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철 이랬는데 비가 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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펀딩 프로젝트를 오픈한 지 일주일이 지났고. 현재 25% 달성했다. 펀딩 기간이 60일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시작은 성공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 프로젝트 시작에 맞춰 예전에 무료 배포했던 비가온다 프로토타입을 보완하고 있다. 한글 2,350자로 구성된 이 프로토타입에는 영문이나 숫자 그리고 문장부호 등이 포함되지 않았다. 당시 조합식 제작을 테스트하려고 만들어본 타입이라 많은 시간을 할애할 수 없었고. 이제 와서 영문과 숫자. 사용빈도가 높은 문장부호와 특수문자를 일부 포함하여 재배포할 계획이다. 아무래도 폰트 디자인 프로젝트는 무료 배포만큼 좋은 홍보수단이 없기에. 많은 사용자들이 피드백을 주고 있지는 않지만. 피드백 하나하나가 참 소중하다. 내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오류나. 오탈자 그리고 개선에 대한 의견 등 혼자서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내 입장에서는 정말 든든한 지원군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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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은 영문 대문자와 숫자를 한글 자음에 맞춰 디자인하고 있다. 처음에는 조합되는 국문 한 글자의 공간에 맞춰 디자인할까 했지만. 영문과 숫자의 내부 공간이 너무 넓어져서 국문과 조화롭지 않았다. 국문의 내부 공간. 밀도를 비슷하게 잡기 위해 낱글자인 알파벳과 숫자를 자음에 맞추게 되었다. 앞으로 2-3주간 지켜보면서 수정을 거듭하게 되겠지만. 국문과의 조화와 그 자체의 안정감. 그리고 전체적인 형태적 유사성 등을 고려하여 보완할 생각이다. 가장 우려했던 것은 형태가 복잡한 특수문자나 기호였는데 비슷한 밀도로 조형하면 크게 튀지는 않는 것 같다. 이제 알파벳 소문자와 문장부호 등을 디자인해야 한다. 본래 형태가 단조로워 어렵지는 않겠지만 최선의 결과물을 내놓기 위해서는 매일매일 이 작은 글자들을 들여다보는 수밖에 없다. 확대해보고 축소해보고 넓혀보고 좁혀보면서 이래저래 수정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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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부터 모임 하나를 구상하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혼자서 작업을 계속하다 보니 외부 자극도 조금 필요하고 누군가와 함께 한글. 글자 표현 나아가 폰트 디자인을 탐구하고 서로의 작업에 대해 심도 있는 의견을 나눌 수 있으면 참 좋겠다. 싶어서 조금씩 구체화하고 있었다. 물론 사람이 모여야 가능하겠지만. 그래서 SNS를 통해 글자 표현 탐구를 목적으로 하는 모임을 구상하고 있는데 참여하고 싶은 사람이 있는지를 물었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참여의사를 건네 왔고 일단 이 모임의 씨앗을 심어야 할 때라고 판단하여 모임을 주최했다.
이름하여 T.TABLE. 처음에는 T.ABLE로 할까 했지만 그냥 테이블보다는 차 한잔이 떠오르는 티테이블이 더 좋았다. 테이블은 사람이 모이는 공간이다. 그저 모이는 공간이라기보다는 그 위에서 무언가를 나누는 오브제라고 할 수 있다. T는 TYPE을. ABLE은 가능성을. 의미하며 티테이블은 차 한잔 하면서 타입에 대한 탐구와 토론을 진행할 수 있는 모임. 이러한 의미를 이름에 담아보았다. 온라인 기반 활동이 메인이겠지만. 오프모임의 명칭으로는 티타임 정도가 적당할까. 적당히 만족스러운 네이밍이다.
학생 시절 학회장을 했던 이력을 제외하면 어떤 모임의 주최로서 행동한 적이 없다. 학회장으로서는 어떠려나. 좋은 평가를 기대할 수는 없을 듯하다. 달리 소모임 활동은 하지 않았기에 이 모임은 소모임의 전형을 따르지 않는다. 처음부터 구상하고 기획한 대로. 모임을 이끌어갈 것이다. 모임의 구성원들의 의견을 존중하여 다소 변화는 있겠지만. 큰 그림을 벗어나지 않도록 관리. 조정할 생각이다. 이제 막 모임이 만들어졌고 사실 앞으로 어떨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해서 이 모임을 꾸려나갈 생각이다. 생각처럼 진행되면 참 좋겠지만 잘 안되더라도 하는 수 없다. 이미 씨앗은 심었고. 첫 프로젝트를 진행하여 나온 결과물로 싹을 틔울 것이다. 이 싹을 10년간 정성 스래 가꾸면. 현재 폰트 디자인 생태계에 변화를 가져올 수도 있는 멋진 나무로 성장할 수 있지 않을까. 메이저 폰트 디자인 회사를 벗어나 스스로 폰트를 제작하고 본인이 저작권을 갖는. 보다 많은 독립 디자이너들이 한글 폰트에 다양화를 가져올 수 있도록. 나아가 한글 폰트의 의미와 가치를 드러내고. 유통구조를 개선하며 불법복제를 억누르고 무분별한 저작권 단속과 같은 현 상황에 변화를 가져올 수 있도록. 내가 다른 폰트 디자이너 분들에게 도움을 받았던 것처럼. 나 또한 누군가에게 도움을 줄 수 있도록.
그 모든 바람이. 나 하나로는 힘이 부치기에. 모임을 구상하게 되었다. 지금 당장은 아무런 힘이 없지만. 한글. 글자 표현. 창작집단으로서 활동을 이어가며 탐구 집단을 지향하고. 수많은 프로젝트를 통해 집단지성에 이르게 된다면. 가능성이 있고 없고를 떠나 시도해보는 것이다. 내가 처음 폰트 디자인을 시작했던 것처럼. 지금 계속 폰트 디자인을 하고 있는 것처럼. 그 끝에 어떤 의미나 가치를 가지게 될지. 혹은 어떤 형태를 이루게 될지는 지금 알 수 없는 것이고. 그게 궁금하지도. 걱정스럽지도 않다. 다만 시도해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