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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ZESSTYPE Nov 05. 2017

제스타입 작업일지 #30

비옴체와 검은고딕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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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었던 추석 연휴가 지나고 또 한참을. 작업에서 손을 떼어두고 쉬고 있었다. 

번아웃이라면 번아웃이고. 농땡이라면 농땡이인데. 비옴 타입이 완성되길 기다리는 후원자 분들이 있는 만큼 쉰다고 쉬는 것도 아니고. 작업을 한다고 손을 움직여도 영 내키는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한 동안 조금 쉬면서 생각을 정리하며 빈둥빈둥 지냈다. 바람직하지는 않지만 뭐. 그런 시간도 있어야 또 바쁘게 작업할 때는 정신 바짝 차리고 작업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아무튼 지금은 바쁘게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잘 하고 있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비옴 타입 작업도 빠듯한데. 다른 작업을 하나 더 진행하고 있다. 본래 진행하려고 했던 마스킹 테이프 제작은 뒤로 미뤄두었다. 그것까지 손을 대면 정말 감당할 수 없을 테니. 매해 연말이면 괜히 정신없이 바쁜 것 같다. 


뜬금없긴 하지만. 무료 폰트는 과연 독일까. 약일까. 

아마 대다수의 타입 디자이너는 독이라 할 것이다. 나 또한 그렇게 생각한다. 무료 폰트는 독이다. 폰트 시장에 미치는 영향도 직접적이고 한글 폰트에 대한 인식에도 좋은 영향을 미친다고 보기는 어렵다. 기업의 입장에서는 마케팅에 활용하기 좋다. 억 단위의 광고 비용에서 1%만 할애하여도 전용서체 제작이 가능하니 이만큼 가성비가 뛰어난 홍보수단이 어디 있겠는가. 그래서 매년 한글날마다 기업들이 무료 한글 폰트를 배포하고 있다. 네이버에서는 2020년까지 30종의 한글 폰트를 확대 제공하겠다는데. 나 같은 독립 디자이너는 활로를 찾기가 점점 어려워진다. 배달의 민족에서 배포한 5종의 한글 폰트를 보자. 수도 없이 많은 곳에서 활용되고 있다. 활자의 완성도나 좋고 나쁨을 떠나 이미 사람들에게 익숙해지고 있다. 사람들은 무료 폰트에 중독된다. 굳이 비용을 지불하며 폰트를 구매하고 라이선스를 신경 써가며 사용해야 하는가. 하... 한글 폰트는 대체 어쩌다 이렇게 되어버린 것일까. 독이다. 독이지만 달다. 달면 삼키게 된다. 그리고 중독되고. 입에 쓴 약은 쳐다보지 않게 된다. 그 일련의 과정에서 이득을 보는 사람은 누구이며. 손해를 보는 사람은 누구인가. 폰트 시장이 열악해지면 자연스레 타입 디자이너는 줄어들게 된다. 타입 디자이너가 줄어들면 새로운 폰트도 줄어들게 된다. 사용자는 더 이상 새로운 폰트를 제공받지 못하게 된다.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또 달리 생각할 수도 있다. 타입 디자이너가 줄어들고 새로운 폰트가 줄어들어도 기업들은 폰트 회사를 통해 기업서체나 기업의 이름을 담은 무료 폰트를 계속해서 배포할 것이다. 결국은 무료 폰트만 남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 무료 폰트에 정말 미래가 있을까. 이러는 나도 무료 폰트를 사용하고 있다. 나 또한 폰트를 제작하여 무료로 배포하고 있다. 무료 폰트의 홍보 효과는 뛰어나다. 매번 크라우드 펀딩으로 프로젝트를 이어가는 나로서는 그 달콤한 독을 거부하기 힘들다. 어쩔 수 없나. 생각하다가도 다시 마음을 고쳐먹기도 하고. 또 무너지기도 한다. 갈팡질팡 하다 보면 내가 대체 뭘 하고 있는지 우습기도 하지만. 이게 악수가 될 것을 짐작하면서도 또 한 수를 두고 있다.


얼마 전 이용제 선생님의 배양전을 보러 갔었다. 선생님이 그동안 그려온 글자들을 한데 모아 볼 수 있어서 정말 좋았다. 그 일련의 흐름과 앞으로 나아가는 길이 정말 인상 깊었다. 물론 전시에는 드러나지 않은 그 이전의 글자가 더 궁금하기도 하다. 아마 지금 내가 그리고 있는 글자가 아마 그런 정도가 아닐지. 그리고 여백으로 남겨진 10년 후의 글자들 또한 기대된다. 한글타이포그라피학교에서 수업을 진행하면서 이용제 선생님께는 크고 작은 영향을 받고 있다. 직접 무언가를 배운다거나 그러지는 않지만. 술 한잔 하면서. 이야기를 듣다 보면 타입 디자인. 한글 활자 디자인의 방향성이나 의미나 가치 등 여러 가지. 아마도 좋은 영향을 받고 있다고 생각한다. 전시를 찾아간 그날도 이용제 선생님과 안삼열 선생님 그리고 채병록 선생님과 함께 술자리를 가졌다. 디자이너들끼리 모여하는 이야기라고 할 것이 결국 디자인뿐이긴 하지만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인쇄나 후가공에 대한 정보를 얻기도 하고. 글자를 그리는 팁을 얻을 때도 있고. 다 좋지만 결국 얻어먹는 술이 제일 맛있다. 내가 비록 지금은 얻어먹는 처지이지만 얼른 1인분 할 수 있는 디자이너가 되어야 할 텐데. 갈 길이 참 멀었다. 타입 디자인을 시작한 지 이제 3년이 지났다. 5년. 10년이 지났을 때 나는 어떤 모습일까나.










검은고딕. 한글 2,579자와 문장부호로만 구성된 한글 서체. 숫자와 영문 그리고 기타 약물은 제외했다. 작업 기간이 촉박해서 손 닿는데 까지만 작업을 진행했다. 이 글자의 골격은 가장 처음 제작했던 서체 1ST블랙을 기반으로 글자의 폭을 200씩 줄이고 기존 헤드라인 서체들과 고딕체를 참고하여 초성, 중성, 종성의 균형을 조절했다. 꽉 채워진 네모꼴의 헤드라인 스타일 글자라고 할 수 있다. 처음에는 '돌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는데. 돌처럼 단단한. 무거운 서체를 제작하자 생각하여 그리 했지만 완성에 가까워진 지금은 '검은고딕'이라 정정했다. 검은고딕이라 이름을 지은 까닭은 영문 서체에서 가장 굵은 스타일을 Black이라 하여 처음 제작했던 1ST블랙 서체도. 그 이후 개선하여 판매하고 있는 지블랙 서체도 모두 Black 웨이트에서 이름을 빌려온 것인데. 블랙고딕이라고 하기는 우습지 않나. 생각하다 보니 내 이름의 성인 玄 (검을 현) 자의 검다는 의미를 따와 결국 검은고딕이라 이름 짓게 되었다. Black과 玄. 그리고 검은고딕. 현재 제작 중인 프로토타입은 무료 배포될 계획이지만 이 검은고딕을 다듬어 1ST블랙부터 지블랙 그리고 검은고딕으로 이어지는 블랙 웨이트 한글 서체의 완결편을 추후 제작할 계획이다. 


이름이라는 것은 중요하다. 그래픽 디자이너로서 아무것도 모르고 타입디자인에 뛰어들었을 때만 하더라도 나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기에 1ST블랙이니. 지블랙이니. 오리지날. 네온사인. 멜트다운이니. 비옴 타입페이스니 하며 아무렇게나 이름을 지었지만. 이제 와서 보면 늘 내가 만든 서체를 부를 때마다 어색하거나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글자에 대한 접근 자체가 그래피티에서 시작되었기에 영어로 지은 이름이 더 익숙하다 생각하였는데 쓰다 보니 그게 그렇지가 않은 느낌. 아무래도 한글 서체는 한국어로 부르기 좋은 게 제일 좋은 것 같다. 그리 생각하게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에 제작하고 있는 '검은고딕'은 참 마음에 드는 이름이다. 의미도. 이유도 모두 만족스럽다. 이름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까지만 하고.


서체의 유사성이라는 것은 참 애매하기도 하다. 비슷한 종류의 서체. 즉 굉장히 굵은 고딕체들을 찾아보면 가장 쉽게 접할 수 있는 것이 최정호 원도를 복원한 초특태고딕과 장수영 디자이너의 격동고딕이라 할 수 있는데. 한 가지를 더하자면 김동관 디자이너의 꼬딕씨 99g. 물론 검은고딕을 디자인하면서 많은 자료를 찾아보면서 유사할 수 있는 부분들을 배제하며 글자의 구조를 설계했다. 그럼에도 글자의 획이 굵어지면 가독성을 위한 글자 구조의 형태에 제약이 생기게 된다. 이를 남들과 다르게 표현할 방법이 없을까. 말하자면 가독성을 해치지 않는 범위 안에서 글자의 형태를 기존과 다르게 접근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다. 지금 검은고딕은 초기에 설계된 구조를 그대로 유지하여 디자인했지만 이후 작업에서는 약간의 실험을 통해 이를 시도해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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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입디자인을 시작한 이후로 매년 연말이면 정신없이 바쁘다. 크라우드펀딩의 프로젝트 마감을 늘 연말로 잡다 보니 서체 완성하랴. 리워드 준비하랴. 정말 정신이 1도 없다. 비옴체 제작만으로도 빠듯하지 않을까. 마감에 쫓겨 리워드 책자를 급하게 완성할 수는 없다 생각하고 있는데. 비옴체의 서체설명집이라기 보다는 비옴체를 담은 이야기를. 다양한 레퍼런스를 담고 싶은데 시간 내에 가능할지 사실 모르겠다. 일단은 서체 완성을 가장 신경 쓰고 있으니 서체를 먼저 완성하고서 리워드는 조금 미뤄야 할지도 모르겠다. 벌써 18개월을 기다려주신 후원자 분들께는 죄송하지만 조금 더 완성도를 높이고 싶은 마음에.. 모르겠다. 어떻게 하는 게 좋으려나. 다급하게 진행된 검은고딕 작업도 그렇고. 요즘 바빠서 하루에 한 글자 씩 레터링 하는 시간을 쪼개기가 힘들다. 주변에 디자이너 분들의 반응도 괜찮았는데. 벌써 한 달 치를 밀려버린 것 같지만 뭐 시간만 나면 금방 메꿀 수는 있다. 그렇게 365일을 채워 365자의 레터링으로 전시를 하고 싶은데. 이것도 과연 어떻게 될는지는 알 수 없다.


무언가 일을 벌이고 수습하는 것은 힘에 부친다. 온라인을 통한 디자인 워크숍도 의미 있는 프로젝트가 될 수는 없을까. 하여 진행했던 온라인 워크숍은 아무래도 참여가 저조하여 무언가 흐지부지한 느낌이기도. 어떻게든 결과물을 만들어내고 싶어 아직 끝내지는 않았지만 진행이 너무 더디다. 처음 참여를 신청했던 15분 중 5명 정도가 현재 참여하여 진행하고 있지만 에.. 일주일에 한 번 작업이 이루어지는 정도니. 처음부터 예상은 어느 정도 했지만 어쩔 수 없는 것인가 싶다. 



이 작업도 기획만 해두고 진행할 손이 없어서.. 크리스마스 마스킹 테이프를 기획하여 레터링 디자인을 했는데. 크리스마스 캐럴의 반복되는 후렴구나 가사를 모티브로 레터링 하여 디자인은 다 해두었지만 타이밍이 맞지 않는다. 비옴체를 내버려두고 마스킹 테이프를 제작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혹시 모르겠다. 누군가 손을 빌려주면 진행을 할 수 있을지도. 애초에 텀블벅 쪽에서 크리스마스 기간에 단체 기획전 느낌의 그런 것이 와서 진행해둔 작업이었는데. 마스킹 테이프 제작 단가가 생각보다 조금 비싸서.. 크라우드 펀딩이 아니면 부담스럽기도 하고. 프로젝트 기획 페이지에 실물 이미지가 없으면 애매할 것 같아 시안을 제작하려 했었지만.. 어렵게 되어서 아무튼. 시즌에 상관없는 디자인이라면 비옴체를 완성하고서 진행하겠지만 크리스마스가 지나면 빛을 보기 힘든 디자인이니 내년을 기약해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얼마 전 세븐픽쳐스의 블라인드 포스터전에 참여했었다. 기존의 그래픽 스타일과 조금 다르게 디자인해서 알아봐 주는 사람은 아주 극소수였지만. 익명으로 포스터를 전시하고 판매하는 전시였는데. 온오프라인을 통틀어 인쇄비용만큼도 팔리지 않아 결국 한 푼도 받지 못했다. 오프 전시 첫날 방문했는데 정말 당황스러웠다. 포스터가 거꾸로 걸려있는 것이 아닌가. 그보다 가까이서 살펴보니 출력된 결과물이 영 좋지 않았다. 물론 내 작업이 영 좋지 않았을 수도 있겠지만. 디테일도 많이 뭉개지고 배경 질감은 하나도 드러나지 않았다. 위 이미지는 한번 더 손을 댄 작업인데 내 기인적인 취향으로는 이게 훨씬 좋지만 판매라는 것은 또 어떨지 알 수 없어서 무난하게 완성하여 제출했었다. 인쇄물을 직접 확인하였더라면 이런 일이 없었을 지도 모르지만. 아쉽긴 아쉽다. 서체 제작을 긴 시간 진행하다 보면 다른 작업이 정말 재미있어 보이는데. 뭐 덕분에 재미있는 작업을 할 수 있었다. 결과는 썩 좋지 않지만 과정이 즐거웠으니 나쁘지 않다. 샹들리에를 그린 이유는 그래픽 디자인의 오브제로서 그 형태와 디테일이 흥미로워 그려본 것인데 시리즈로 몇 개 더 그릴 생각을 하고 있다. 그리고 형태의 왜곡이나 빛의 산란 그리고 착시와 같은 옵아트 요소를 그래픽 디자인으로 풀어보고 싶어 틈틈이 아이디어를 짜 보고 있다.


추석 연휴 동안 제법 긴 시간. 열흘 가까이 고향인 제주도로 내려가 한숨 돌리고 올라왔었는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개인 작업을 하더라도 무언가 의미 있는 작업들을 이어가야 하지 않을까. 최근 서체 작업만 하다 보니 생각이란 게 별로 없다. 기계처럼 글자를 다듬고 확인하고 수정하고 다듬고 돌려보고 반복하고 그러고 있다. 의미. 독립 디자이너로서 할 수 있는 작업. 클라이언트의 목소리가 아닌 본인 스스로의 목소리를. 색깔을 나타내는 작업. 작업의 중심에 나를 두어야 하지 않을까. 







웹사이트 소개 페이지를 그래픽으로 디자인해 보았던 작업. 이 디자인은 내가 지금까지 이어온 길을 시각화한 것이다. 별 것 아닌 작업이었지만 이 작업은 내게 굉장히 의미 있었고 재미있었던 작업이었다. 이 작업에서 길을 나타내었다면 이번에는 그 길에 이어진 발자국을 드러내 보면 어떨까. 직접적인 영향을 떠나 지금까지 내가 경험해온 것들에 대한 기억들을 그래픽 디자인으로 보여주면 나에게 또 다른 의미가 있지 않을까. 결국 나 좋자고 하는 작업이다. 어릴 적 지냈던 성산일출봉. 그리고 그 해변가에서 주워 먹던 성게. 그래피티에 대한 기억들. 중학생 때는 교악대에서 호른을 연주했었고 매주 주말이면 절벽에 올라서서 자리돔 낚시를 하며 배부를 때까지 잡아먹었다. 고등학교 3년 동안은 바둑부에서 활동했었다. 문학에 빠져 흑역사로 남을 법한 시들로 노트를 빼곡히 채웠었다. 지금까지 해온 무수한 낙서들과 입시미술로 했던 석고소묘. 대학생 때 나를 괴롭혔던 수많은 과제들. 첫 직장에서의 인상적인 경험들. 그 이후로 지금까지 이어진 수많은 기억들. 한 번쯤 작업으로 정리해두고 싶다. 쉽게 잊어버리지는 않겠지만 기억이라는 것은 바래기 마련이니 생각날 때마다 기록으로 정리해두고 있다. 어떻게 작업하느냐가 고민인데. 일단 지금은 딴생각하지 말고 서체를 얼른 완성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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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작업일지를 정리할 시간이 없어서 이렇게 두서없이 주저리주저리 늘어놓았지만 작업은 열심히 진행하고 있다. 다음은 아마도 비옴체를 완성한 이후에나 글을 정리할 수 있지 않을까. 오늘은 397자를 그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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