돈이 우리가 진정 원하는 것을 할 수 있게 해주며. 우리의 삶을 보다 풍요롭게 해줄 수 있으니 말이다. 물론 돈이 전부는 아니며 돈이 많다고 행복한 것도 아니다. 일이 삶을 집어삼키면. 누구나 불행해진다. 자신. 그리고 가족. 그리고 주변 사람들 마저도. 아무튼 당장은 판단이 서질 않는다. 어찌 되었든. 만족스러운 부분도. 불만족스러운 부분도. 그 사이에서 다른 대안도. 무엇을 포기하고 무엇을 취해야 할지. 판단이 서질 않는다. 시간이 지나면 조금씩 뚜렷해지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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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쁘다. 이래저래 물리적인 일보다는 정신적인 피로가 계속 쌓여간다.
최근 일 년을 돌아보면 지금이 가장 한적하긴 하다. 준비 중인 전시도 없고. 외주작업도 다 마무리 지었고. 직장 일과 폰트 디자인. 단 두 가지만 진행하고 있으니 일정이 빽빽하거나 해야 할 일들이 쌓여있는 것은 아니지만. 가만히 있자니 뭔가 조급해지면서. 이와 반대로 손은 자꾸 힘이 빠지고 놀고 싶은. 그런 상황이다. 외주작업들도 다 잘 마무리되었고. 폰트 제작 펀딩도 성공적으로 마감되었으며. 이번에 시작한 일도 나쁘지는 않지만. 아무튼 심란하달까. 머리 속이 복잡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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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 얘기로 돌아가자.
폰트 디자인을 시작한 지 1년이 지났다. 요새 이런저런 피드백을 받으며 기존에 배포한 폰트들을 다시 뜯어보고 있다. 몇 가지 문제가 발생했는데 도저히 풀리지가 않는다. 수십 차례 테스트해보고 문제 되는 부분을 해결하려고 머리를 굴려보지만 쉽지가 않다. 이 부분은 프로그래머의 영역인 것일까. 프로그램 상에서 디자이너가 잡을 수 있는 문제인 것일까. 그것조차 알 수가 없으니 아직 갈 길이 멀고도 험하다. 폰트는 그저 글자만 이쁘게 그려내는 것이 아니라. 사용자가 제작자의 의도대로 사용할 수 있어야 하는데. 내 마음처럼 되지 않으니 원. 예를 들어 지블랙 오리지날 타입은 PDF 파일에 첨부가 되는데 네온사인 타입은 첨부가 되지 않는다. 다른 사람은 정 반대의 피드백을 보내왔다. OS나 프로그램 버전 등의 정보를 받고 여러 가지 테스트를 해보아도 희한하게 내 맥북에서는 문제가 없으니 해결이 쉽지 않다. 여러 차례 다양한 결과물을 메일로 보내드렸는데 결국 내 선에서 해결이 안 되어서 다른 방식으로 테스트해보고 있는데. 아무튼 얼른 해결하고 싶다.
비옴타입 2,525자를 11,172자로 다시 짜면서 디테일하게 다듬어보고 있다.
기존 작업 방식대로 일러스트레이터로 작업하여 폰트 제작 툴에 집어넣을 것인가. 아니면 처음부터 폰트 제작 프로그램을 이용해서 작업할 것인가. 전자가 익숙하긴 하지만. 11,172자나 되는 만큼. 작업 속도로 따지면 후자가 더 빠를 것이다. 이참에 손에 익혀두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시도해보고 있지만 역시 일러스트처럼 작업이 편안하지 않다. 언제쯤 손에 익을는지. 부지런히 작업하여 연말에는 비가온다 미디엄 타입을 완성해야 할 텐데. 한글도 한글이지만. 영문과 숫자. 문장부호와 특수문자도 이래저래 다듬어봐야 한다. 프로토타입으로 무료 배포한 PT02는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만 작업한 말 그대로 시험제작이라. 다듬고 또 다듬어야 한다. 좋은 폰트를 만들어야지 꼭. 사용하는 사람들이 좋은 폰트라고 평가할 수 있는 매력 있는 폰트를. 조만간 작업 과정을 정리해서 공개할 계획이다. 지금 당장은 보여드릴 만한 것들이 없어서 차근차근 진행하고 있다. 10월부터는 정말 본격적으로 작업을 진행해야 할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