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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ZESSTYPE Jul 25. 2016

제스타입 작업일지 #16

사고의 정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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펀딩 프로젝트 진행이 이제 한 달이 채 남지 않았다. 60%를 달성했고 무료 배포한 비가온다 PT02는 누적 다운로드가 1900명을 넘어서 첫 번째 프로토타입의 반년 간의 배포율을 2주 만에 따라잡고 있다. 확실히 폰트를 제작하고 무료로 배포하는 것이 나라는 독립 디자이너를 알리기에는 가장 효율적이다. 더 많은 무료 폰트를 제작해야 하는 걸까. 일정한 수입이 있다면 가능하겠지만. 당장은 어렵다. 영문 폰트라면 모를까. 영문 폰트라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매달 영문 폰트를 하나씩 제작하여 무료 배포해볼까. 월간 폰트. 고민 고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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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비해 일이 늘었다. 개인작업은 줄었고 예전에 비해 나태해졌다. 분명 의식하고 있지만 쉽게 손이 가질 않는다. 펀딩 프로젝트도 지속적으로 알려야 하고. 현재는 외주로 출퇴근하며 업무를 진행하고 있고. 따로 브랜딩도 맡고 있고. 외주 레터링 작업도 진행하고 있다. 주최한 소모임도 관리해야 한다. 형편은 좀 나아졌지만 여유는 없어졌다. 예전만큼 디자인을 눈 여겨보지 않고. 예전만큼 생각하지도. 고민하지도 않고 있다. 예전이라 해도 불과 두세 달 전이다. 이래저래 일들이 들어오면서 바쁘다는 핑계로 생각을 쉬고 있다. 정신 차려야지 하면서도 쉽게 움직이지 않는다. 해야 할 것은 많은데 당장 눈 앞의 일들만 바라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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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싶은 작업은 많다. 그림도 그리고 싶고. 글도 쓰고 싶고. 레터링도 하고 싶고. 폰트도 만들고 싶고. 그래픽 아트웍도 만들고 싶고. 3D 모델링도 하고 싶고. 캐릭터 디자인도 하고 싶고. 아트토이도 만들고 싶고. 모션그래픽도 하고 싶고. 영상 제작도 하고 싶고. 사진 촬영도 하고 싶다. 나는 과연 노력이 부족한 것일까. 시간이 부족한 것일까. 돈이 부족한 것일까. 어느 하나 만족스럽지 못하다. 결국 어느 하나 제대로 진행할 수가 없다. 당장은 폰트 제작에 집중하고 있지만. 폰트 제작은 정말이지 너무 많은 시간과 노력을 필요로 한다. 내게 의미 있는 작업이지만 재미있는 작업이라면 글쎄. 다양한 작업들을 하고 싶다. 모든 것이 부족하지만. 하나하나 쌓아가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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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유가 없어지면서 딴생각할 시간이 줄어들었고. 딴생각이 줄어드니 아이디어가 나오질 않는다. 아이디어가 없으니 개인 작업이 진행되지 않는다. 결과물이 없으니 SNS 활동이 줄어들고. 정체되어있다. 고인 물을 썩는다는데 흘려보낼 물줄기가 끊겼다. 바쁜 일들로 꽉 막힌 이 댐을 폭파시켜 쭈욱 방류해버리면 좀 시원해지려나. 시원하고 싶다. 썩은 물에 꼬인 벌레와 악취를 쓸어버리고 싶다. 그동안 일을 하면서 내 작업을 못하다 보니 작업일지도 계속해서 미루고 있었다. 언제까지 미룰 수도 없고. 언제까지 손을 놓고 멍 때리고 있을 수도 없으니. 소소한 전환점을 삼고자 이렇게 글을 써 내려가고 있다. 해야지. 해야지. 뭐라도 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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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음악. 좋은 영화. 사실 좋다는 게 무어라 설명하기는 애매하지만. 내가 보기에. 내가 듣기에. 음색이 아름답고. 화면 구성이 짜임새 있거나 색감이 아름다우면. 가사가 무엇이 중하겠는가. 내용이 좀 뻔하면 어떠한가. 사소하게 지나가는 대사 하나에도 울림이 있고. 무심한 듯 짧게 지속되는 텅 빈 거리의 삭막한 화면에 공감하기도 한다. 맛있는 음식에서 행복을 찾고.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있으면 뭘 해도 즐겁다. 


언젠가 이 나라를 벗어날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것은 한국이 아니고 한글이다. 이 나라를 벗어나서 한글을 디자인하고 폰트를 제작할 것이다. 그게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랬으면 좋겠다. 지금 이 나라는. 내가 태어났던 당시 그 나라와도 다르고. 한글이 만들어진 그 나라와도 다르며. 수많은 애국자들이 사랑하던 그 나라와도 다르다. 나는 한글을 사랑하지만 한국을 사랑하지 않는다. 침몰하는 이 배 위에 내가 건져내고 싶은 것이 단 하나. 한글뿐이다. 교육은 맹목적이고. 정치는 추악하며. 법은 정의를 수호하지 않고. 언론은 대중을 우롱하고. 경제는 저울이 부러졌으며. 사회는 온기를 잃었고. 가정은 갈갈이 찢어지고 있다. 문화는 빛을 잃었고 예술을 길을 잃었다. 나라의 주권을 쥔 국민들은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게 된 채 나라를 빼앗기고 있다. 비약적이긴 하지만. 어리고 젊은 사람들이 죽어나가고 있다. 죽어나가기 전에 나갈 수 있을까. 


언제가 될지 모르는 그 날까지 나는 소소한 행복을 찾아 살아갈 수밖에 없다. 나 역시 눈을 감고. 귀를 막고. 입을 다물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 이 나라의 삶은 대부분 불행 속에 있기 때문에. 크고 작은 사건 사고들 속에 너무 많은 사람들이 힘들어하고 있는데. 방법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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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딴생각을 하다 보니 너무 나간 것 같지만. 뭐 보통은 이런 잡념 속에서 소소한 아이디어들을 얻고 구체화한다. 어떤 문장을 어떻게 표현할지. 앞선 생각들을 캠페인 포스터처럼 풀어보면 어떨까. 


"(가진자의 범죄에) 눈을 감고. 좋은 음악을 들어라."

"(우롱하는 거짓에) 입을 다물고. 좋은 영화를 보아라."

"(호소하는 진실에) 귀를 막고. 좋은 음식을 먹어라."


보다 덜 자극적이면서 의미가 통했으면 좋겠는데. 글자 수도 맞췄으면 좋겠고. 고민을 해봐야겠다. 작업일지를 쓰다 보니 아이디어를 얻었다. 휴.. 작업해야지.. 해야지.. 다시 한번 화이팅하고. 


일단은 주어진 업무부터 처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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